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목릉
조선왕조에서 파란만장한 생으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목릉은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능으로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있다. 제일 좌측이 선조의 능이고, 중앙 의인왕후, 우측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릉을 목릉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고 이황 등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목릉성세’라고 불려지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 인달방 사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하성군에 책봉되었는데 명종의 후사가 없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567년 명종이 사망하자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친정을 한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20세까지지만 상황에 따라 이보다 빨리 친정을 하곤 했다. 또한 선조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아버지가 대원군으로 봉해짐으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원군 제도가 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수렴청정 결재 때 구중궁궐의 안채에서 대비가 내시를 시켜 결재하나, 조선 왕실에서는 발 뒤에서 직접 결재를 해 번거로움과 전달상의 오류를 막았다. 수렴 청대(請對) 즉 뵙기를 청함은 한 달에 6회씩이었고, 병관(兵官)과 같은 중요한 결재는 왕에게 직접 고하고 대비가 재결했다.
선조는 41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재위했다. 선조가 왕이 될 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인 하원군과 하릉군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인 선조는 현직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거절하여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선조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 즉위한 첫 사례다. 그러므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게 된다. 선조는 왕에 오른 후 여러 번 생부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나 성리학자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취소한다. 선조의 재위 중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의 시기로 볼 수 있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인데 이 부분은 여기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서자의 후손으로, 왕이 되어 남다른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임진왜란 등에서 큰 활약을 한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을 제치고 세자로 삼으려 했다.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인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 즉 세자로 책봉되는 절차를 다 밟지 않은 채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 뒤 계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가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선조의 뜻을 받들어 일부에서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조선왕조의 큰 분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선조가 숨을 거두면서 일부 신하들을 불러놓고 적자 영창대군의 앞날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겨 분란을 재촉했다. 선조는 1608년 상궁 김개시가 수라상에 올린 떡을 먹다 체하여 갑자기 사망한다. 이후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선조의 치세 연간에 동서분당(東西分黨)과 같은 ‘당쟁’이 일어났고, 임진왜란과 같은 외침을 막아내지 못하였다는 점 때문에 선조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연갑수 박사는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를 일방적인 피해의식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일본과의 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졌으므로 조선인들이 받은 피해는 막대한 것을 볼 때 일본의 침략 의도를 처음부터 좌절시키거나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으로 일본의 침략 의도를 원천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었다면 선조와 조선왕조의 존립여부에 대한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본군이 압도적 군사력을 갖고 조선을 침략하자 선조는 일본군에 항복하는 대신 피난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의 구원군을 요청하고, 관군을 재조직하고 의병들의 항전을 독려하면서 장기전 태세로 나갔고 궁극적으로 일본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조선왕실에서 선조를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중흥을 이룬 공로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묘호에 ‘종(宗)’이 아닌 ‘조(祖)’를 부여한 것이다. 물론 선조가 과연 ‘조’로 호칭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반발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묘호에 대해서는 헌인릉((獻仁陵, 사적 제194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본래의 목릉에는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로 능을 건설할 여력이 없었던 탓으로 정자각을 선조의 능침 쪽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목릉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짙은 수림의 서어나무 군락지가 자리잡고 있다. 대체로 왕릉의 경우 능 입구의 홍살문에서 가장 먼저 정자각이 눈에 띄는데 목릉은 홍살문 안쪽으로 비각만 조금 보일뿐 정자각이 보이지 않는다. 홍살문을 지나 서쪽으로 꺾여진 참도를 따라 들어가야 비로소 정자각에 도착한다. 또한 참도는 정자각에서 선조릉, 의인왕후릉, 인목왕후릉으로 각각 뻗으며 꺾이고 층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영했기 때문이다. 목릉의 참도는 조선왕릉 중 가장 길이가 길다. 또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직선 참도가 아닌 경우는 공순영릉의 공릉, 신덕왕후의 정릉 등이다.
