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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10) : 제1구역 동구릉(7)

Que sais 2021. 6. 28. 10:04

https://youtu.be/gtfh13Fj0Vo

 원릉

원릉은 조선 왕조 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영조(16941776) 계비 정순왕후 김씨(17451805)의 능이다. 1699연잉군(延礽君)으로 봉해지고 1704년에 진사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린 후 1712년에 궁궐을 나가 살게 되자 숙종은 연잉군의 집에 양성(養性)이란 당호를 하사했다. 영조는 영명한 군주로 기록되는데 즉위 이전 18세 때부터 왕세제로 책봉된 28세까지 약 10년간 궁궐 밖에서 생활을 하여 서민적이고 절검하는 생활 습성이 배어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왕 중에서 남다르게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백성의 고민을 해소시키는데 누구보다 앞장 선 것은 이 때문으로 본다.

 

 

영조숙종의 아들이며 경종의 동생이지만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로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 출신, 천인 계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오른 팔 용비늘 같은 무늬가 있었으며 재기가 뛰어나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똘똘 뭉친 조선에서 첩의 자식들이 관계에 나가기도 어려운 차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왕인 당사자로도 찝찝한 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영조가 갖고 있는 이러한 출생상의 약점은 그가 체질적으로 유학자들을 싫어하고, 명분론을 자주 무시해버린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영조의 왕위 등극은 상당한 우여 곡절을 겪는데 이는 경종의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도 소위 노론소론 간의 싸움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소론은 경종을 호위하며 정권유지에 급급했는데 이때 노론은 소론과 대립하며 연잉군을 지지했다.

사실상 이들 혈투가 워낙 치열했으므로 영조의 입지는 매우 불안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여 1724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물론 남인과 노론들 틈에서 미약한 권력을 유지해 오던 소론들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등에 없고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노론 측이 이를 지나치지 않고 장헌세자의 비행과 난행을 고발하여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였다. 결국 영조 자신은 붕당 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들 사도세자붕당정치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아들을 당파싸움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인지라 누구보다도 당파 싸움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영조는 모든 당파를 없애겠다고 표방하면서 본격적인 탕평을 시도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 궤도에 오르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1728년의 무신란(戊申亂) 이인좌경종의 독살설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킨 후부터다. 애초에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그가 경종의 뒤를 잇자 대세를 인정하는 입장이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들은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서 일반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남인 일부를 규합해 정변을 일으킨 것이 무신란이었다. 반란은 노론정권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을 겪은 영조로서는 보다 근원적인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했다.

영조의 생각은 단순했다. 어느 특정한 붕당에 기대지 않으면서 왕권을 굳건히 하자는 의도다. 영조노론과 소론 모두에 명분상 하자가 있으며, 각기 충신과 역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붕당보다는 인물의 현명함을 기준으로 인사를 단행하고,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재상의 권한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강화하였다. 탕평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했다. 또한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 간 결혼을 금지하고자 각각 대문에 동색금혼패를 걸게 하는 등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영조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재위한데다 비상한 정치능력도 겸비하여 탕평책으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꾀한 후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했다. 또한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켰다.

1760 2개월간에 걸쳐 청개천을 준설하고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한성의 골칫거리였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신해 바치는 베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반면에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結錢)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 위주인 지주층이 부담토록 했다.

