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7) : 이집트의 영광(18)

Que sais 2021. 3. 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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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클레오파트라와 시저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대학과 도서관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7대불가사의 파로스 등대는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관계되어 더욱 중요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고대 세계에서 워낙 유명하여 파로스 등대를 제치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로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도서관이 대학교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도서관이라는 명칭보다는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여하튼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광대한 문화의 장소로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창고로 인정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1소테르는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소마 즉 황금관을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하자마자 알렉산드리아를 아테네와 같은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새로운 세력들의 원래 출신지는 그리스 반도였다. 그리스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명도 그리스에 못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오래되어 구태의연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크기가 작은 그리스보다는 모든 면에서 이집트의 환경이 월등하게 좋다는 것을 알았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점령자인 그리스인들이 곧바로 이집트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훼손한다면 결국 전례에 따라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집트인들을 장기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그리스인들이 선진 문명을 갖고 있는 문화 민족이며 함께 잘 살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그대로 인정하되 새로운 그리스 문명을 이집트인들에게 접목시키려고 시도한다.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알렉산드리아에 건설된 도서관으로 그는 두 개의 도서관을 건설했다.

작은 도서관인 세라피스(Serapis) 성전도서관과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무세이온(Mouseion) 도서관이다. 뮤세이온은 건축가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에 있는 뮤즈 신의 전당과 유사한 건물을 건설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란 바로 무세이온을 가르킨다.

세라피스 성전도서관에는 4만 권의 두루마리, 무세이온에는 50만 권의 두루마리 장서가 보관되었다. 대개 두루마리 하나에는 여러 권의 장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엄청난 정보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는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걸으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도서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도서관은 연구원, 작가, 학생, 교수들의 전당이 되었고 도서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고 연구와 공부에만 정진할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와 같이 도서관의 활성화에 노력한 것은 모든 통치 지역에서 이루어진 헬레니즘화 정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타민족의 책을 읽는 것이다. 4세기 말의 주교인 에피파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지구 위의 모든 왕과 통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적었다.

 

모든 저자들, 즉 시인과 산문 작가, 수사학자와 소피스트, 의사와 예언자, 역사학자와 기타 다른 모든 저자들의 작품을 나에게 보내주시오.’

 

기원전 24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도서관을 위해 당시에 구입이 가능한 자료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구입하라고 지시했다. 갈리마크에 의하면 당시 도서관에 보관된 자료는 40만 권이 되며 종류로는 9만종이 되는데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모든 자료가 색인되었다고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더욱 더 고서나 진귀한 책들을 구입하는데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주변국 왕들에게 책을 빌려 복사본을 만들었으며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의 책의 원본을 상당수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그리스 비극을 좋아하여 비극이 쓰여진 책들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에서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의지는 2세기의 의사이자 의학전문저술가인 갈레노스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항구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수색하고 이때 발견된 책들을 압류하여 그것을 베낀 뒤 주인에게는 원본 대신 복사본을 주도록 명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부터 3세까지의 수십 년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초기 과학적 연구는 정말 놀랍다. 원추곡선론을 쓴 아폴로니오스, 처음으로 성좌도와 목록을 만든 히파르코스, 최초의 증기기관을 연구한 헤론 같은 사람들이 이곳 출신이었다. 아르키메데스도 시라쿠사로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공부했으며, 자주 박물관과 서신 왕래했다. 헤로필로스는 가장 위대한 그리스 해부학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직접 생체해부를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하나는 에라토스테네스. 원래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에라토스테네스보다 먼저 디카이아르코스(Dikaiarchos)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나 그의 지구 둘레 측정결과는 상당한 오차가 있었는데 그는 실제보다 1만 킬로미터나 차이가 나는 약 5만 킬로미터다.

대략 기원전 280년에서 196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에라토스테네스는 아테네에서 공부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알렉산드리아로 초빙했다.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원전 234년에서 죽을 때까지 도서관의 관장으로 봉직했는데 그의 가장 큰 없적은 지구 둘레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가 그전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실제 측정을 통해 지구의 크기를 산정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의 노력에 의해 정확한 경도가 확정됐고 제도법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는 상이집트의 시에네에서 태양 광선들이 수직 분수 안의 물이 하지나 동지의 정오 때 완전히 비춘다는 것을 알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더 나아가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경도 위에 위치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두 도시의 경도는 2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그는 왕실 소속의 측정사들로 하여금 시에네에서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거리를 걸어서 측정하여 두 도시의 간격이 5,000스타디온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에서 안에 수직 지침이 고정된 속이 빈 금속 공을 세우게 한 후 태양 광선의 각도를 읽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하지 정오에, 90도 각도와 7.2도 차이가 남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그는 7.2도가 공의 각도의 50분의 1이고 두 도시 사이의 간격이 5,000이므로 지구는 252,000스타디온이라고 추정했다. 이것은 실제의 직경과 50마일 이내 오차로 정확한 것이다.

에라스토테네스보다 약간 선배인 유클리드야말로 알렉산드리아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 중에 한 명이다. 그는 기하학 원론을 써서 오늘까지도 모든 민족과 세대의 수학교사라 일컬어진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 수학자에게 기하학을 이해하는데 기하학 원론보다 좀 더 간단한 길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유클리드의 대답은 간명했다.

 

기하학에 왕도는 없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재정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박물관은 소위 왕립이므로 이집트 왕이 모든 교수와 연구원을 임명하고 봉급을 지급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화되면서 이미 이루어진 연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신관과 종교적 발전은 학자들의 연구 정신을 사라지게 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도 자금만 드는 박물관 운영에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관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이 소규모나마 재정지원을 계속했으므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7(기원전 144116 재위)때에 위기를 맞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아들과 불화가 일자 그를 살해한 후 시체를 잘게 잘라 자신의 며느리에게 보냈다. 그의 잔인한 행동에 분개한 아들의 측근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서관으로 몰리자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불지르라고 명령한다. 포위된 반란군이 불 속에서 튀어나오자 그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살해했다.

여기에서 도서관의 명성을 놓고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프톨레마이오스 7세의 방화 지시로 인해 수많은 자료들이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각국에서는 자신들의 국가에 있는 도서관이 세계 최고의 명성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곤 확장 공사를 벌이기 시작한다.

특히 에게 해에서 25.6킬로미터 떨어진 미시아 지방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도시인 페르가몬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보다 더 거창한 도서관 건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수많은 자료가 파손된 알렉산드리아로선 다른 지역의 도서관을 단기간에 따라 잡기는 다소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역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리들은 페르가몬 도서관을 비롯하여 각국의 도서관 확장 의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냈다. 당시에 사용되던 책은 이집트가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던 파피루스로 만들었는데 바로 이 파피루스의 수출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책을 만드는 파피루스의 공급을 중단하면 외국인들이 더 이상 책을 만들 수 없을 것으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이러한 계교는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간다. 각 국에서 책을 만들던 파피루스의 구입이 불가능하자 대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책이 파피루스보다 더 질기고 사용하기도 편리하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페르가몬을 뜻하는 파르슈멩이라는 이름의 양피지는 곧바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의 수출 제1호였던 파피루스는 그때부터 큰 타격을 입고 판로를 잃어버린다. 세계인들이 공유해야 할 지식 정보를 얕은 꾀로 봉쇄하려던 시도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