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의 중요성은 한국인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외국에 나라를 팔아먹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사에서 왕조가 바뀌는 많은 격변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정권교체 차원이었다.
그런데 을사오적은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는 당사자들로 이들이 일본에 헌상한 을사조약은 조선과 일본 간에 공식적으로 처리된 공식 문서라는 점이다. 이 서류의 심각성은 국제사회가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단초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엄밀하게 보면 조선이 일본에게 국가를 선위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서류로 확인해주었으므로 일본이 조선을 마음대로 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이덕일 박사는 우리나라 역사를 읽으면 하나같이 망하는 순간 비장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 한 왕조의 멸망은 적어도 그동안 지탱된 권력구조를 멸망시키는 측과 모든 것을 새로 만들기 위해 악전고투 끝에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국 측의 경우 항우가 유방과의 천하 패권을 둔 해하 전투 끝에 패하자 마지막으로 막사에서 주연을 베풀고 총애하던 우미인에게 춤을 추게 한 후 스스로 노래를 부른 후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일본의 경우도 덕천가강(德川家康)이 1615년 대판에서 대판성을 함락시켜 풍신가(風臣家)를 멸망시키고 덕천막부를 열었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마의태자가 일제 강점기에 남다른 인기를 받은 것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파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려고 하자 마의태자가 강력히 반대한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데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노력하다가 힘을 다하면 말 것이지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주려고 합니까?’
역사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경순왕이 시랑 김봉휴를 시켜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를 왕건에게 보낸다. 이를 보고 마의태자는 통곡한 후 개골산 즉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麻衣)와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도 끝까지 항전의욕을 놓치지 않고 재기를 위해 병력들을 양성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마의태자의 이런 행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신라로부터 선위를 받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 1389〜1392)의 이름이 공양왕인 것은 ‘공손하게 왕위를 양보한 왕’이란 뜻이다. 신라의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이름도 ‘공경하고 순한 왕’이란 뜻이다.
조선의 마지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미 조선을 병합하기로 한 일본에 대해 고종이 국새를 찍었느냐 안찍었느냐로 논란을 벌이지만 결론은 경순왕, 공양왕과 다름없다. 한마디로 국새 찍기로 나라운명이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조약서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근래 일부학자들이 아쉬움을 표하는 것은 고종이 정말로 도장을 찍지 않으려면 도장찍기가 아니라 총칼을 들고 일어나 싸워야했다는 설명이다. 고종은 조약체결에 분개한 신하의 자살을 말렸다. 민영환, 조병세가 자결하고 전 참판 심상훈이 자결하려고 하자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어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살아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보다 못하다.’
결국 심상훈은 고종의 말을 듣고 죽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답할 나라가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이 갖고 있는 함정은 조선의 왕이 단 한 번도 일제와 맞서 무기를 들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는 그래도 같은 민족에게 나라를 넘겼다고 하지만 고종은 일본에게 나라를 넘긴 것이다. 물론 시대상황과 조건이 모두 다르지만 여하튼 싸움 없이 나라를 넘긴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들의 말로는 말끔하지 않다. 우선 신라, 고려, 조선의 마지막 왕들은 자신을 멸망시킨 세력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신라 경순왕이 백관들을 데리고 경주를 떠나 왕건에게 항복하러 오자 왕건은 특별히 교외까지 나가 경순왕을 맞아들었다. 이후 그는 궁의 동쪽에 있는 집을 내려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다음에는 경순왕을 정승(正承)으로 삼았는데 이는 태자보다 위에 있는 자리로 1,000석을 주고 기타 시종들도 모두 거느리도록 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쳐 경주로 부르며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엄밀한 의미로 볼 때 경순왕 당사자로만 보면 결코 손해나는 거래는 아니다. 후삼국 시대에 이미 신라의 실질적인 영토는 경주 일원에 불과하므로 선왕 경애왕이 견훤에게 잡혀 죽은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삶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왕건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장인과 사위의 우의도 돈독해졌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의 경우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중국을 치러 나가는 이성계에게 고려의 모든 핵심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최영을 충주로 옮겼다가 참형했고 우왕도 강화도로 귀향갔다. 왕이 신하에 의해 귀향가는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후 상황은 코미디와 마찬가지다. 우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우왕의 아들 창왕인데 이성계 일파는 창왕이 우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란 모함을 씌워 폐위시켰다. ‘가짜인 신씨를 폐하고 진짜인 왕씨를 세워야한다’는 명분이다. 이의 대타가 공양왕이다.
