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경릉
경릉은 추존왕 덕종(1438〜1457) 및 소혜왕후 한씨 즉 성종의 모친(1437〜1504)의 묘이다. 덕종은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의경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사망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지만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정난공신1등에 오른 한확의 딸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 즉 인수대비가 되었다. 각종 드라마에서 단골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수대비가 바로 소혜왕후다.
세조3년(1457) 본래 병약했던 남편이 사망하고, 세조의 법통은 시동생인 예종이 물려받는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자신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였다. 명실상부한 실권을 장악하며 조선왕조 전 기간을 통해 여인천하의 주역이라고 할 정도로 살아있을 동안 다 방면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 여성이면서 한편으로는 여성 지식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왕실의 간판 인수대비>
인수대비는 조선왕조의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더욱 유명하다. 그녀는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다.
인수대비가 왕실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당대의 정치역학 때문으로 인식한다.
한씨의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면서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작위를 하사받은 조선 최고의 세도가였다. 또한 한씨의 큰 고모는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 성조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였으며, 작은 고모 역시 명나라 제5대 황제 선덕제 선종의 후궁인 공신태비(恭愼太妃)였다.
큰고모가 영락제 사후 순사 즉 순장되었는데,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명나라 선덕제는 그의 둘째 고모를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한편 한씨의 둘째언니는 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의 부인으로 한씨의 가문은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의 외교관으로서 명나라의 총애를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한확은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 전해지지만 집안이 좋았음에도 명나라에 2명의 누이를 궁녀로 보낸 것은 남다른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평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확의 속마음은 어떻든 젊은 시절 누이의 후광을 업고,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명 황실과 인척이므로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은 도맡아 처리했고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 즉 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했다.
한확의 위상을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 왕과 버금가므로 겨우 고려에서 조선으로 개창한 신생국가의 왕으로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여섯째 딸인 인수대비는 수양대군의 아들인 도원군(桃源君) 즉 덕종과 혼인했다. 당대의 야망가인 수양대군이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나라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은 그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하튼 한확 딸인 한씨는 나이 14살에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하여 도원군부인(桃源君夫人)이 되었고 첫 번째 자녀인 월산군을 낳았다. 그런데 그녀의 행보는 정말 순조롭다.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고 아들인 도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자신도 왕세자빈이 되었고 태안군주, 훗날 성종이 되는 자산군을 낳았다.
왕세자빈 한씨는 젊어서부터 빈틈이 없고,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를 잘 섬겨 세조로부터 효부라는 칭찬을 늘 들었지만 두 아들 월산군과 자산군에겐 매우 엄한 어머니로 알려진다. 사소한 과실만 있어도 추호도 감싸는 법 없이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와 정희왕후가 농담삼아 별명으로 폭빈(暴嬪)이라고 말했다한다.
그런데 1457년, 친정아버지 한확과 남편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야말로 큰 후광 즉 빽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데 당대의 관례로는 그녀가 궁에서 살 수 없었다. 이를 잘 아는 세조가 그녀를 특별히 총애하여 궁궐에서 살도록 허용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사양하고 궁을 나섰다.
이후 그녀의 생은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변한다.
우선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 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세조는 한씨의 작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세조가 맏며느리 한씨에게 특별히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두 아들과 궁궐을 떠나려하자 세조는 이에 큰 선물을 준다. 세조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그녀는 덕수궁에서 계속 아들과 거처했는데 후에 한씨의 작은 아들 자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모후로 다시 궁궐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덕수궁은 그녀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중전의 꿈을 접어야만 했지만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당대의 권신 한명회 넷째 딸 한씨 즉 훗날 공혜왕후와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이 단 14개월 후 사망하자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그녀의 아들인 자산군이 성종으로 옹립했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법도는 예상외다.
그녀의 아들 자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녀는 아들의 인사를 받을 수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종의 어머니이므로 마땅히 인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성종은 생부인 의경세자가 아닌 작은아버지가 되는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으므로 법적으로는 성종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성종의 법적 어머니이므로 수빈 한씨는 국왕의 모후로 당연직 왕대비의 자격이 아니라 그저 왕세자의 부인으로서 지위가 세자빈에 불과했다. 당대의 군신관계(君臣關係)상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한 것이다.
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임에도 인사를 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자 조정에서 그녀를 왕비로 추숭하느냐, 왕대비로 추숭하느냐로 논란이 일었다. 이 문제는 그녀의 남편인 의경세자를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의경세자를 단순히 왕(王)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비가 되며 의경세자를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대비가 된다. 그런데 껄끄러운 조선은 토론에 토론을 거쳐 의경세자를 추숭하여 의경왕(懿敬王)으로 삼지만 종(宗)이라 추숭하지 않기로 했다. 한마디로 수빈을 인수왕비(仁粹王妃)로 부른다는 뜻이다.
나름대로 이런 결정은 인수대비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녀가 인수왕비로 아들 성종의 인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그녀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왕비라 함은 왕(王)의 부인을 일컫는 것인데, 한씨는 왕(王)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대비가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논란을 거쳐 왕실 서열 1위는 할머니가 되는 자성대왕대비 윤씨(慈聖大王大妃 尹氏)로 인정하고 그녀를 왕실 서열 2위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녀의 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474년, 마침내 성종이 아버지를 의경왕(懿敬王)으로 추봉(追封)하고, 덕종(德宗)의 묘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녀는 왕의 생모가 되는 인수왕비 또한 왕대비로 진봉되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되었다. 이때 왕실에 있는 세 윗 전 즉 자성대왕대비, 인수왕대비, 인혜왕대비를 모시기 위해 건축한 것이 창경궁이다. 인수왕대비는 경춘전(景春殿)에서 거처하였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인수대비는 아들 성종을 둘러싼 큰 분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여성지식인으로도 한 몫을 한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불교 옹호론자로 사림의 미신타파 주장과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또한 세종과 세조가 불당에 출입한 고사를 들어 궐내 법당을 철폐하려는 사림의 주장에 맞서곤 했다. 궁궐에 설치한 불당은 선조대에 가서야 철폐되었다.
그녀는 불교에 조예가 많아 범자(梵字)와 한자, 한글 등 3자체(三字體)로 손수 쓴 불경도 전해질 정도로 보물 제1108호인 『불정심다라니경언해(佛頂心陀羅尼經諺解,』,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 『육조대사법보단경언해(六祖大師法寶壇經諺解)』는 그녀가 편찬을 주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남다른 대우를 받는 것은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내훈(內訓)』을 39세에 썼다는 점이다. 『내훈』은 비빈(妃嬪)들의 수신서로 소학, 열녀전, 명심보감 등에서 훈계가 될 만한 것을 모아 한글로 풀어쓴 책이다. 즉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수대비는 나라나 집안의 치란과 흥망은 일차적으로 남자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그 부인의 덕성 또한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에 여자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며 『내훈』의 서문에서 밝혔다. 그녀는 천하의 큰 성인 요순(堯舜)도 그 자식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단주(丹朱)와 상균(商均)과 같은 불초한 아들을 두었음을 상기시키며, 한낱 과모(寡母)인 자신의 자식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발로가 바로 『내훈』이라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아내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공경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본이다.
이 책은 이후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녀의 지론은 간단하다.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강인한 생각은 그녀의 경력이 특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수대비의 집안은 조선왕실 즉 이씨 왕가에서 의지할 정도로 위상이 있는 가문인데 막상 그녀는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올랐다. 아쉬움은 있지만 그녀를 넘어서는 여성 즉 한마디로 자신의 며느리이자 왕비라면 완벽한 여성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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