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48) : 피라미드 건설(9)

Que sais 2021. 3. 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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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건축의 퇴장>

기원전 1794년 제12왕조가 끝나면서 이집트에서 내분이 일어나 거대 기념비나 묘역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여하튼 피라미드가 본격적으로 세워지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절정기였으며 파라오는 자신을 신으로 칭하면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땅에 떨어지고 실질적인 지배자로 지방 제후들이 등장하면서 피라미드가 조직적으로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현재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건설된 피라미드는 약 140여 기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 현존하는 것은 80기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모두는 나일 강 서안에 있으며 유네스코모든 피라미드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후대에 들어서면 도굴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파라오가 직접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를 공개적으로 파헤치는 일도 일어날 정도였다. 도굴되었는지 아닌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도 기원전 2000년 이전에 약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여하튼 이런 폐단 때문에 후대의 파라오들은 쿠프의 대피라미드처럼 무덤을 웅장하게 축조하지 않았다.

피라미드 건설이 쇠퇴한 또 다른 이유는 비실용적이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미라를 영구히 보존하는 데도 문제점이 발견되었지만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하여 엄청난 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와 그에 딸린 신전을 운영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대로 갈수록 피라미드의 위상은 약화되어 갔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13왕조 이후에는 피라미드가 건설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독일고고학연구소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도 피라미드를 축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20왕조 말에 도굴꾼들이 꺼내온 파피루스 텍스트에는 제17왕조 및 제18왕조 초기의 왕들이 피라미드를 세웠다는 설명이 있다. 물론 이때 세운 피라미드를 고왕국의 피라미드에 견줄 수는 없다. 이들 피라미드는 흙벽돌로 축조한 작은 건축물로 외장을 입히지 않고 흰색으로 칠했다.

피라미드의 위상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파라오와 그의 왕비들이 피라미드에 묻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8왕조 때에 보면 피라미드에 묻히는 사람은 파라오가 아니라 방계 왕족들과 고위 관리였으며, 평민들도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을 축조해 묻히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이들 피라미드들은 형태만 그럴듯한 작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 당시의 소형 피라미드는 두 가지 유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내부에 숭배용 예배당을 축조하여 출입이 가능하게 만든 형태무덤 입구 전면 위에 피라미드를 세우되 출입이 불가능하게 만든 형태였다. 이들 피라미드들은 소형이므로 경사각이 70도나 되는 가파른 것도 있으며 주로 점토벽돌을 사용했다. 상부에 피라미디온(각뿔)이 있으며 여기에는 태양신 앞에서 기도하는 사자의 모습을 새겨 넣기도 했다.

피라미드가 이집트 초기부터 지녔던 기념비적 성격을 잃어버리자 피라미드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미라들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자의 영혼이 매일 아침 피라미드 무덤 꼭대기에 앉아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고, 생명의 영원한 순환에 동참하기 위해서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한 것이다.

 

왕가의 계곡 입구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에서 퇴장하지만 피라미드 개념 자체의 분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왕족과 고위 관리, 심지어는 평민들도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일부가 피라미드 형태였다. 기본적으로 제18왕조 중엽부터다.

이런 건축물들은 사카라부터 하누비아의 솔렙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 중 유명한 피라미드는 우나스 왕의 참배로 남쪽에 위치한 투탕카문 시대의 총사령관 호렘호브의 것이다. 그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등극하여 사망후 <왕가의 계곡>에 안장되었다.

학자들이 개인무덤에 주목하는 것은 무덤을 장식하는 벽화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피라미드는 두 가지 중요한 건축 양식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내부에 숭배용 예배당이 있고 출입이 가능한 피라미드다. 또 다른 피라미드는 무덤 입구 전면 위에 세워진 것으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가장 유명한 개인 피라미드는 신왕국 시대의 테베 서쪽 강변의 데이르 엘 메디나에서 발견된 노동자의 무덤이다. 그는 파라오의 계곡에서 파라오의 무덤 건축을 담당했는데 그는 작업 도중 틈틈이 자신의 무덤을 장식했다.

