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의 물질>
노벨상 수상자로서 명암이 극단적으로 바뀐 사람은 1948년도 노벨 생리ㆍ의학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파울 헤르만 뮐러(Paul Hermann Müller, 1899〜1965)일 것이다. 그는 식량 문제에 악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병원균의 전염에도 관계있는 해충을 박멸하는 DDT를 발명하여 ‘인류의 천사’라는 말까지 들었다.
살충제의 유용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벌레를 없애기 위해 유황을 태워서 집과 창고를 소독하고 비소를 이용하여 쥐를 독살하며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방법이었다. 그러나 화학적 합성 살충제인 DDT가 개발되자 살충제의 효과는 상상을 초래할 수 없을 정도로 증진되었다.
‘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이라는 길고 복잡한 화학적 이름을 갖고 있는 DDT는 원래 1874년에 오트마 자이들러(Othmar Zeider, 1859〜1911)가 처음으로 합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염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했으므로 염료로 별다른 가치가 없다며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살충제 또는 기타 다른 용도로 실험해보지 않았으므로 DDT는 오랜 세월 잊혀진 채 실험실 선반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의 발명은 65년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졌는데 DDT가 살충제로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이들러가 사망한지 28년이 지나 뮐러가 1939년에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1936년 염료 제조회사인 스위스의 가이기사에 재직하던 화학자 뮐러는 단순히 옷을 갉아먹는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 살충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939년 독자적으로 DDT를 합성한 것이지만 원래 자이들러가 합성했다는 것을 추후에 발견했다. 그러므로 1948년도 뮐러가 노벨 생리ㆍ의학상을 수상했지만 그는 의학적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특이한 예의 수상자이다.
뮐러는 1899년 1월 라인 강변의 바젤 교외에 있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관 및 선술집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 고틀리프는 스위스연방철도회사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는 루터파 교회의 집사로 일했다.
그는 어린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않고 평범하게 보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과학 실험에 매료되었다. 그는 학교 실험실에서의 실험에는 성이 차지 않아 집 안 자투리 공간에 자신만의 실험실을 만들어 무언가를 만들어 시간을 보내기 일수였다. 그러나 뮐러는 학교 교육에 실증을 내고 자퇴한 후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바젤의 화학 회사에서 일하며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뮐러는 곧바로 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가 다음 해에 졸업했다.
당시 스위스는 효과적인 살충제 부족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국토는 대부분 산간 지대이고 경작 가능한 땅은 거의 목초지였다. 농작물은 겨우 50%정도 자급할 정도인데다 해충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마다하고 화학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에서 자신의 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2년 후 바젤대학교에 입학하여 화학, 물리학, 식물학을 공부했다.
1925년 박사학위를 받은 뮐러는 당시 세계적인 제약회사 노바티스(Novartis)의 전신인 치바가이기(CIBA-GEIGY AG)사에 취직해 본격적인 화학 약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처음 그가 2년간 다녔던 화학회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실험들을 마음껏 하며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살충제의 역사>
뮐러가 한창 연구에 매진하던 1920〜193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 효율적인 살충제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특히 뮐러의 고국인 스위스는 국토의 대부분이 험한 산약지대이므로 경작 가능한 토지가 적어 타 지역에 비해 더욱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농업기술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작물을 갉아먹는 해충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데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살충제의 역사는 사실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다. 곤충들이 수억 년 동안 자신들의 먹이인 식물과 함께 진화했는데 인간들이 농경생활로 들어가면서 작물들을 심자 곤충들에게 좋은 식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살충제를 만들어야 하는 근본요인이다.
수메르인들은 이미 4,500년 전에 황을 작물에 뿌렸다. 고대 로마에서는 역청이 널리 쓰였다. 그리스인들은 씨를 뿌리기 전에 오이 추출물에 담가두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1600년대에 유럽에서는 담배에서 추출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과거 어떤 것보다 효율적이었다. 1807년 아르메니아 데이지라는 식물로부터 제충국(除蟲菊)이 발명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쓰인다.
살충제의 효과도 있겠지만 여하튼 거대한 농장이 유럽과 식민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기자 곤충들에게는 커다란 잔치상이 차려진 셈으로 세계 각국에서 곤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농부들도 이에 대비하여 청산가리, 비소, 안티몬, 아연 등이 들어있는 더욱 강력한 살충제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파리 그린이라는 물질에 구리와 석회를 섞은 살충제도 개발되었다. 비행기와 스프레이 장치가 등장하여 대규모로 살충제를 살포할 수 있게 되자 1934년 미국에서 13,500톤의 황, 3,150톤의 비소계 살충제, 1,800톤의 파리그린을 뿌렸다.
