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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13) : 제1구역 동구릉(10)

Que sais 2021. 6. 28. 10:13

https://youtu.be/Rz_yeBhRF2c

 휘릉 :

휘릉은 제16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16241688) 능이다. 장렬왕후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셋째 딸로 인조의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 16(1638) 15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벌어진 당쟁사의 중심에 위치한 사람이 바로 장열왕후.

이는 어린 나이에 인조와 결혼하였는데 1649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고 1659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증손자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14년을 더 살아 숙종 14(1688)에 사망했는데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이 시기의 붕당정치장렬왕후의 복상문제를 놓고 예송논쟁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59효종이 사망하였을 때와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가 사망하였을 때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복상(服喪)이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여기에는 당대의 양대 권력 축인 남인과 서인 간의 세력 싸움이 기본으로 작용한다. 양쪽의 대표적인 인물은 허목(許穆, 15951682)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허목 1657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으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그림과 글씨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의 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과 예송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효종의 스승송시열 1650년 효종이 왕이 되자 곧바로 이조판서가 되어 당대의 두 사람 모두 한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다.

예송논쟁이 벌어진 것은 효종이 사망하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장렬왕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이다. 당시 집권파인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장렬왕후는 그에 걸맞게 기년(朞年, 1)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남인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특별한 존재이므로 맏아들에 대한 예법을 적용하여 장렬왕후가 3년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인들은 ()의 보편적 적용에 국왕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인 반면에 남인들은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입장인 셈이었다. 가통으로 보면 1년 상복, 왕통으로 보면 3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 까닭에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예송논쟁의 배경으로는 율곡 학파인 서인퇴계 학파인 남인간의 이념 논쟁에다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자격 문제에 대한 시비가 깔려 있었다. 어쨌든 송시열의 주장대로 조대비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그의 복상문제가 재연되었다. 이 당시에도 조대비가 살아있었는데 서인들은 대공(大功, 9개월)에 따라 9개월복으로 결정했다. 이에 남인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현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의 주장대로 기년복으로 결정했다. 결과를 보면 1659년에는 서인들의 주장이 채택되어 장렬왕후는 기년복을 입었고, 1674년에는 남인들의 주장이 채택되어 역시 기년복을 입었다.

한마디로 현종은 한 번은 서인, 다른 한 번은 남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장렬왕후가 두 번 모두 기년복을 입었으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복상문제를 갖고 이와 같이 첨예한 설전이 벌어져 를 둘러싼 논쟁이 학문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정치쟁점화 되었고 급기야는 충역(忠逆)의 논쟁으로까지 비화됨으로써 조선 왕조를 한바탕 회오리 속으로 몰아가는데 이는 이 시기 정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휘릉병풍석이 없고 12지신상을 새겨 방위를 표시한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봉분 뒤로 3면의 곡장이 있다. 현종명성왕후의 숭릉으로부터 5년 뒤에 조영한 능이므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거의 비슷하다. 석양과 석호는 각각 2쌍으로 다리가 짧은데 특히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다. 봉분 아랫단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높이 2.4m에 이르는데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크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많이 마멸되어 있고 무인석은 목이 없이 얼굴이 가슴에 붙어 있으며 눈과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괴이한 용모로 만들어져 있어 답답하게 보이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귀면이 새겨져 있는 고석은 5. 조선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이후 왕릉부터 4로 줄었는데 휘릉 때부터 다시 건원릉의 형식을 따라 5가 되었다. 귀면의 기원동이(東夷)이 건설했다고 알려지는 중국의 은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국에서는 고구려 기와에 흔적이 발견되고 고려, 조선 시대에도 주술적인 제기(祭器) 장식이나 건축, 고분 등의 상징적인 그림으로 많이 사용했다.

정자각에 있는 잡상(雜像) 추녀나 용마루 또는 박공머리 위의 수키와 위에 덧얹는 여러 가지 짐승 모양도 흥밋거리다. 잡상 등은 아무 건물에나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품격이 높은 건물에만 설치하며 숫자는 그 건물의 위상과 직결된다. 이들은 장식 효과와 함께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는 것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섯 개인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는 일곱 개, 경회루의 잡상은 열한 개나 된다. 우리나라 건물들 가운데 경회루가 가장 많은 잡상을 갖고 있다. 왕릉의 정자각에 잡상이 올려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왕릉의 위상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잡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궁궐 건축물의 지붕 기와 제작을 담당하는 와서를 두어 잡상을 제작하는 잡상장을 두었다. 그런데 잡상을 만들 때 제대로 제작하지 않으면 중죄인으로 처벌할 만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우리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말은 잡상에서 유래한다. 신성한 곳에 잡상이 없어 사악한 놈을 막지 못하면 어처구니 없는 꼴을 당하거나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되기 때문이다.

 

 혜릉

혜릉은 제20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16861718)의 능이다. 청은부원군 심호(沈浩)의 딸로 1696 11 9살이었던 세자(경종)와 가례를 올린다. 경종은 사극에서 많이 나와 잘 알려진 장희빈의 아들이다. 단의왕후숙종과 장희빈의 며느리인 셈이다. 단의왕후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세자빈 심씨의 왕실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시어머니 희빈 장씨갑술환국으로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1694) 직후였고, ‘무고의 옥’(1701)으로 시어머니가 사약을 받았는데 이때 세자빈 나이 16세였다. 이러한 풍파 속에서 심씨는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숙종 44(1718) 갑자기 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때 조선에는 여역(염병, 장티푸스)이 창궐했고 숙종과 세자경덕궁(경희궁)으로 급히 옮긴 기록으로 보아 세자빈의 병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에 추봉되었다.

 

혜릉의 능원은 동구릉 내 17명의 유택 중 유일한 ()의 형식으로 가장 작은 규모를 갖고 있다. 능이라면 당연히 세워졌어야 할 입구의 홍살문도 없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석물도 사람의 키 정도로 별로 크지 않다. 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려져 있고 난간석에 새겨진 12가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있다. 봉분 주위에 네 마리의 석호와 네 마리의 석양이 교대로 배치되어 능을 보호하고 있다. 망주석은 다른 왕릉보다 작게 만들어졌으며 좌우 세호의 방향이 다르게 조각되어 있다. 한편 장명등은 현재 터만 남아있고 사라진 상태로 조선의 왕릉 1,600여개의 석물 중 유일하게 혜릉의 장명등멸실된 상태다. 무인석은 이목구비가 상당히 이국적으로 상당부분을 코가 차지하는데 특히 치아를 7개나 잔뜩 드러내 놓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인석보다 약 10센티미터 작고 한 단 위에 서 있는 문인석은 무인석과 영 다르다. 입을 꼭 다물었는데 주책없게 웃고 있는 무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표정이라는 설명도 있다.

현재 보이는 정자각 1995년 재건된 것이다. 또한 혜릉이 다소 특이한 것은 조선 왕릉은 대부분 북침(北枕)을 하고 있는데 혜릉서쪽에 머리를 두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했다는 점이다. 혜릉의 좌향은 유좌묘향(酉坐卯向), 즉 서측에서 동측을 바라보고 있는 지세다. 시신의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두느냐는 민족, 지방, 종교 등에 따라 다른데 한국에서는 동쪽이나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예가 많았다. 이후 삼국시대에 중국의 영향으로 북침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혜릉이 특이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금천교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