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가례>
왕실의 혼례인 가례(嘉禮)는 의식 절차와 진행을 의궤(儀軌)로 기록하였는데,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가례 의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는 20여 건이 된다. 왕의 혼례식을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가례는 좁게는 관례나 혼례를 의미하는데 왕가에서는 왕의 등극이나 왕세자, 세손 등의 책봉 의식 또는 대비나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 등도 모두 가례라 한다. 관례는 성인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개 일반인은 20세에 올리지만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며 혼례를 치르기 전에 행하는 의식으로 변했다.
조선시대에 왕가의 혼례는 근본적으로 유교식이다. 유교의 혼례는 육례(六禮)라 하는데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뢰연(同牢宴)의 순서로 진행된다. 육례 절차를 따르는 국가 최고의 경사인 가례 의식 때에는 궐내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예복을 입고 축하한다. 참석자는 문무백관과 왕실의 친척인 종친, 궁궐 내 내명부 비빈들, 궐 밖에서 축하하러 입궁한 친척 및 문무백관의 부인 외명부, 행사를 진행하고 돕는 대표적 인물인 사자(使者)와 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이다.
납채는 왕비로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교서와 기러기를 왕비의 사가(私家) 및 별궁으로 전달하는 청혼 의식으로 오늘날의 약혼식에 해당한다. 이때 왕은 면복(冕服), 종친 및 문무백관, 사자 중 품계가 4품 이상이면 조복, 5품 이하이면 흑단령을 입는다. 납징은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징표를 보내는 의식으로 왕비의 사가에 폐물을 보내는 절차를 말한다. 이때 폐물은 함에 넣어 보내지는데 이 때문에 흔히 ‘함을 보낸다’라고 한다. 왕은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하며 그 밖의 참석자는 납채 때와 같은 차림을 한다. 함 속에 혼인을 승낙해달라는 편지를 함께 넣는데 후보자 측은 이를 받아 답장을 써주도록 되어 있다.
고기는 가례일로 선택된 길일을 알리는 의식이며 납징 때와 같은 옷차림을 한다. 책비는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이며 왕은 원유관·강사포를 입고 왕비는 적의(翟衣)를 입는다. 친영은 왕이 별궁으로 가서 친히 왕비를 맞아 궁궐로 돌아오는 의식으로 왕은 면복, 왕비는 적의를 입는다.
친영은 가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절차로 이때의 행렬이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로 그려져 『가례도감의궤』로 보관되어 있다. 왕과 왕비가 직접 만나는 의식이다. 이때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데 친영을 흔히 ‘장가 간다’라 표현한다. 하지만 왕이 직접 데려오지 않고 대신 사자를 보내 왕비를 맞아온다.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가 서로 절한 뒤 술잔을 나누는 동뢰연 의식이 있다. 이 의식이 부부의 연을 맺는 실질상의 혼례식으로 각종 기물이 배치된 가운데 주인공이 자리한다. 이때 주인공인 왕과 왕비는 각각 최고의 예복인 면복과 적의를 입고 의식을 행한다. 의식이 끝난 후에는 궁궐 내의 일상복인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왕세자의 가례도 동일하게 진행되며 왕세자와 세자빈도 면복과 적의를 입는다. 다만 각각 왕세자용, 세자빈용으로 신분에 맞추어 구별하여 입는다.
<칠궁>
영조는 조선 왕조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길어 정순왕후와 66세 때 혼례식을 올렸지만 그에게는 어머니가 무수리라는 약점이 있었다.
영조의 생모는 숙빈 최씨다. 최씨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로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침방 나인의 경우 궁녀 직책 중에서 두번째로 높은 서열이라 아들인 영조가 신분 컴플렉스에 시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의견도 있어 침방나인의 시중을 들었던 각심이 출신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여하튼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평생을 시달렸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인현왕후 폐출시 같이 출궁 후 서인들에 의해 무수리로 재입궁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최씨가 7살에 입궁했다는 숙빈 최씨 신도비 기록 자체가 영조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이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하튼 최씨는 숙종 19년(1693)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으며 9월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다. 바로 영조다. 숙종 21년(1695)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숙종에게 희빈 장씨 즉 장희빈의 저주굿을 발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하루 전에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국법을 바꾸기도 했다.