영조는 신분에 따른 차별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여 양처(良妻) 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한 후 다음해에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영조시대에 특이한 것서얼차별에 따른 사회참여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해 서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는 등 조선왕조의 오랜 고질병 등을 해결해 조선 왕조를 번영의 시대로 들어가게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영조는 최장수 왕이었던 만큼 생전에 8회에 걸쳐 산릉원을 조영하거나 천장해, 능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숙종의 교명을 근거로 제도를 정비하여 국조상례보편을 발간했다. 따라서 원릉의 석물제도는 새로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조는 원래 달성서씨 서종제(徐宗梯)의 딸정성왕후와 가례를 치렀으나, 왕비가 1757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고양에 있는 서오릉정성왕후의 능지를 마련하고 봉분 두 자리를 만들어 우측을 비워 뒀다. 홍릉(弘陵)이라 이름하며 자신이 사망하면 우측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길 원했다. 영조의 뜻대로 처음에는 영조의 능지를 홍릉으로 정했으나 정조는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했는데 동구릉에 있는 옛 영릉(寧陵)이 완전한 길지라며 신하들이 적극 추천했다. 한마디로 건원릉에 버금가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에 정조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구릉 내 현재의 자리로 영조의 능지를 정한 것은 아버지 영조가 조강지처와 한곳에 묻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왕실의 번영에 더 큰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원릉자리효종의 능침으로 한 번 사용했던 자리다. 왕의 능을 같은 자리에 쓴다는 것은 당시의 관례에 어긋나지만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영조의 능침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조선왕조의 법도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원릉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장례가 끝난 후 1759 6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중전의 자리를 비워두면 안 된다는 의견이 일자 경주김씨 김한구(金漢耈)의 딸 15의 어린 처녀인 정순왕후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손주인 정조는 물론 사도세자의 부인경의왕후혜경궁홍씨보다 어린 왕비는 왕실 규범에 따라 모후(母后)가 됐고, 영조가 서거한 후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됐다.

정순왕후의 친정은 김홍욱(金弘郁)의 후손으로서 집안의 강직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사,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된 문제에 자주 관여함으로써 파란을 일으켰다. 정순왕후는 영조 재위연간에 이미 그의 친형제인 김귀주를 통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개입한 실적이 있다. 정조 연간에는 홍국영(洪國榮), 은언군(恩彦君)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정조와 대립하였고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4년간 수렴청정하였는데 15세인 순조수렴청정(1803)을 거두면서 원하지 않는 은퇴를 한다.

1805정순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은 원릉의 능 위쪽 좌측이 대길지라며 적극 추천하자 그들의 말대로 순조는 정순왕후를 영조와 같은 자리로 능침을 정했다. 순조에 의해 쌍릉으로 조성된 원릉은 병풍석을 만들지 않고 숭릉(崇陵)의 제도에 따라 난간석을 서로 이어 붙여 조성했다. 난간석의 석주에는 쇠사슬 문양을 넣어 상징성을 더했다. 두 개의 봉분 앞에 각각 혼유석을 놓아 쌍릉 조성을 하고 난간 중앙에 사각장명등을 세웠고, 공간은 꽃문양으로 장식했다. 망주석의 세호혜릉처럼 우측의 것은 위를 향하고 좌측 것은 땅으로 내려온다. 이창환 교수는 이와 관련해 능침에 있던 혼백오른쪽 망주석으로 나가 능역 정원에서 놀다 다시 능침을 찾아올 때 왼쪽 망주석을 보고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설명한다.

망주석 위쪽에 있는 상향의 세호(細虎)가 재미있다. 세호라는 말의 뜻은 호랑이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도마뱀, 다람쥐 또는 청설모처럼 보인다. 김동순 정릉관리소 문화해설사는 정조 춘관통고에서 처음으로 세호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망주석에 조각된 세호가 과거에는 호랑이보다는 도마뱀, 다람쥐 또는 청설모로 조각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망주석에 새겨지는 세호가 도마뱀인들 어떻고 호랑이인들 어떠냐마는 호랑이로 부르는 것이 더 의미있게 보였음직하다.

 

문인석 공간인 중계와 무인석 공간인 하계를 통합하고 높낮이의 등급을 두지 않았으며 장대석으로 경계도 하지 않았다. 문인 공간과 무인 공간의 높낮이를 두지 않은 새로운 형태는 고려와 조선시대 통틀어 최초의 능원으로 이후 조선의 모든 능은 중계와 하계를 같은 공간에 통합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다른 왕릉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으로 문인석은 대체로 어깨가 좁은 형태이며, 무인석은 위풍당당하지만 입체감이 좀 떨어진다는 평가다. 평소 검소했던 영조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자각 좌측으로 세워진 비각은 정자각보다 앞에 있는데 다른 능에 비해 매우 크며 3개의 표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1776년 정조는 비각을 2칸으로 만들어 조선국 영종대왕 원릉이라 표기한 표석을 세우고 1칸을 비워두었다. 1805년 순조는 비워둔 자리에 조선국 정순왕후 부좌라 기록한 표석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쌍릉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