그런데 우왕은 이성계에게 강력 대항했다. 강화도에서 현 여주로 유배지가 옮겨진 우왕은 최영의 생질이며 전 대호군인 김저와 정득후가 찾아오자 이렇게 말했다.
‘울분 속에 이곳에서 지내기가 어렵다. 가만히 있다가 죽음을 맞는 것보다 한 역사(力士)를 얻어 이성계를 살해하면 내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본래부터 예의판서 곽충보와 사이가 좋으니 그대들이 가사 만나보고 도모하라.’
그런데 우왕과 사이가 좋았다는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탄로난다. 이 사건으로 우왕은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다가 죽임을 당한다. 고려 왕위를 이성계에 바친 창왕과 공양왕도 미래는 마찬가지였다. 창왕도 폐위된 후 우왕이 살해되자마자 강화에서 살해되었으며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삼척에서 태조 3년(1394) 살해되었다.
그런데 조선을 한민족이 아닌 일본에 바친 고종과 순종도 비참한 생애를 마친 것은 사실이다. 1905년 을사조약에 분개한 신하들의 죽음을 말렸던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묻는 일제의 압력으로 아들 순종에게 강제로 선위하여 태황제가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이태왕으로 다시 격하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덕수궁 이왕으로 불리던 고종이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회영, 민영달 등 측근들과 논의하던 중 이를 눈치 챈 일본에 의해 1919년 1월 독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순종 또한 1926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진상이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신라, 고려가 모두 왕조의 마지막과 함께 생애를 마치는 비장함을 보여주지 못했다는데 아쉬움을 표한다. 그런데 왕조를 망친 이들의 결과는 매우 다르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복한 쪽의 힘의 크기에 따라 달라졌다고 볼 수 있는데 경순왕은 보존, 공양왕은 살해되었다.
문제는 조선왕조다. 조선왕조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에게 합병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외치던 한민족의 기상을 한마디로 패댕기 친 것인데 실무적인 면으로 볼 때 조선의 멸망은 일본에 ‘양위’하는 형식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모리스 고들리 박사는 국가를 정복이라는 ‘외생적’ 과정에 의해서 형성되는 경우와 사회의 한 부분이 점차적으로 다른 성원들에 대해 지배권을 형성하는 ‘내생적’인 과정을 통해서 형성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모든 권력은 폭력과 동의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는 이 두 요소 중에서 보다 중요하고 강력한 요소는 폭력이 아니라 지배받는 사람들의 ‘동의’라고 설명한다. 한 집단이 지배권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 피지배집단의 ‘협조’는 불가능할지라도 동의와 인정에 도달할 수 있는 합의가 중요하다는 뜻인데 문제는 신라와 고려, 고려와 조선의 양위가 조선과 일본간의 선양과 법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서류적인 의미에서 한 통치국가를 다른 통치국가에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후 ‘내선일체’로 일본과 조선국이 다름이 없다고 강조한 이유다.
문제는 을사오적이 조선의 국운이 쇠약하여 다른 세력의 힘을 빌려야 한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대상이 일본이라는 점이다. 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을 넘긴 것과 차이를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이러한 국권 넘기기를 선양으로 포장하자 당대의 수많은 열강들이 진정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사실 일제 강점기에 국제사회 즉 일본과 전투한 나라들조차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자체에 대해 커다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합병을 양해했다.
한민족 스스로 일본에 통치 즉 합병을 요청했다는 명백한 서류에 국제사회가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을사오적이 한민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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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2003년 8월, 친일파, 동학군 특별법」, 주선일, 내일신문, 2003.08.22.
「『혈의루』 작가 이인직은 합병 밀사」, 김종욱 외, 『월간중앙』 2004년 9월호
「스스로 운명 개척못한 대한제국, 결국 운명의 나락으로」, 송우혜, 조선일보, 2004.10.20.
「우금티를 비웃는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 송성영, 오마이뉴스, 2004.11.16.
「을사오적」, 나무위키
『세기의 악당』, 이종호, 북카라반, 2010
『친일파 99인』, 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한국사사전』, 김한종 외, 책과함께어린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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