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51) : 쿠프의 대피라미드(1)

Que sais 2021. 3. 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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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거론할 때마다 가장 놀라는 것은 신석기 후반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커다란 피라미드들을 건설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금이나 구리는 발견되었으나 철은 고사하고 청동조차 고왕국 초기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 원시적인 기술만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죠세르의 피라미드를 보면 완벽한 시공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건축가인 임호테프 즉 기원전 27세기에 멤피스에서 활동한 이집트 제3왕조의 대신이 완성시킨 죠세르의 피라미드가 이집트인들에게 어찌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지 임호테프는 후대에 돌을 사용한 건축의 발명자로서 신격화되었을 정도다.

이집트에는 약140여개의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고 하지만 현대인들조차 의문을 표명하는 것은 가장 거대한 쿠프의 대피라미드와 케프렌의 피라미드어떻게 건설했느냐이다.

학자들의 수많은 검증을 거쳐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집트에서 어떻게 건설하였는지를 쿠프의 피라미드를 기본으로 설명한다.

 

사용된 장비 및 공구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공구디오르트나 도르리트와 같은 단단한 돌덩어리가 주류였다.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끌이나 자귀, 혹은 날카롭게 갈은 칼 등을 이런 돌들로 만들었다. 대피라미드 석재 채취장에서 돌을 채취하는데 사용되었던 구리로 만든 끌과 나무망치가 발견되었고 석재를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던 다양한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구리의 경우 아마도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 가지 불순물을 사용하여 강도를 높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후대에 등장하는 청동기 차원은 아니다.

 

피트리 경이 발견한 목재공구

특히 메디나에서 완벽한 형태의 측량도구들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집트인들이 이들을 갖고 피라미드의 설계도에 맞춰 정확한 규격의 석재를 생산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위치 선정

거대한 건축물을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평을 고르는 것인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수준기(水準器) 즉 어떤 평면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가를 조사하는 기구를 사용했다.

우선 피라미드를 건설할 장소로 비교적 평평한 바위를 고른다. 그 후 측량 기사의 지시 하에 바위에 물길을 파고 물을 부은 다음 막대를 꼽아 물높이를 표시해 놓는다. 그리고 나서 수면의 높이까지 바위의 표면을 깎아내면 평탄한 대지 즉 기초 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측량 기사란 줄을 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정확한 방위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여러 가지 제시되었다.

우선 소머스 크라크와 R. 엥글백 박사는 피라미드를 안치할 정확한 방위는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측량하면 얻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북쪽 방향을 측정하여 얻은 두 점이 만드는 각을 둘로 나누면 방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의 단점은 수평면 주위가 불규칙할 경우 오차가 많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설

I. E. S. 에드워드 박사는 원통형 벽으로 만든 인공 수평면을 이용하면 보다 정확한 방위를 알아낼 수 있다고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을 감안해 볼 때 곡선과 벽 상부를 완전한 수평면으로 만들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V. 마라질 그리오와 C. 리날디 박사는 해가 뜨고 지는 깃대의 그림자가 만드는 각을 둘로 나누면 된다고 제안하였는데 그것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정확치 않음은 물론 수평면을 정확히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마르텐 이스레 박사가 제안한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하는 방법도 원칙적으로는 그리오와 리날디 박사의 제안과 같다. 우선 바닥에 작은 깃대를 꽂고 해의 이동에 따라 그림자가 가장 짧아진 지점과 가장 길어진 지점을 파악한 후 그 점을 북쪽으로 둥글게 이어 그린다. 그러면 깃대가 정중앙이 되는데 태양이 서쪽으로 지기 시작할 때 그림자의 점이 새로운 호에 도달하는데 이 두 점의 이등분이 남과 북의 방향을 가르켜 준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원시적인 기구로 방위를 알아내는 데는 가장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여건을 볼 때 정말로 이러한 방법이 채택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 천 년 전부터 태양, , ,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이 태양을 관측하여 방위를 알아내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는 불분명한데 학자들은 상술한 방법 중에 한 두 가지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채석장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때에는 쐐기를 밖은 후 뜨거운 물을 부어 돌이 부셔지게 한 후 떼어냈다. 나무 쐐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여 바위가 갈라진다. 석영 가루를 물로 축여 연마제(硏磨劑)로 사용했다.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석재 공급 입지조건은 비교적 좋았다.

