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6) : 이집트의 영광(17)

Que sais 2021. 3. 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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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이집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자 파라오는 클레오파트라 7. 그녀는 이집트의 영광과 함께 사라진 비운의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클레오파트라하면 독사에 물려 자살한 이집트 최후의 여왕만을 떠올린다. 클레오파트라는 <! 그래?(세계불가사의)/클레오파트라>에서 다루었으므로 함께 참조하기 바란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왕비들의 전통적인 이름이었다. ,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이어받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비들은 클레오파트라라고 하는 마케도니아풍의 이름 또한 이어받았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뿐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왕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가의 여성 이름에서도 발견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의 왕비 또한 이름이 클레오파트라였다.

하지만 수많은 클레오파트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집트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7.

클레오파트라 7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상대는 그녀의 두 남동생들 중 큰 동생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아울레테스는 기원전 51년 죽으면서 열여덟 살 된 클레오파트라와 열 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가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라고 유언했다. 또한 로마에게 자신의 아이들의 후계를 보장해줄 것을 엄숙하게 간청했다. 이는 이집트의 이원정책 중에 하나이므로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남매간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결혼은 두 통치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의 권력다툼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클레오파트라가 우세했다. 그녀는 기원전 51322일 테베 남쪽에 위치한 헤르몬티스에서 신성한 부키스 황소를 손수 몰고 축성식을 치렀다. 이것은 그녀가 당시에 실권을 장악했다는 증거로 인용된다.

 

'두 나라(상하 이집트)의 여 군주이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인 여왕이 테베와 헤르몬티스의 주민들과 사제들이 참석한 가운데 왕실 소속 배들과 함께 아문의 작은 배 안에 그것(황소)을 싣고 노를 저어 오셨다.'

 

이 문장은 클레오파트라가 이전 통치자들과는 달리 의식에 몸소 참석했고 그녀의 남동생은 실권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이집트인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 역사상 남다른 파라오로 인식되는 것은 그녀의 교양과 자질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원체제를 유지하여 부자간이 공동으로 통치하였으나 상황에 따라 아들과 딸이 공동으로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여자인 클레오파트라도 왕자인 남자와 마찬가지로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당대의 여자들이 접근하지 않는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의학 등 여러 과학 분야에 흥미를 보였다. 그밖에도 그림 그리기와 노래에 재능이 있어 7현 리라를 다룰 줄 알았으며, 운동신경이 뛰어난데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 춤과 승마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특히 클레오파트라는 역대 파라오들과는 달리 그리스어는 물론 이집트어를 비롯하여 혈거인(穴居人), 히브리어, 아람어, 시리아어, 메디아어, 파르티아어 등 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이집트인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녀가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옹호자들에게 축출된다(기원전 5095일부터 기원전 4993일 사이).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서 추방된 그녀는 시리아로 피신했다.

 

<영웅들과의 사랑>

당시 지중해 세계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곧 전쟁이 일어날 태세였는데, 그리스 동부지역 전체 특히 이집트는 폼페이우스 편이었다.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89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에게 대참패하고 난 뒤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이집트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13살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측근은 클레오파트라와 폼페이우스가 연합할 것을 두려워해 폼페이우스를 살해한다. 그들은 당대 로마의 실력자인 카이사르에게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지 3일 후에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근들의 기대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왕과 그의 세력을 후원하는 대신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로마에게 이집트 왕을 보호해달라는 공식요청을 받았으므로 카이사르는 법률적인 장치까지 확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카이사르는 두 이집트 왕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판단에 복종할 것을 요청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즉각 찬성했다. 그녀는 약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측근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로 오기는 했으나 군대를 해산시키지는 않은 상태였다.

문제는 카이사르가 이 당시 이집트 군에 맞설만한 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체포하기 위해 이집트에 왔기 때문에 별다른 군대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보병 3,200명과 기병 800명뿐인데 반해 이집트군은 보병 22,000명에 기병 2,000을 확보하고 있었다. 더구나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한 이집트 군은 72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당시 지중해 병력 중 최강이었다.

카이사르는 응원군이 올 때까지 알렉산드리아의 거점에서 버티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에게는 유리한 점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 함께 같은 궁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카이사르가 막강한 이집트군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두 명의 파라오가 자신의 은거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버티기 작전은 성공하여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가 나바타인과 유대인들로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곧바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패배하면서 수많은 군인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집트군은 항복했고 카이사르의 승리로 돌아갔다. 학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클레오파트라가 그녀의 또 다른 동생인 열두 살 된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했다고 추정한다. 물론 그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다시 복권되었다.

