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50) : 피라미드 건설(11)

Que sais 2021. 3. 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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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복합건축물>

피라미드의 건설 이유를 명확히 대지 못하는 것은, 피라미드가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건설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는 단순하게 한 가지 목적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복합 건축물이라는 해석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설 의문은 건설 당시의 사회상과 연결한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가 국가 운명을 걸고 건설한 것이다.

피라미드 건설에 관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폭군 파라오가 수많은 노예 주로 이스라엘인들을 채찍으로 혹독하게 부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엄청나게 커다란 돌을 잘 미끄러지게 하기 위한 도료로 나이 많은 여자나 어린아이들의 피를 발랐다는 유언비어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과 같이 채찍이나 노예를 부려서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많은 기록에 나타나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노예 제도가 없었으며 노예라는 말은 가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했다. 상식적으로 영화와 같이 혹독한 조건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면 1천 년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 의해 밝혀진 피라미드의 건설 동기와 작업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범람기는 최소한 3, 4개월 가량 지속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거의 모든 농부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경작이 가능한 나일강 연변이 모두 홍수로 잠겨버렸으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파라오는 범람기 동안 이집트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대책이 피라미드 건설이였다는 것이다. , 건장한 인부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짓게 하고 그 보답으로 곡식을 지급한 것이다. 보수는 현물로 직접 지급했는데, 이는 인부들이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인부들은 보수를 받는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주요 작업 내용은 돌을 캐거나 배에 싣거나 예정된 위치로 운반하는 것 등이었다.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지원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지원자들이 많아 선발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자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부들이 보수를 제때에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업을 했다는 기록으로도 증명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파업 기록이기도 하다.

범람기가 끝나 물이 모두 빠지면 나일강 연변은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퇴적물에 의하여 더없이 비옥한 땅이 된다. 이때는 피라미드 공사가 중지되며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나 홍수 때문에 잠겼던 경작지에서 물이 빠진 후, 농민들이 예전의 자기 땅을 되찾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측량 기술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땅이 비옥한데다가 기후까지 적당하므로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항상 풍년을 이루었다. 특별히 홍수량이 적어 경작지가 줄어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곡식을 수확한 후 다음해까지 저장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사막의 세찬 바람 때문에 창고를 견고하게 짓지 않으면 제대로 곡식을 저장할 수 없었다. 피라미드가 곡식 창고의 역할을 했다는 설이 대두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은 매우 적절한 통치 기법 중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는 곧바로 공사를 마감하고 선왕을 안장한다. 그래서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완성되지 못한 채 시급히 마감이 된 것이다. 새로운 파라오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우선 나일강 변 중에서도 범람기 동안 침수되지 않을 높은 곳에 피라미드를 세울 대지를 선정한다. 그리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종사할 인부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인부들을 모집할 때는 많은 농부들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아주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군대의 막사 같은 곳에 묵으며 양식과 옷을 지급 받는다. 피라미드 건설의 노동자로 뽑히는 것은 매우 큰 혜택이자 영예였다.

 

대피라미드에 배총된 마스타파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피라미드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비단 물질적인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 왕조에서는 파라오만이 미라가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라오는 평소에 아끼던 신하나 친족들에게도 피라미드 주위에 그들의 묘지를 건설하도록 은총을 베풀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파라오에게나 제공될 수 있는 장례 집기를 보장받으며, 미라가 될 수 있고, 영원한 음식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농부들은 미라가 되지도 못하고 또 좋은 무덤에 매장되지도 못한다. 단지 모래를 판 구덩이에 장신구 몇 점과 함께 묻힐 뿐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지하의 신이 된 파라오에 의하여 지하에서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피라미드 건설의 90퍼센트는 기아를 막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나머지 10퍼센트는 종교적인 열정에서 건설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회와 정신 모두가 결합된 결정품의 소산이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당시의 사회 생활상과 통치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시스템이다. 즉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일강의 범람기에 농부들을 기아에서 해방시켜 굶주림에 따른 국민들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하고, 또 파라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묘지라는 개념보다도 이집트인들을 위한 대형 근로 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국력을 쏟을 수 있었다. 즉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우리 나라의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사회 생활상과 통치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즉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우리 나라의 새마을 운동과 비슷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가 전 국가적인 에너지의 집합체로 만든 대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이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며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 꼽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취득한 모든 것을 피라미드 안에 갖고 가기 때문에 피라미드는 당시의 국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왕이 사망하자마자 선왕의 피라미드를 미완성으로 밀봉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선왕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라오들은 파라오로 선정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죽어서 피라미드에 가져갈 것을 준비하였다.

 

<중단없는 피라미드 봉헌>

피라미드 건설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피라미드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한 후 이에 따른 후속 작업 즉 피라미드를 활용하는 이벤트가 당연히 따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피라미드 복합건축물에서 무엇을 하느냐이다.

파라오가 죽으면 필요한 모든 제식을 치른 다음 시신을 묘실에 안치한 후 피라미드를 폐쇄하고 피라미드 건설 공사의 흔적을 지웠다. 그런데 이때부터 피라미드는 본격적으로 기능을 발휘한다.

