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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28) : 제2구역 서오릉(7)

Que sais 2021. 6. 28. 10:28

https://youtu.be/TzpMrdIaqyY

<연산군 어머니 윤비의 퇴출>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인수대비의 며느리인 윤비(尹妃)의 초창기는 매우 좋았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 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중전이 된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연산군이다. 성종 적장자 연산군원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인수대비와 윤비물과 기름사이가 않을 수 없었다.

인수대비는 남다른 지식인이지만 윤비(尹妃) 내훈의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먼 여인이라는 점이다. 사실 시어머니가 남다르게 인텔리라는 것은 며느리로서는 매우 불편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수대비가 주장하는 여성의 교양은 남성을 우위에 둔 여성의 부덕이었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은 비록 왕비라 해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결론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지만 인수대비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실천했다. 한마디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이 자신이 강조하는 내훈의 내용에 저촉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이들 내용이 조선 왕실사의 가장 화려한 소재를 제공하므로 인수대비는 사극이나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으로 자주 나온다. 그녀가 사극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는 정황은 그야말로 시시콜콜하게 잘 알려져있다.

인수대비는 친정집이 명나라라는 막강한 배경을 뒤에 업고 있었지만 윤비는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 친정의 지원이 없었다. 그런데 인수대비유교적인 부덕을 실천하는 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 윤비자유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했다.

조선사에 큰 영향을 미친 윤씨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신씨의 딸로 성종 계비이자, 10대 왕 연산군의 친어머니. 윤씨 고려시대 파평 윤관 장군의 후손으로 조선왕조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정희왕후정현왕후장경왕후문정왕후 등도 윤관의 후손이다. 그녀의 외가쪽으로 어머니의 사촌 오빠가 신숙주로 양반 명문 가문이다. 그녀가 입궁할 내명부 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파평윤씨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로 통상적인 간택후궁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실세 권련자인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조카뻘이다.

여하튼 당시 왕비인 공혜왕후가 사망하여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윤씨가 중전이 되는데 당시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한마디로 윤씨의 여건이 좋았다는 뜻이다.

중전이 되고 1년이 지나지 않은 1477, 성종이 후궁들을 총애했는데 엄귀인과 정소용특별히 우대했다. 소용 정씨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그런데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가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

여하튼 정력가인 성종이 두 명의 후궁에 보다 공을 들이자 윤비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저주행위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도는 어떠했든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었는데 정작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을 성종과 후궁을 죽이려 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로 윤비()으로 강등될 뻔한 수모를 겪었지만 그런대로 잘 무마되었다. 원자가 있는데 중전을 폐위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 다수 신하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양서와 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에게만 죄를 물어, 삼월은 교수형, 사비를 장형 100를 때린 후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처벌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1479년에 성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전 윤씨를 폐위하였다.

역시 이번에도 원자가 있는데 어떻게 어머니를 폐위하느냐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성종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런데 폐위사건의 빌미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성종이 후궁의 방에 있을 때 윤씨가 달려들어 항의하다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중요한 말이 조선왕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성종실록 성종 10(1479) 6월에 성종이 밝힌 폐위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지난 정유년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와 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혹 무자 즉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일이나, 혹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후 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

엄씨 집과 정씨 이 서로 통하여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투입시켰는데, 이는 대개 일이 발각되면 엄씨와 정씨에게 해가 미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항상 나를 볼 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다. 비록 초부의 아내라 하더라도 감히 그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비가 왕에게 있어서이겠는가?

가짜 문서를 만들어서 본가에 통하여 이르기를, ‘주상이 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을 편안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우연히 그 글을 읽고 일러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윤씨가 허물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나를 거제나 요동이나 강계에 처하게 하더라도 달게 받겠으며, 남방기에서 발원한 대로 사람의 허물을 무량수불 앞에서 팔을 불로 지지는 연비 행위하여 이를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내가 이를 믿었더니, 이제 도리어 이와 같으므로, 전일의 말은 거짓 속이는 말이었다.

상참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가 나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나니, 그것이 부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항상 궁중에 있을 때에 대신들의 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내가 어찌 믿고 듣겠는가? 내가 살아 있을 때에야 어찌 변을 만들겠는가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난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 등은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성종이 구구절절 윤비를 폐위해야한다고 적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인수대비가 밝힌 폐위 이유도 정확하게 적혀있다.

 

주상이 혹 때로 편치 않을 때가 있어도 마음에 개의치 않고 꽃 핀 뜰에서 놀고 새를 잡아 희롱하다가도, 만약 제 몸이 편치 않으면 갑자기 기도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 보여 주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평소의 말이 늘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

만약 주상이 편치않을 때를 만나면 을 왕에게 올리는 음식 즉 어선에 넣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비하면서 중궁이 지나가는 곳에는 어선을 두지 않도록 금하였다. 우리들이 비록 이름을 국모라고 하나 본래는 평인인 것이요, 한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분은 주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런데도 매양 경멸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고, 제 스스로 그전에 대죄가 있다고 여기는데도 오히려 요동시킬 수 없으니, 지금에 와서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비록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보전하고자 할 것인데, 하물며 원자가 있었음에랴그 악이 날로 커져서 꺼리는 바가 없었으나, 주상은 도량이 너그럽고 인자하므로 매양 비호하면서 허물을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비록 부덕하더라도 옛 현비의 일을 인용하여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였어도 일찍이 들으려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와 같이 결단한 것은 다시 허물을 고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시비에게 죄과가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지금은 비록 너에게 죄줄 수가 없더라도, 장차는 너를 족멸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써 원자를 가르친다고 하면 옳겠는가? (중략) 이제 원자에게는 가련한 일이나, 주상의 근심과 괴로움은 곧 제거될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놓여질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정희왕후가 말한 윤씨의 일화도 적혀있다.

 

비단 독약을 가지고 첩을 죽이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임금을 내세워 뜻을 이루어서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자 기하였으니,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일이 있다.’고 하고, 또한 스스로 상복을 입는다고도 하였으며,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라.’ 하고 주상에게 말하기를,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들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비상 가루를 옷 속에 차고 다니며, 주상께서 편치 못할 때에는 더욱 이를 기뻐하였고, 어선이 있는 곳을 아무 때나 출입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을 막고 막았는데, 주상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우리들은 주상이 계신 곳이 좁기 때문에 수강궁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우리들은, ‘우리들이 비록 있어도 어떻게 구하겠는가? 그런데도 그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매우 상심하며 눈물을 흘리고 떠났습니다. 종묘사직에 복이 있어서 주상이 그의 독해를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다행입니다.‘

 

성종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와 정희왕후까지 폐위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거셌는데 이는 윤비에 대한 동정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성종을 이어 윤씨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면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했다는 것이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