카이사르는 전투에 승리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복권시킨 후 곧바로 로마로 출발했다.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떠난 사이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 달리 케사리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아 승승장구하면서 로마의 감독 아래 이집트를 통치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렀고 그녀는 카이사르의 파르네세 빌라에 거주했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영웅인 카이사르를 유혹한 요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아들 케사리온을 데리고 대중 앞에 등장하여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비호 아래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들의 비난을 꿋꿋이 이겨나갔. 하지만 기원전 44카이사르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 후 상황이 달라지자, 그녀는 로마를 벗어나 곧장 이집트로 돌아갔다. 당시 로마법에는 외국인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집트로 탈출했다. 때마침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아들 케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로 왕위에 앉히면서 이집트문제에만 전념했다.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가 죽은 다음 로마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2차 삼두체제(三頭體制)에 의해 통치된다. 원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죽자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살해된 지 2일 후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그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돼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제압할 힘이 부족했다. 때문에 그와 화해하고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에 합의한다. 세 사람은 로마의 통치지역을 분할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프랑스 지역), 레피두스는 에스파냐, 옥타비아누스는 아프리카와 사르데냐, 시칠리아를 관할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안토니우스가 잘 나갔다. 그는 기원전 4210월 카이사르의 살해범들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인들로부터 큰 눈도장을 받았다. 더구나 그가 패배자에게 보인 관용은 친구들은 물론 적으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안토니우스가 실질적인 제국의 일인자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반대자들을 지원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항의하기 위해 잠시 이집트에 들르게 된다. 자신에게 항의하기 위해 도착했다는 것을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는 이 기회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돌려놓고자 했는데,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미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의 아들까지 낳은 전력이 있는 클레오파트라는 그 유명한 진주귀걸이 시음사건을 일으키는 등 자신의 미모와 부를 동원해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토니우스와 로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패권자가 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기원 전 31년에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가 격돌한 악티움 전투500척의 대선단(大船團)4만의 대군이 동원된 싸움이었지만 결과는 안토니우스의 패배였다.

학자들은 당초에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의 악티움 해전의 패배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옥타비아누스를 그녀의 세 번째 애인으로 유혹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3번에 걸쳐 많은 재보를 보내면서 자신의 희망을 간접적으로 전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재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녀의 제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클레오파트라는 최후의 담판을 짓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옥타비아누스를 만났다. 그녀의 소원은 아들인 케사리온에게 물려줄 이집트의 왕위를 빼앗기지 않는 것과 여왕으로 여왕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녀의 제안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답변도 없이, 그녀를 로마로 보내 길거리에서 쇠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겠다며 증오심을 드러냈다.

기원전 30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의 마음을 돌려놓는데 실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죽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후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자살

그런데 현대 과학은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당시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현장에는 여왕과 함께 몸종인 이라스와 샤르미온이 죽어 있었다. 두 명의 몸종들도 여왕이 물린 독사와 같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독사는 처음 발작했을 때 가장 잔인하고 위험하며, 땅굴에서 막 나왔을 때가 제일 위험하다. 또 한 번 물고 나면 독액이 유실되어 위험성은 점차 감소된다고 하였다. 세네카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의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데, 방울뱀의 경우 한 번 무는 것으로 독이 거의 소되어 두 번째는 독성이 거의 없고, 세 번째는 무독 상태 되며 독액이 다시 분비되어 고일 때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 법의학자는 여왕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독사설이나 독액설을 부정한다. 여왕의 방문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여왕이 ()이 연소할 때 발생하는 유독가스의 효능을 알고 있었고, 안토니우스의 장례를 이유로 탄과 태울 수 있는 도구들을 쉽게 방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을 근거로 든다. 더구나 당시의 정황을 적은 내용을 보면 여왕은 침대 위에, 한 몸종은 그 발밑에 또 다른 몸종은 방문을 향해 쓰러져죽어 있었는데, 이 사실은 여왕의 일산화탄소 중독 가능성을 더 높여주고 있다고 법의학자는 설명한다. 이를 두고 <사이언스올>과학은 클레오파트라의 전설 중 가장 잘 알려진 독사의 죽음마저 엄밀함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적은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