이집트는 암석 종류가 매우 풍부한 나라였고 채굴도 비교적 쉬웠다. 이집트인들이 하얀 돌이라 부르는 석회석은 카이로 근처의 모카탐이나 카이로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투라와 마사라에서 채굴했다.

한편 대피라미드에 사용된 돌은 피라미드에서 불과 300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채취한 것이다. 이 채석장에 30미터 길이의 거대한 홈들이 파여져 있는데 면적으로 보면 2,750,000세제곱미터의 돌을 채취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대피라미드 건설을 위해 사용된 돌의 양과 거의 유사하다.

 

케프렌 피라미드 근처의 석회기반암에서 채석한 흔적

대피라미드 외에도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사용된 돌들은 대체로 현장에서 가까운 채석장에서 운반했다. 기자 지역은 대부분이 사암(沙岩) 지역이므로 피라미드를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채취하여 사용하는데 적격이다. 대부분이 사암지역인 기자에 피라미드가 많이 건설된 것이 우연은 아닌 셈이다.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3곳의 채석장에서 채석된 돌을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했다. 기자 지역에서 나오는 사암내부의 심재(心材)로 사용되었다. 외벽용의 매끄러운 석회석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투라에서 채석되었다. 그리고 회랑과 묘실의 내부에 사용된 화강석900킬로미터나 떨어진 나일강의 첫 번 째 급류인 카타락트 부근에 있는 아스완에서 가져왔다.

참고적으로 고대이집트에서 화강석은 매우 귀한 돌로 파라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화강석을 파라오의 돌로 불렀다. 피라미드에 화강석이 사용되었다는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운반

돌을 운반할 때는 목재로 만든 바구니, 썰매나 특정 모양의 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각 석재에 손잡이와 같은 돌기를 설치하여 밧줄을 걸 수 있게 하였는데 건물을 세운 뒤에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다. 또 다른 석재에는 움푹 패인 홈들이 있는데 이것은 지렛대를 걸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무로 만든 도르래와 밧줄도 발견되었다.

또한 나무로 만든 썰매 모양의 운반 틀을 발견했는데 무거운 석재나 완성된 조각상을 위에 얹어 이동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석재의 운반은 기차의 선로와 같은 미끄럼틀을 만들고 그 위에 운반 틀을 수직으로 설치하여 편평한 표면뿐 아니라 곡선의 길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운반 틀이 이동할 때 심한 마찰을 피하고 쉽게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식물성 기름이나 물을 윤활유처럼 뿌려 운반하였다.

 

석재 운반

3900년 경 드제우티에텝 파라오알바트르로 된 거상을 운반하는 경우 174명이 44명씩 4줄로 나뉘어 앞에서 끌고 있다. 조상의 무게는 약 60톤 정도로 추정되며 썰매 앞에서 미끌어지기 쉽도록 물을 뿌리고 있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평균 중량이 2.5, 큰 것은 70톤이나 나가는 화강석을 아스완에서 운반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거대한 거룻배를 제작하여 항구까지 운반한 다음 그곳에서 피라미드 현장까지 썰매를 주로 사용하여 운반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선박 건조 능력을 감안 할 경우 이 정도의 돌덩어리를 운반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집트인들의 배 건조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18왕조의 하셉수트 여왕(기원전 1473~1458년 재위) 시대에 카르낙의 아몬 대신전을 위하여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단 한 번의 항해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오벨리스크 하나의 길이가 30미터에 700톤이므로 이 배는 채석장인 아스완에서 카르낙까지 1,400톤의 돌을 운반하여야 했다. 그 당시에 사용된 배는 2,000톤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는 뜻이다.

 

재료의 선별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중앙 핵을 둘러싸는 축대(계단) 형태의 연속적인 구조로 시공한다. 이 벽들은 위로 올라가면서 줄어들고 중앙에서 외부로 쌓는다. 계단을 채우는데 이용되는 돌이 외부 측벽 전면부에 쌓아 지기도 하며 외피용 마감재로서는 주로 질이 좋은 석회석이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외부 피복 부분에 상형 문자채색된 그림을 그리거나 돋을 새김으로 조각을 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도 채색된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거라는 설이 있다.

12와 제13왕조에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매우 간단한 건설 방법이 사용되었다. 현대적인 건물의 기초 부분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방식으로 약간 저급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돌로 된 줄기초들을 먼저 만든 후에 연마되지 않은 돌이나 점토, 굽지 않은 벽돌 등을 채우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빨리 건축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장기간 보존하는데 문제가 있어 현재까지 완전하게 보존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