피라미드는 사망한 파라오를 신격화하고 내세를 보장하기 위해 건설한 건축물이므로 이를 위한 제식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다. 이를 위해 사제와 신전 관리인, 서기는 물론 악사, 수공업자, 농부들이 배정되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밭과 마을 및 작업장을 관리했고 식량과 장비를 신전에 조달했다. 파라오도 서로 경제적 네트워크를 이루어 선대 피라미드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했다.

기원전 25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부시르 문서파피루스는 피라미드 신전의 하루 일과에 대해 많은 내용을 알려준다. 행정적인 목적에서 기록한 이문서는 신관문자로 작성된 것이다.

우선 신전의 사제들은 각각 주야간으로 나뉘어 각종 전례와 제례 그리고 축제를 담당했다. 또한 사제들은 의례를 감독하고 관리했다. 신전의 재물 목록에는 일상용품에서부터 값진 귀중품을 담은 상자까지 기록되었다.

신전 운영에 필요한 재정 정보도 꼼꼼히 기록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정기적인 감독 과정에서 찾아낸 손실 및 결손 사항을 기록했다.

신전은 당연한 일이지만 제식 절차를 엄격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피라미드의 주인인 파라오는 하루에 다섯 번을 식사하는데 내세에서 세 번, 이승에서 두 번이다. 마지막 식사는 당직을 서는 사제들이 담당했다. 이를 위해 피라미드마다 대체로 2503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피라미드가 늘어날수록 피라미드를 관리하는 데도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들어갔다. 이것이 후대에 피라미드를 계속 건설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고대 이집트를 다루는 영화 등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지만 피라미드에서의 신전 업무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우선 아침저녁으로 사제는 입상이 보관된 예배당의 문을 열고 입상들의 옷을 벗겨 하나하나 깨끗이 닦아준다. 그런 다음 다시 옷을 입혀 성유를 발라주고 향을 피운다. 그동안 옆에서 선창 사제가 주문을 낭독한다. 주문이 끝난 후 사제는 물을 뿌려 모든 이승의 흔적을 심령의 힘으로 제거한다. 이는 파라오의 모습이 깃든곳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제물을 헌상하는 홀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반복된다. 이곳에서는 파라오에게 하루에 두 번 제물을 바친다. 신전이 아니라 피라미드에서도 정해진 제식을 바치는데 아침저녁으로 사제가 피라미드 주위를 돌며 물을 뿌리면서 상징적인 정화의식을 행했다.

제식이 끝난 뒤 제구와 남은 기름, 향을 다시 보관함에 넣고 봉인했다. 먹을 수 있는 제물은 사제들과 고용된 신관들에게 일일 할당량으로 분배했다.

그러나 이들 일상 의식은 매년 축제때에는 중단된다. 축제 기간에 피라미드에서의 제식은 보다 업그레이드되어 축전 행사 때 매일 열세 마리의 황소를 도축하여 파라오에게 제물로 바쳤다. 축전이 끝나면 황소 고기는 모든 사제와 신관들에게 분배되었다.

사제와 신관은 운하나 군대 복무 같은 의무를 면제받거나 면세 혜택을 받았다. 또한 그들의 가족은 피라미드 묘역 인근의 피라미드 도시에 살았다. 이 구역은 피라미드 묘역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피라미드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와는 다르다. 노동자 거주지는 대개 사막에 있었고 피라미드 건설이 끝나면 폐쇄했지만, 수많은 피라미드 도시는 고왕국 후기까지 거주지로서 계속 번성했다.

피라미드 제식에 관련하는 사람들은 사제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포함된다. 피라미드가 체계를 갖추고 운용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종사했다. 기록에 보이는 직업만 해도 도축업자, 맥주양조자, 이발사, 손톱미용사, 의사, 가수, 무용수, 문지기, 하인, 전령 등이다. 물론 관리자급인 대신, 재판관, 서기, 창고관리인, 직조잠독관은 물론 파라오의 장군들도 피라미드 제식을 위해 참여했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행된 이러한 전통을 아케나톤은 나름대로의 개혁으로 이를 완전히 폐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한마디로 이집트 전역에 과거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사제와 제관들의 업무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다. 그의 단 하나의 명령에 의해 거의 2천 년 전부터 건설된 수많은 피라미드에 종사하던 이집트인들을 실업자로 만든 것이다. 아케나톤이 사망하자마자 그가 신봉하던 아톤 신앙이 급격히 몰락한 이유다.

 

참고문헌 :

파피루스 Cyperus papyrus (식물), 고정희의 서양정원사백과, 2007.2

<르포> 4300년전 최고 종교문자 '피라미드텍스트' 20년 만에 빛보다, 한상용, 연합뉴스, 2016.06.20.

https://www.cinecafe.kr/?mid=Wiki_M&document_srl=256772

http://goden.egypte-alles-over.nl/03_Piramideteksten_Pepi_I_inleiding.html

http://www.startour.pe.kr/local/mediterranean/Guide_Egypt-history.htm

세계상식백과, 리처더스다이제스트-동아출판사, 1991

옛 문명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 피터제임스, 까치, 2001

피라미드 속의 과학, 페터 야노시, 도솔, 2007.

파라오의 저주, 이종호, 북카라반,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