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29) : 제2구역 서오릉(8)

Que sais 2021. 6. 28. 10:29

https://youtu.be/XcvucqDcRC0

윤씨가 폐비되자 그야말로 진행된 내용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당시 둘째 대군을 낳은 지 100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지만 손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결국 5일 뒤 사망한다. 그런데도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이후 윤씨가 사사되는데 대부분의 사극 등을 보면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대의 정황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학자들은 성종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한다.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는데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윤비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가족없이 경제활동조차 할 수 없는 폐비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이것도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는 것을 볼 때 성종과 폐비는 그야말로 원수지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당대의 정치 역학을 떠나서 두 사람 사이에 남들이 알 수 없는 감정의 골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폐비 조처를 한 후에도 성종이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1489) 5월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 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그러나 이런 대작전 즉 세자의 어머니를 사사시키려는 데는 그의 이야기를 적극 지지하는 행동 즉 기름을 뿌리는 사람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학자들은 바로 이 역할을 인수대비가 솔선수범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 대해 워낙 많은 야사가 나돌고 있으므로 상당히 포장되고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구중궁궐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완벽하게 이를 복원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카더라가 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것도 진상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윤씨의 사사인수대비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윤비세자를 낳았음에도 사가로 쫓겨 갔는데 놀랍게도 1년 후 사가에 도둑이 들어 물건들을 훔쳐 갖고 갔다. 그러자 한성부 판윤 정문형이 윤비의 집 둘레 전체를 높게 싸고 주변을 조사하여 범인을 찾자고 했다. 놀라운 것은 성종이 자신이 방비를 잘못하여 도둑맞았으므로 이웃사람을 조사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반대했다.

그런데도 내심 윤씨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여 내시를 보내 윤씨의 처소살펴보라고 했다. 내시가 윤씨의 집에 가니 잡초가 무성했고 윤씨는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내시에게 인수대비가 직접 명을 내려 윤씨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호화롭게 살면서 성종을 원망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인수대비의 명령대로 내시가 성종에게 거짓 보고하자 성종이 노발대발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사사를 명했다.

 

죄인이 조금도 반성하지 않으니 장차 화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훗날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윤씨가 독기를 부릴 것이니 사사하라.’

 

인수대비의 거짓 보고에 성종은 곧바로 사약을 명한다. 한마디로 성종이 바라던 빌미를 바로 인수대비가 적절하게 제공한 것으로 윤비인수대비의 거짓말 보고 즉 모함으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다. 큰 틀에서 성종, 인수대비가 큰 틀을 짰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사건이 성종때는 그런대로 더 이상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사실 인수대비가 윤씨를 제거하려 한 것은 간단하다.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의 불씨가 될 수 있으므로 윤씨를 제거해야 조정 즉 조선이 안정된다는 것이다.

결과론으로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를 제거하면 왕실 내에서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오판이었다. 윤씨가 사사되자마자 정희왕후가 사망했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연산군을 낳은 윤씨의 사사 사건이 그의 사후에 커다란 불씨가 될 것으로 생각한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건을 공론화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성종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의 유언이 지켜지지 않은 이유도 간단하다. 조정에는 인수대비지지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피바람 갑자사화>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하면 윤씨인수대비에 의해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죽을 때는 연산군이 어린 시절이라 이 내용을 몰랐다. 더구나 집권 초기에 한명희, 정창손원로 대신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업무 장악이 중요했다. 그런데 이들이 사망하자 조정에는 훈구 대신들만 남아있었는데 드디어 윤비 사사의 진상연산군에게 알려진 것이다.

 

야사에는 폐비 윤씨가 죽을 때 피를 토했고 자신의 피 묻은 적삼  금삼의 피가 묻은 옷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주며 후에 이것을 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 했다고 알려진다. 친정어머니 신씨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적삼을 꽁꽁 숨겨두고 있었는데 이를 연산군에게 보여주면서 당대의 정황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숙의와 엄숙의모함하여 윤비가 폐비가 되어 사가에서 쫓겨났는데 여기에 인수대비의 명을 받은 내시거짓보고하여 사약을 받았다고 했다. 이후 전개되는 것은 그야말로 잘 알려진 내용이다.

연산군윤씨 사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일거에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계엄을 선포하고 도성 출입용 문을 막았다. 곧이어 대궐에 국청을 설치하여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시킨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다.

폐비 윤씨 사건에 찬성했거나 방관한 대신 모두 국문을 당하고 처형되었다.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도 처형되었다. 한명희와 정찬송 등은 이미 사망했지만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다. 야사에는 이때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았다고 알려지는데 여하튼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504 4,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수대비의 사망상당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인수대비가 사망하기 몇 달 전부터 노환으로 건강상태가 매우 나빴는데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이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치는 등 항의하여 인수대비의 사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갑자사화 자체가 비의 사사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그 중 왕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인데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동은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물론 이런 내용은 연산군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학자들은 폐비 윤씨에 관한 이야기에 관해 많은 야사가 있지만 깐깐하기 그지 없는 성종실록에 적힌 내용을 무조건 부정할 사항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폐비 윤씨를 비난하기 위해 과장했다는 설명도 있으나 성종실록연산군 재위 중에 작성된 것으로 실록을 작성한 사서들이 연산군에 반하는 윤씨에 대한 고발을 삽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실록에는 윤씨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가 많다독살을 하기 위해 독이 든 곶감을 은닉했으며 야사에도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 용안(龍顔)에 상처를 내었다거나,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국그릇을 엎어 왕의 옷을 더럽히는 등, 기록만 놓고 본다면 분노조절장애 증세가 의심될 정도다. 더욱이 성종이 윤씨를 내치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당한 이야기를 거론했다.

그런데 정사에는 폐비 윤씨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는 언문 투서를 만들었다가 조사 결과 자작극으로 밝혀진 내용이 나온다. 당대의 상황이 워낙 궁중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헷갈리지 않을 수 없지만 당대에 가짜 정보, 가짜 문서 조작이 그다지 생소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윤비악평과는 다르게, 연산군을 낳기 전까지 선량하고 예의 바르며 검소한 성품이었다는데는 동의한다. 웃어른들을 매우 공경하고 깍듯히 대해 대비와 왕대비의 총애를 받았고, 후궁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윤씨는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매사에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는데 자신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본디 덕이 없고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성종이 더욱 더 그녀를 현숙하게 여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