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현릉
현릉은 제5대 문종(1414〜1452) 및 현덕왕후 권씨(1418〜1441)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현왕후 심씨다. 세종 3년(1421) 8살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37년부터 세종을 대신하여 서무를 결재했으며 막상 왕위에 오른 것은 1450년으로 그의 나이 37세였다. 세종은 1442년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를 받게 했고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고 1445년부터 본격적인 섭정을 시작했다.
세자로 있었던 기간이 무려 30년이나 되지만 정작 재위 기간은 2년 3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긴 준비 기간에 비해 매우 아쉬운 집권이지만 문종은 즉위하기 전부터 실질적인 정치 경험을 쌓았다. 물론 세자의 섭정이 국정 전반에 걸친 것은 아니었고, 인사․형벌․군사 등 중요한 사무는 그대로 세종이 관장하였기 때문에 세종이 이룬 왕정의 틀과 정치운영체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아 군제상의 개혁도 단행했고 로켓의 시조라고도 불리는 신기전 발사대 화차를 직접 개발하기도 했고 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도 문종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세자시절 아버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누구보다도 많이 협력하였고, 운회언역(韻會諺譯)을 할 때에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과 같이 이를 관장하였다. 『동국병감』을 편찬하고, 『고려사』를 간행하였으며, 『고려사절요』 편찬을 완성하였다. 특히 문종은 유학뿐 아니라 천문과 산술에도 정통했고 서도에도 능해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고 한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여러 가지 개혁을 했으나 몸이 허약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승하했다. 그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死六臣) 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병은 유명한 등창이다. 세종의 임종 때 그는 등창을 앓은 직후였다. 부스럼이 터진 구멍이 제대로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장을 맞았다. 신하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따뜻한 방에 거처하며 치료를 청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삼년상을 치뤘다. 삼년상 후에는 신하들과 일일이 윤대하며 정사에 몰두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일찍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진다.
즉 문종이 일찍 사망한 것은 원래 몸이 허약한데다 과로했기 때문으로 인식하는데 근래 문종은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라 세조와 연계된 의관 전순의에 의해, 반하(半夏)를 즐겨 먹는 꿩고기로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상태다.
조선왕조실록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세조가 문종의 사망에 관여했다는 정황이 보인다.
문종과 세조의 중간 매개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의 의관 전순의다. 전순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 등 5대 임금의 질환을 치료했던 당대의 명의로 내의원 의원에서 첨지중추원사사(僉知中樞院事使)까지 올랐다.
전순의는 의관 노중례, 최윤, 김유지와 함께 한의학의 3대 저술 중 하나인 의방유취를 공동 편찬했고 근래에 발견된 식료찬요와 세종 때 세계 최초로 과학영농온실(https://que-sais2020.tistory.com/12)을 건설했다는 기록을 적은 산가요록을 펴냈다. 그런 전순의가 세조의 사주로 문종 살해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는 까닭은 문종의 사망 요인이 된 종기를 치료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종기는 원래 고량진미를 과식할 경우에 생기며 초기 치료를 잘 하면 사망까지 이르는 병은 아니라고 의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도 문종이 종기로 사망한 것은 원래 몸이 약한 점도 있었지만 매우 특이한 예라고 지적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전순의의 죄목은 크게 3가지다.
제일 먼저 종기가 번성했을 때 움직이는 것을 크게 금기하는데 전순의는 문종으로 하여금 사신들을 접대하는 연회 참석을 금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국왕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번거로운 절차를 요구하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벅찬 일인데 환자를 혹사시켜 병환을 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종기가 이미 화농되었을 때는 침을 써서 배농시키지만 초기 증상에 쓰면 도리어 증상이 악화되고 염증이 심화되는데 전순의는 화농되지 않은 종기를 고의적으로 건드려 증상이 보다 악화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지금같이 정교한 침이 아니므로 환처에 강한 자극을 주면 증상이 악화되는 것이 상례인데 전순의가 이런 기초 지식을 모두 무시하면서 까지 문종에게 비상식적인 처방을 한 것은 고의가 아니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보다 구체적으로 전순의가 문종을 독살했음이 분명한 증거다. 원래 꿩이나 닭, 오리고기는 껍질에 기름이 과다하여 종기가 났을 때 금기로 치는데도 불구하고 의관인 전순의는 특히 문종에게 독성이 있는 꿩고기를 계속 먹게 했다는 점이다. 꿩은 독성이 강한 천남성과의 다년초인 반하(半夏)를 매우 즐기는데 문종과 같은 경우 반하를 먹는 꿩고기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꿩고기를 겨울철에만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야생에서 반하가 잘 자라는 여름에 꿩고기는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을 전순의가 이를 무시하고 문종에게 계속 섭취토록 했다는 것은 고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처방이라는 설명으로 문종이 독살되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 문제는 여기에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므로 끄새이야기 "세조의 문종 살해?"(que-sais2020.tistory.com/35)를 참조하기 바란다.
문종의 부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 영릉 우측 언덕 즉 본래의 세종 영릉 옆으로 장지를 정했다. 당시 영릉은 현재의 헌인릉 우측에 있었는데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오고 바위가 있어, 취소하고 건원릉 동쪽에 안장했다. 구 영릉이 조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옮겨졌으므로 현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른 가장 오래된 능이다.
