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친일파 을사오적

친일파 을사오적 (2)

Que sais 2021. 4. 29. 21:45

https://youtu.be/mf4l-dRXlkQ

〈이완용(1858~1926)〉

을사오적이완용(18581926),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이지만 이중에서 괴수는 당연히 이완용이다. 합방 당시 내각 총리대신으로 일 외교사의 중심이 된 이완용은 원래 미국통에서 친러파로 변했다가 친일파로 변질된 대표적인 매국노로 거론된다.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서 이호석과 신씨 사이에서 태어나 1882년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후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고 우부승지, 내무참의,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아관파천(1896) 당시 러시아파가 실권을 잡자 친러파로 변신하여 외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 서리가 되었고 전라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등의 관직을 거쳤으며 일본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재빨리 친일파로 변신한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열린 어전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끝까지 반대했으나 이미 일본 쪽에 의해 매수되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무대신 이하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일본 측이 제시한 조약안에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토록 하는데 보증함’이란 조문 하나를 첨가하는 조건으로 찬성했고 이에 따라 외부대신 박제순은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와 1905년 11월 17일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중요한 절차를 마감한다. 이 중에서도 이완용은 시종 일관 주동적인 역할을 다했음으로 ‘을사오적’의 수괴가 된 것이다.

이완용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자 일본은 이토히로부미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일본에 동조하여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일본의 조선 침탈의 과정의 일환으로 일본이 고급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을 제정할 수 있는  「정미7조약」을 1907년 7월에 체결하도록 주도하였다. 이 조약에 의거해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갔으며 또한 한국 군대해산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또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하얼빈에서 살해되자 내각령으로 3일간 춤과 노래를 금지시켰고 한국 정부 대표다렌까지 직접 가서 조문했다. 11월 4일, 이또의 장례식날 서울 장충단에서는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직접 참가하여 이또에 대한 추도회를 벌였다. 이또에 대한 추도회는 여러 곳에서 열렸는데 이용구가 주도하는 일진회가 읽은 조문 중 일부를 인용한다.

‘이또 공작 전하에게 곡하며 고하나니, 오호애재(嗚呼哀哉)며 오호통재라 (중략) 공은 일본의 대원훈(大元勳)이요 조선의 대활불이요, 동양의 대정치요 세계의 대위인이요 우리 동궁의 대현사(大賢師)이시라 (중략) 공의 국정 혁신의 계책이 없었던들 우리 조선의 과거 결과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지를 알 수 없나니 (중략) 오호통재로다 (중략) 천추에 유감인 한 장 조사(弔辭)로 공을 위하여 곡하며 일본을 위하여 곡하며 우리 조선을 위하여 곡하며 동양을 위하여 곡하며 세계를 위하여 곡하오니, 엎드려 빌건대 높으신 혼령께서는 굽어 살펴 감응하옵소서.’

이또를 위한 추도회는 전국 각지에서 계속 열렸으며 12월 12일 영도사에서도 이완용 이하 각 대신이 참석하여 추도회를 또 다시 여는 등 일제의 앞잡이로서 선두에 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완용의 행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친일행위로 국민적 지탄을 받던 이완용은 1909년 12월 이재명의 의거로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에 찔린다. 약 2개월의 치료 끝에 회복되었으며 계속적인 테러 위협에 직면하자 이완용은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다. 합방을 보다 빨리 추진하겠다는 의도였다. 한편 이재명교수형에 처해지고 연루자 11명에게는 최고 15년, 최하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이등박문의 장례 행렬

그는 내각 대신은 물론 다른 원로 고관에게도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충분한 공채를 준다는 합방 기초 조건을 작성케 한 후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거쳐 ‘한국 황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 양여한다’는 합방조약을 통감 데라우치와 조인함으로써 조선을 일본에게 완전히 이양하는 주구 노릇을 하였다.
이완용송병준과 함께 한일합방의 주역으로도 악명이 높은데 한일합방 당시의 비사를 보면 이완용과 송병준은 서로 한일합병의 주역이 되려고 공을 다투었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한일합방의 실무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 한국통감부의 외무부장인 고마쓰(小松錄)가 1934년 일어판 〈경성일보〉에 연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0년 7월 이미 조선 측에서는 일진회가 주가 되어 합방론을 말하고 있었고 일본 측에서도 병합의 방침을 확립하고 있어서 단지 시일의 문제였다. 데라우치 통감은 경성 도착 후 이왕가에 경의를 표하면서 병합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올리지 않았다. (중략) 그런 가운데 8월에 들어 무더운 여름철이 되었는데 통감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나 되면 교섭을 시도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각의는 이미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으므로 한일합방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당시에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해서는 일본 조야에서 두 가지 기류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문치파들은 일본의 재정 능력과 국제 열강들의 시선 등을 의식해 시간을 벌자는 견해였던 반면 군부와 재야 강경파들은 즉시 병합을 주장했다.
그런데 일본 각의한국 강점을 결정하자 한국 내의 매국노들은 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되자 일진회는 이를 계기로 더욱 공공연히 합방을 주장했는데 이완용 내각방해공작에 나선다. 일진회가 1909년 12월 4일 합방 성명서를 발표하고 황제와 내각,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하자 이완용 내각은 청원서를 기각하고 대신 친일단체를 동원해 일진회의 합방 청원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일진회에 합방의 공로를 넘겨주기 싫다는 뜻이였다.
이완용의 매국행위는 그의 비서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혈의 루』를 쓴 이인직이 밀사로서 고마쓰를 만난 경위를 고마쓰가 자세히 밝힘으로써 적나라하게 알려졌다. 이인직의 행위에 대해 고마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관저를 방문한 조선인이 있었다. 그는 한국 총리 이완용의 비서역을 하고 있었는데 명치 30년 즉 1900년경 일본으로 망명해 수년간 공부해서 일본말이 능한 자였다. 그는 내가 정치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과외생으로 강의록을 읽었다고 한다. 이후 내가 조선으로 온 뒤에도 옛날의 은사라면서 어울렸는데 그는 이완용의 의중을 말했다.
지난 이토 공이 하얼번에서 한인 악한에 의해 돌아가신 이래 급속하게 병합의 실행을 볼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려를 짜고 있다. 만약 일본에서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들고 나오면 사직하는 도리 외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내각을 물러난다고 해서 한국에 유리한 형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일본의 뜻에 등을 돌리는 일이 되기 때문에 국외에서나 은둔하는 길 외에는 없다. (중략) 총리는 한국이나 일본의 법이 미치지 않는 상해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될지 모른다고 아주 탄식하고 있다. 그래서 귀하와 면식이 있음을 인연으로 도대체 이완용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듣고 싶어 왔다.’

