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숭릉 :
제18대 현종(1641〜1674) 및 명성왕후 김씨(1642〜1683)의 능이다. 숭릉은 동구릉 안에 있는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비공개였는데 201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 했다. 동구릉 9개 중 입구에서 볼 때 가장 좌측에 있는데 숭릉 안내판에서 왕릉까지 적어도 10〜15분 정도 걸어야 하지만 이 정도의 발품을 팔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1644년 귀국하였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164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 그의 나이 19세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단 한 명도 두지 않았다.
현종이 재위한 15년간 조선은 효종이 활발하게 벌였던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 북벌운동에 대한 실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문화적 중화주의의 실현이라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한마디로 아버지인 효종이 활발하게 준비하였던 북벌운동은 청나라의 국력이 오히려 점점 강성해지면서 군사적·정치적으로 무모하다는 것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중국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진정한 성리학적 질서가 잡힌 사회를 실현하려는 이른바 조선중화주의를 구현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장렬왕후의 복상문제로 불거진다. 이 문제는 장렬왕후의 휘릉에서 설명한다.
현종 때는 외침과 내란이 없었으므로 전반적으로 사회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염병과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정부는 경제 재건에 공을 들였다.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영직첩(影職帖) 즉 실제 근무는 하지 않고 벼슬만 가진 직책과 공명첩(空名帖)도 대량으로 발급했다. 공명첩이란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임명장으로 이것을 발행한 이유는 정부의 재정을 보충하는 정책으로 시행되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제도가 훗날 조선 사회의 신분제 해체에 크게 기여했다. 한마디로 만만한 평민이 양반으로 상승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란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호구 증가를 위해 양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사찰에 있는 동자들도 환속시켰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관개시설을 만들어 수리면적을 늘렸다. 또한 함경도 산악 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했고 두만강 안에 출몰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개 관청을 승격시키는 등 실속있는 국방정책을 견지했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에 중요한 혼천의를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현종 때 조정이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특히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예송 논쟁에 휩싸였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지방의 선비들 사이에도 반목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현종이 학문적인 논쟁에서 시작된 예론 정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서인과 남인의 손을 차례로 들어주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결국 예송논쟁은 숙종 때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학자들은 왕의 상복 문제가 중요 정치 현안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가 평화로웠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도 설명한다.
여하튼 현종 나름대로 조선의 실정을 감안한 정책을 수립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1666년에는 예상치 못한 국제 사건이 일어난다. 네덜란드 국적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도중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1653년 8월 제주 남쪽해안에 좌초하여 스페르웨르호는 산산조각이 난 후 침몰하였다. 이 배에 승선하였던 사람들은 서기인 하멜(Hendrick Hamel)을 포함해서 모두 64명으로 28명이 희생되었고 34명만 살았다.
하멜 일행은 그 후 10개월 가량 제주에서 억류생활을 보낸 후 1654년 5월 강진 해남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에서 2년여를 체류했고 1656년 3월에 전라도로 다시 유배된 후 1663년 여수 좌수영, 순천, 남원 등 세 곳으로 분리 이송되었다. 이들 중 여수 좌수영에 유배된 하멜을 포함해 8명이, 1666년 9월 야간에 미리 준비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한국에서 14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한 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하멜은 그 동안의 한국에서 겪은 표류, 난파, 억류, 유배, 탈출 과정들을 네덜란드에 귀환하여 『하멜표류기』를 출간하였다. 『하멜표류기』를 통하여 하멜은 현재까지 한국을 유럽서방에 최초로 소개한 역사적 인물이 된다. 하멜이 강진 병영에 억류되어 있을 동안에 보았던 은행나무는 아직도 강진에 살아있고 현재 네덜란드에서 건립한 기념관도 인근에 세워져 있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는 청풍김씨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효종 2년(1651)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립되었다. 1674년 현종이 사망하고 아들인 숙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명성왕후와 그의 아버지 김우명은 서인의 편으로 당파적 입장을 숨기지 않고 궁내의 남인세력의 여자들을 추방하는 것에도 관여하였으며 당시 남인가의 여인이며 숙종의 여인인 장희빈 즉 장옥정을 훗날 궐 밖으로 내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명성왕후는 친정의 배경과 그 자신의 과격한 성격이 겹쳐서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혹자는 현종이 후궁이 없었던 왕이 된 것은 명성왕후의 거칠고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힘을 받는다. 당대에 왕비가 아무리 시샘을 한다고 해도 후궁을 두는 것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명성왕후에 대해서는 왕대비가 된 후 아들인 숙종을 둘러싸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악평이 주를 이룬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과도 연관된다. 숙종이 원인모를 병에 걸리자 왕대비임에도 무당을 찾는다. 그런데 무당은 숙종이 병에 걸린 이유가 삼재(三災)에 들어있기 때문으로 어머니가 아들을 대신하여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고 벌을 서야 한다고 말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왕대비임에도 무당의 주문대로 물벼락을 맞는 등 벌을 선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를 얻어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동구릉 입구에서 숭릉과 혜릉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혜릉이 보이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숭릉이 보인다. 능역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 옆에 배위가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데 숭릉은 홍살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부터 참도가 시작된다. 배위도 참도가 시작되는 옆에 위치한다.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8칸 정자각이다.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각 형식인데 숭릉의 경우 익랑이 붙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며 정전의 공포는 일출목 이익공, 배위청의 공포는 이익공의 구조이며 규모가 8칸으로 확대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게 건축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로 평가되어 보물 1742호로 지정되었다. 참고적으로 정자각인 건원릉과 목릉의 정자각도 2011년 12월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곳으로 인정하여 보물로 지정했는데 이들은 모두 동구릉에 있다.
숭릉은 쌍릉으로 조영되어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난간석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을 글자로 새겼다. 그런데 석물은 민폐를 덜기 위해 1년 전 현종이 자신의 아버지 능을 여주로 천장하면서 묻어놓았던(현 동구릉 원릉터) 것을 이용했다. 이때 신하들이 영릉의 석물을 쓰는 것에 대해 ‘아버지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의 제사를 하지 않는다’며 반대 상소를 했으나 송시열과 유생 등의 변론에 따라 어린 숙종은 그대로 행할 것을 명했다.
장명등,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화려한 꽃무늬를 새겨놓았고 문무인석은 옷 주름을 비롯해 얼굴의 이목구비가 입체적이지 않고 선으로 표현돼 있다. 숭릉이 남다른 것은 예감이 3개가 된다는 점이다. 또한 능침을 지키는 석호의 꼬리가 배 아래에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어 생동감을 준다. 비각 안의 능표에 각인된 비문은 ‘조선국 현종대왕 숭릉 명성왕후 부좌’라 적혀있다.
현종 사후 조선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 벌어진다.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실록』 편찬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이 선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하여 숙종의 독촉을 받고 비로소 숙종 3년(1677)에 겨우 완성된다. 그런데 『현종실록』 편찬에는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했으므로 서인측은 불만이 많았다. 소위 졸속 실록이라는 비난인데 1680년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이 설치되며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수정실록(修正實錄)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는데 개수실록은 『현종실록』이 유일하다.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에 대한 평가가 고깝지 않은 것은 자명한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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