문종이 현덕왕후를 받아들이게 된 데는 이력이 있다.
문종은 14살 때 상호군(上護軍) 김오문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으나, 그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당을 궁 안으로 데려와 방술을 꾀하다가 발각돼 세종에게 폐출 당한다. 김씨를 폐하고 이어 종부시소윤(宗簿寺小尹) 봉려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으나 부부간의 금실이 좋지 못했고 궁녀들과 음행을 저지르다 발각돼 폐위된다. 음행을 저질렀던 세자빈은 요즘으로 말하면 레즈비언이다.
세자빈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된 현덕왕후는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14세의 나이로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세자의 후궁이 되었고 세종 23년(1441) 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산후병으로 곧바로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매장되었다.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문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현덕왕후로 추증되고 능호를 소릉이라 했다. 아들인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으로 능호를 바꾸었고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단종이 폐위된 후 현덕왕후 친정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이미 사망하였지만 서민으로 강등되면서 왕비의 신주도 종묘에서 철거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명횡사한 아들 단종의 죽음과 함께 현덕 왕비 혼을 편치 못하게 한 탓인지 세조의 꿈에 자주 나타나 무척 괴롭혔다고 한다. 특히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에도 세조의 꿈에 나타나 꾸짖으며 세조의 자식들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때문인지 세조는 그 날 밤 20세의 동궁을 잃었고 세조를 이어 즉위한 예종 또한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자식을 잃은 탓인지 세조는 죽은 현덕왕후를 용서치 않고 그녀의 능을 파헤치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능에 이르렀을 때 여인의 곡성이 땅 속에서 들려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조의 엄명으로 능은 결국 파헤쳐지고 관을 들어내려 했지만 관이 꼼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는 수 없이 도끼로 관을 쪼개려 했으나 관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모두들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이에 세조는 직접 나서서 관을 불살라 버리라고 했으나 갑자기 내린 소나기 때문에 세조는 결국 포기하고 관을 물 속에 던져버렸다. 관은 물 속을 떠다니다 어느 날 양화나무에 닿았다.
이 날 새벽 관을 발견한 마을 농부가 현덕왕후의 관인지도 모른 채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주었다. 그날 밤 농부의 꿈에 왕비가 나타나 자신이 관의 주인임을 알리고 고마움을 표하며 앞날을 알려줘 농부는 점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정에서 현덕왕후의 능을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다가 1513년 종묘에 벼락 친 것이 계기가 되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상소로 현덕왕후의 관을 찾아 능을 복구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농부는 자신에게 해가 돌아올 것을 우려하여 왕비의 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날 현덕왕후가 농부의 꿈에 나타나 부탁하여 그가 직접 관아에 신고함으로써, 문종의 옆인 현재의 동구릉으로 이장되었다. 그런데 처음 현덕왕후의 묘가 옮겨질 당시 문종 왕릉과 왕비의능 사이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나무들이 저절로 말라버려 능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홍살문부터 정자각, 비각 등 부속 시설은 하나만 만들고 정자각 뒤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따로 조성했으므로 동원이강 형식이라 부른다. 현릉의 참도는 굴절되어 궁(弓)자 형태다. 정자각 뒤의 참도는 왕후의 능침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을 지나 참도와 배위가 있는데 현릉은 홍살문 앞에 있다. 이런 형식은 조선시대의 왕릉으로 유일하다.
정자각 뒤로 나란히 두 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 위에 왕과 왕비가 각각 단릉(單陵)처럼 모셔져 있다. 능의 석물은 『국조오례의』의 표본인 구(舊) 영릉 제도를 따랐으므로 병풍석의 방울,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석상을 받치는 고석(鼓石)도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특히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인석은 머리 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주먹만한 눈과 코로 조각되어 있으며 문인석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왕비의 난간석은 중종 때의 양식을 따랐으며 혼유석은 특이하게도 반상 형태다.
많은 왕릉이 그렇지만 현릉의 석물들도 많이 퇴화되었는데 석물의 재료가 단단한 화강암이기 때문이다. 화강암은 강도가 7로 매우 단단하기는 하지만 장석, 운모, 석영으로 되어 있어 풍우에 퇴화되기 쉬운 재료다. 빗물과 장석이 결합하면 소위 녹아버리는 것으로 왕릉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묘소에 사용한 석물이 몇 백 년도 되지 않아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퇴화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화강암은 기본적으로 외장재가 아니라 내장재로 사용한다.
참고적으로 서양의 수많은 건물들이 수천 년이 넘었음에도 원형이 보존된 것이 많은 것은 균질한 재질의 석회암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화강암과는 달리 외장재로 사용해도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현릉의 능표(비석)는 영조 때 조선시대 전체 능역을 정비하면서 능역을 찾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세운 것이다. 문종 이전 왕들의 능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문종 때부터는 신도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왕의 치적은 『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하지 않은 것이다. 참고적으로 왕릉마다 비각이 있는데 비각은 숙종 때부터 세운 것이다. 비석은 각 왕릉의 문패라 볼 수 있으므로 노천에 설치했는데 능표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 훼손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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