고마쓰이인직과 이야기하는 것은 이총리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병합 담판에서 좋은 서막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술회했다. 고마쓰가 이와 같이 술회한 것은 밀사로 온 이인직으로부터 직접 들은 역사관 때문이다. 그는 일본의 조선 강점당위성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조선은 삼한시대부터 역성혁명이 빈번했던 국가다. (중략) 병합으로 부르기보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정복조차 행해졌다. 예를 들면 신라왕 김씨는 38대로 해서 고려의 왕씨에게 정복되었으며 조선 천하를 쥔 왕씨는 500년 후 대신인 이성계에서 망해 버렸다. (중략) 이성계는 현 한국 황제의 수조(首祖)인데 그는 시종 중국에 예속되어 명조, 청조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중략) 일청전쟁일본은 중국의 예속으로부터 조선을 구출하여 조선을 독립된 한국 정부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 되는데, 금번의 일한병합은 종속관계가 아닌 전연융화(全然融和)로서 한 나라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의 국민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인직의 말을 들은 고마쓰이인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원수는 병합 후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세비를 받을 수 있다. (중략) 또한 내각의 여러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으로서 병합 실행에 기여하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지 않은 자에게까지도 비위의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자에게는 모두 공후백자남(公侯柏子男또)작의 영작을 수여받고 세습재산도 받게된다.

영친왕과 찍은 이완용

그렇다면 병합은 일본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한국의 치안과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다. 즉 한국은 세계의 대국인 일본의 일부분이 되어 그 인민은 일약 당당한 일본제국의 신민이 된다. 이것이 종래의 조선에 있어서 상호 정복이나 제 외국에 있어서의 병합의 예에 비하여 전연 그 취지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완용의 비서이인직고마쓰를 찾은 것은 합병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합병 후 자신들을 어떻게 대우하겠느냐는 것인데 고마쓰친일 매국노들에게 가장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인직고마쓰의 말에 고무되어 일본이 그와 같은 약속을 지킨다면 이총리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각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후 3~4일 후 다시 고마쓰를 찾아와 이완용의 말을 전했다.

‘총리는 병합 조건이 의외로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병합을 너무 오래 끌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다.’

이완용의 적극적인 자세를 확인한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과 직접 만나고 싶다고 자신의 의견을 전하자 8월 16일 이완용이 직접 데라우치 통감 저택을 방문하고 한일합방의 대요를 필기한 각서를 교환했다고 고마쓰는 술회했다.
이후 한일합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합방 두 달이 채 못된 1910년 10월 12일 이완용은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백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었다. 고종이 사망하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운동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나자 『매일신보』 3월 8일자 대민 경고에서 이완용은 다음과 같이 만세운동을 반대했다.

“이번에 조선독립운동이라 칭하여 경성(京城) 기타에서 행한 운동이라는 것은 사리(事理)를 불변하고 국정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으로 재선동화의 실(實)을 상해하는 것이라 말하지 아니치 못할지라. (중략) 내선동화의 실을 상해코자 하는 자는 하등 자기를 위하려는 도배로 실로 가증(可憎) 또 가민(可憫)한 일이라, 여(余)는 차제에 이와 같은 허설(虛說)에 선동되어 몸을 그르치고 세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특히 우리 조선인 제군을 위하여 (祈) 하노라.”

1921년 이완용후작으로 승진했고 아들 항구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들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괴수로서의 모든 영화를 누렸다. 그는 이재명에 의해 피습되는 등 약간의 액운을 당했다고는 하나 친일파의 거두답지 않게 당시로서는 천수라고 볼 수 있는 68살인 192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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