정자각은 원래 산릉제례와 하관직전까지 시신을 모시는 곳으로 『경국대전』에서는 능침, 침전, 능전(陵殿)이라고 하는데 왕과 왕비의 처소를 일괄하여 연침(燕寑)이라 한다. 아늑한 잠자리란 뜻이다. 서민은 주거라 하고 사대부이상은 연거(燕居)라 한다. 정자각 내부에는 화문석을 깔고 신어상(神御床), 검은 칠을 한 제상 2좌(坐), 향상(香床) 1좌, 촛대상 2좌, 붉은 칠을 한 축상(祝床) 1좌, 준소상(遵所床) 1좌를 두는데 2012년 11월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다.
목릉 정자각은 원래 건원릉 서쪽에 건축되었다가 인조 8년(1630)에 건원릉 동쪽의 현재 위치로 이전 건립된 건물로, 최초 건립과 이전 건립 모습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이전 건립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짜 올린 공포)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를 배열한 건축양식의 건물로 구조가 장식화되기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 동부지구 사릉관리소 조성원 선생은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 축조에 관한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우측 신도의 계단 난간 상단부에 3개의 줄이 있는 것은 후대의 왕이 직접 제사를 모신, 즉 친행(親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왕릉 중에서 후손인 왕이 직접 선조 왕릉에 참배하였을 때 3개의 줄이 만든다는 것으로 사실 추후에 3개의 줄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자각에 오르는 작은 계단이라 할지라도 세세한 면에서 깊은 뜻이 숨어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선조의 목릉과 세조의 광릉 등에는 줄이 없다고 하자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후퇴한다. 건설한 지 오래되어 마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므로 정자각을 올라갈 때마다 계단을 꼼꼼히 살펴보면 3개의 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확연히 구분되어 그 역시 흥미를 더할 것이다.
목릉의 경우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이 보이는데 이는 동원이강의 변형으로 조선왕릉 중 잔디정원이 가장 넓은 왕릉이다. 선조는 원래 건원릉 서쪽 다섯 번째 산줄기에 능침을 만들었는데 인조 8년(1630) 심명세가 목릉에 물기가 있고 불길하니 천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런데 막상 천장을 하려고 능을 파보니 물기가 없어 모두들 분개했다고 한다.
선조의 능침에는 다른 두 왕비 능침에는 보이지 않는 병풍석이 둘러쳐 있다. 병풍석 대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연화와 모란의 꽃문양이 독특하다. 이것은 이후에 조성되는 왕릉 석물의 문양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팔각의 장명등, 넓은 석상 등은 여타 능과 다름이 없지만 조각 솜씨가 매우 서투르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3미터 내외로 크기만 할 뿐 말뚝 같은 느낌으로 상체와 하체와의 비율이 맞지 않아 갑갑해 뵈는데 조선 시대 석인들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선조의 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는 160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양 전란 때문에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선조의 계비인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선조 2년(1569) 15세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선조가 내린 비망기에 따르면 의인왕후는 중전으로 있으면서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를 섬김에 효성이 극진하였고, 후궁 소생인 여러 아이들에게도 은애가 지극하였다고 하는 등 부덕(婦德)을 갖추었는데 불행하게도 소생없이 사망했다.
의인왕후 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는데 전란 뒤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왕릉과 마찬가지로 석물들이 크기만 할 뿐 말뚝 같아 역시 졸작으로 평가한다. 의인왕후 능에서 주목되는 것은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다. 이들 무늬는 이곳에서 처음 보이는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계속적으로 새겨졌다. 한마디로 조선 왕릉 조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9세에 51세인 선조의 계비가 되었고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과의 정권 알력으로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된 후 살해되고 자신은 서궁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신분이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는 건원릉 왼쪽 다섯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인목왕후의 능은 의인왕후의 능보다 다소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져 생동감을 보이지만, 문⋅무인석의 허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비율이 2대 1 정도로 상하체 불균형이 심하다.
목릉에서 의인왕후의 능침은 남편 선조, 선조의 능침은 광해군, 인목대비의 능침은 인조 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시대별 조영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지만 목릉은 조선 왕릉 전체로 볼 때 가장 졸작으로 선조 대에 벌어진 임진왜란 등 상상할 수 없는 전쟁의 여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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