숙종이 이와 같이 국법을 내린 것은 희빈 장씨와 같은 사례를 방지하고자 했다는 숙종의 의지로 알려지지만 서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숙빈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장희빈이 죽으면 영빈과 숙빈이 다음 중전 후보였는데 영빈은 명문가 소생이었으나 자녀가 없었고, 숙빈의 경우 출신이 미흡하여 결격사유가 되었지만 아들인 연잉군을 낳았다는 잇점이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 사사후 곧바로 처녀간택으로 새로운 중전후보를 찾았고 숙빈 최씨는 이현궁으로 출궁했다. 이현궁 출궁 후에 숙종은 숙빈과 단 한 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특히 역대 왕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 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고 말은 했지만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명당으로 묘자리를 정해서 올린 사관을 귀양까지 보낼 정도로 감정이 안 좋았다고 실록에 적혀있을 정도다.
그러나 왕이 된 영조는 숙종과는 달리 숙빈 최씨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대체로 영조는 어머니의 출생과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숙빈을 왕후로 추존하려는 시도는 노론계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고 포기하였다. 숙빈은 역대 후궁과는 달리 많은 존호가 붙여져 있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숙빈 최씨는 숙종 44년(1718) 3월, 창의동 사가에서 49세로 사망하였고 양주의 고령동 옹장리 서쪽 언덕에 예장(禮葬)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이 왕으로 등극하자 영조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년(1744)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고 바로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에서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되었으며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영조는 살아생전 '사친은 항상 소심(小心)하고 신중하였다.'음을 자주 회고했다고 알려진다.
그녀의 신위는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 사적 제149호)에 있다. 칠궁은 최씨처럼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다. 즉 왕을 낳고도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일곱 여인의 사당이다.
칠궁은 현대사의 매우 중요한 사건을 목격한 곳이기도 하다. 칠궁 자체가 청와대 옆에 있는데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경호상의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2001년 비로소 문이 열렸다.
칠궁이 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것은 조선 후기 정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원이 인위적 상징성, 중국 정원이 위엄과 자연의 재현을 특징으로 하는데 반해 한국의 정원은 자연과 합일하는 소박함 그 자체다. 역대 왕들이 갈증을 해소했다는 냉천(冷泉) 등이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칠궁은 임금의 생모를 모신 7개 사당과 재실․문 등 11개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영조를 낳은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이며 이때가 1725년이었다. 이어 영조의 장남으로 일찍 죽어 후에 왕으로 추존된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를 연호궁(延祐宮), 선조의 후궁이자 원종을 생산한 인빈 김씨(仁嬪金氏)를 저경궁(儲慶宮),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을 생산한 희빈 장씨((禧嬪張氏 장희빈)를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를 선희궁(宣禧宮),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綏嬪朴氏)를 경호궁, 마지막으로 영친왕을 생산한 순헌귀비엄씨(純獻貴妃嚴氏)를 덕안궁(德安宮)에 모셨다.
원래 숙빈 최씨의 육상궁만 있었는데 1882년 화재로 소실되자 당시 왕이었던 고종이 다른 사친묘와 합사, 복원하면서 지금의 칠궁이 됐다. 융희 2년(1908) 예절이 번거로우면 본뜻을 잃는다는 황제의 조칙(詔勅)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궁들을 합설(合設)한 것이다.
조선왕조 궁녀의 법적 신분은 종9품 내인에서부터 정5품 상궁을 최고로 하는 여관직이다. 영조 때 최소한 600여 명, 고종 순종 때도 덕수궁 창덕궁에 200여 명이 있을 정도로 인원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최고위 상궁이 몇 명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최고의 순간은 승은(承恩)이다. 왕과 하룻밤을 보내는 승은을 입으면 자녀를 낳아 후궁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특별상궁’이라는 지위로 뛰어올랐다.
왕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면 숙원(종4품) 소원(정4품) 숙용(종3품) 소용(정3품) 숙의(종2품) 소의(정2품) 귀인(종1품)이 될 수 있었고 낳은 아들이 세자나 왕이 되면 비록 비(妃)는 아니더라도 내명부의 정1품인 빈(嬪)이 될 수 있었다. 뒤에라도 아들이 왕으로 추존되면 생모도 빈의 칭호를 받았다.
이곳에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된 적도 있었으나 얼마 후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하여 다시 정1품 빈으로 내려갔다. 다른 빈들과는 달리 대빈이라 칭하는 이유는 왕비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빈궁만이 원형 기둥으로 된 것도 왕비자리에 있었던 것을 상징한다.
매년 10월 넷째주 월요일에 연 1회 제향을 봉향하고 있다. 칠궁제는 신을 모시기 위해 모든 제관이 두 번 절하는 신관례를 시작으로 전폐례(奠幣禮), 초헌레(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등의 제향 순서에 따라 진행되며, 축문과 폐(幣)를 태우는 망료례(望燎禮)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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