이 피라미드 무덤은 작은 탑문을 설치한 건물 전면과 그 뒤에 주벽으로 둘러싼 마당으로 이루어졌다. 마당의 뒷벽은 암석 벽이며 이곳을 기둥이 들어선 주랑으로 꾸몄다. 입구로 들어서면 암석에 만들어진 성소로 이어지고 성소의 벽에는 내세의 인물을 장식으로 그렸다. 입구 위의 암석 지붕에 약 5미터의 벽돌 피라미드가 솟아있다. 건축 자재는 점토벽돌이고 여기에 석회를 발라 하얗게 만들었다. 꼭대기 피라미디온은 석회석으로 만들었는데 태양신 앞에서 기도하는 사자의 모습을 새겼다.

이런 작은 무덤은 매우 많이 건설되었는데 피라미드 동쪽에 추가로 벽감을 외벽에 깊이 파놓았다. 이 벽감에는 태양을 숭배하는 무덤 주인의 입상을 놓았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체로 출입할 수 없는데도 대부분 도굴되었다. 이 때문에 이런 형태의 피라미드 무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피라미드가 당초에 지녔던 기념비적 성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피라미드가 퇴조하는 것은 도굴의 요인도 있지만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이 달라지면서 피라미드에 담긴 의미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부활의 소망과 매일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내세에 대한 상징이었다. 기본관념은 죽은자의 영혼이 매일 아침 피라미드 무덤 꼭대기에 앉아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고 생명의 영원한 순환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만든 피라미드조차 도굴되면서 이들 믿음이 퇴조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이 달라지면서 피라미드에 담긴 의미도 변화했다는 뜻이다.

피라미드 개념이 퇴조한다고해서 피라미드가 완전히 퇴출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8세기말 제25왕조의 피예 파라오는 누비아에서 나일계곡을 점령하여 쿠시지역을 통치할 때 고대 피라미드에 매력을 갖고 자신의 무덤을 엘쿠르 옆 옛 수도인 나파타 인근의 게벨 바르카에 피라미드 형식으로 건축했다.

이를 학자들은 피예가 새로운 건축 전통을 쌓았다고 평가한다. 그의 후계자와 수많은 왕비들이 모두 이 피라미드 안의 묘지에 안장되었기 때문이다.

피에의 피라미드는 측면 12미터이며 경사각은 68도다. 이 피라미드의 축조 방식은 단순하다. 외장은 네모난 암석을 안전하게 쌓았고 내부는 자갈과 돌조각으로 채운 다음 진흙반죽을 넣어 고정했다. 지하묘실은 동쪽의 계단형 통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통로는 매장 후 폐쇄했으며 피라미드 동쪽에 작은 예배당 형태의 사당을 지었다.

피예의 후계자들은 피라미드 무덤의 통로를 동쪽으로 연장했고 성소를 지었으며 묘실 출입도 가능했다. 이 왕조의 타하르카 파라오는 자신의 묘역을 게벨 바르칼 건너편 '누리'로 옮겨 새로운 왕실 묘역을 건설했다. 묘실은 열주 홀로 이루어졌으며 오시리스 개념을 건축에 도입했다. '누리'에는 21명의 파라오와 52명의 왕비 그리고 왕자들의 묘지가 건설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도 피라미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전 300년경부터 누비아의 정치적인 중심지인 메로에 왕국에서 이집트의 전통이 계속 이어졌다. 한마디로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로마 문화가 접목되었는데 메로에에서는 피라미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후기 피라미드의 특징은 꼭대기 즉 피라미디온이 없다는 점이다.

피라미드는 1030미터 높일 돌 받침대 위에 세웠고 그 측면은 계단 모양 또는 편편하게 만들었다. 동쪽에 있는 숭배용 예배당 전면에는 부조로 장식한 탑문을 세웠다. 지하 묘실은 동쪽으로 난 깊은 계단형 통로를 거쳐 들어갈 수 있었다.

메로에의 네크로폴리스는 거의 600년 동안 파라오들의 매장지로 사용되었다. 그 중 유명한 북쪽의 네크로폴리스에는 30명의 파라오, 8명의 왕비 및 왕자가 매장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중엽 에티오피아인들이 메로에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내세에 관한 건축적 상징이었던 피라미드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국한해볼 때 후대의 이집트 왕조인 테베의 신왕국은 자신들의 미라를 영구 보관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나일 강 서쪽 절벽 밑의 바위를 파고 현실을 만들어서 매장하는 방법이었다. 즉 ‘왕가의 계곡왕비의 계곡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들 왕조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 무덤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외부에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같은 염원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문 파라오를 제외한 모든 무덤이 도굴되었는데, 파라오의 저주는 바로 이런 연유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