1870년 경 과일을 먹는 ‘배깍지진디’라는 작은 벌레가 캘리포니아에 들어오더니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급속히 퍼지면서 과수원의 나무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황과 석회를 섞은 약을 뿌리면 배깍지잔디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 약을 뿌리고 나서 몇 주 지나면 배깍지진디는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농부들은 황과 석회를 섞은 약을 뿌려도 배깍지진디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농부들은 살충제 제조업자들이 제품의 질을 고의적으로 떨어뜨렸다고 주장했지만 배깍지진디는 계속 번창했다.
곤충학자인 맬린더(A. L. Melander)는 나무들을 조사한 결과 살충제가 두껍게 말라붙은 층 밑에서도 배깍지진디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제조업자들이 제품의 질을 떨어뜨렸기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맬린더는 배깍지진디가 돌연변이로 황과 석회의 혼합물로 만든 약에 내성을 갖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고 1914년에 자기의 생각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곤충이 내성을 갖게 된다는 엉뚱한 멜린더의 결론에 아무도 주의를 기울리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더욱 강력한 살충제 개발에 몰두했다.
<뮐러의 천재성>
뮐러가 <가이기>사에 입사하여 염료 부서에서 일했으나 증기에 천식이 생기자 연구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긴 뮐러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정력적인 그는 혼자서 화합물의 안정성과 생물학적 문제에 몰두하여 유독한 수은을 포함하지 않은 종자 소독약도 개발했다.
당시 <가이기> 사는 옷좀나방 살충제를 개발했는데 그것은 나방과 케라틴을 먹는 다른 곤충들의 뱃속에서 독성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직물에 강한 친화력을 지녔고 온혈동물과 사람에게 무해했으며 역겨운 냄새도 전혀 없었다. 염화탄화수소 화합물인 그 약품은 빛이나 습기에 노출되어도 잘 견뎠다.
당시 살충제로 가장 저렴하고 효과적인 살충제는 비소화합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비산납이 절대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의학자들은 비산납을 소량만 섭취해도 만성적으로 앓거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곤충학자들이다. 그들은 비산납을 소량 흡수해도 큰 해가 없다고 생각했다.
뮐러의 연구는 남과 달랐다. 그는 살충제를 연구하려 할 때 이미 전세계에서 특허가 쏟아져나왔으므로 아주 값싸거나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살충제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허 자료에 따라 물질을 실험해 본 결과 새로운 화합물 중 실제로 팔리고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존의 비산염과 제충국 등이 훨씬 효과가 있었다.
그의 상사인 레우거 박사는 해충이나 그 유충이 먹이를 삼킬 때 함께 들어가 위에서 작용하는 독성 물질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곤충이 똑같은 방식으로 먹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전염병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에 의해 전염된다. 그러므로 그는 접촉성 살충제만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효과적인 살충제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우선 곤충에게는 독이 되지만 사람이나 포유류, 어류, 식물에게는 무해해야하고 빨리 작용하며 자극적인 냄새가 나서는 안 되며 특히 가격이 싸야했다. 여기에 뮐러는 두 가지를 추가했다. 이상적인 살충제란 되도록 많은 곤충에 효과가 있어야하며 오랫동안 작용할 수 있도록 화학적으로 안정적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추후 뮐러의 DDT가 재앙이 된 이유다. 즉 그가 개발한 살충제는 해충뿐만 아니라 이로운 곤충도 죽이고 환경 속에 상당 기간 머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뮐러는 모직물에 매우 안정한 염소탄화수소 화합물인 가이기 사의 나방 살충제에 주목했다. 그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염소탄화수소 화합물이 나방의 체내에서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CH2Cl2를 포함한 화합물이 약간의 살충효과를 지닌다는 것도 파악했다. 특히 그는 당시 발표된 논문에서 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를 실험실에서 시험한 결과 독성을 약간 지닌 것을 발견했다. 이를 종합하면 염소 화합물이 훌륭한 살충제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1939년까지 뮐러는 모두 349가지의 화합물을 시험했다고 한다. 350번째 화합물은 황산을 촉매로하여 최면제의 주성분 클로랄을 클로로벤젠과 결합시켰다. 이것이 훗날 DDT로 알려진 디클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이다.
유리 상자 속의 파리들에게 DDT를 뿌리자 파리들은 10분도 안 돼 모두 죽었다. 그러나 실험에 따라 몇 시간 또는 몇 일이 걸리기도 했다. 처음에 연구원들은 DDT를 살포했음에도 곤충들이 금방 죽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당시 독성이 있는 다른 살충제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내므로 뮐러의 DDT를 대수롭지 않게 평가했다. 그들은 장기간에 걸친 DDT의 효능이 당장의 효과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즉 DDT는 느리지만 확실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DDT가 뮐러가 강조한 접촉성 물질인가이다. 그는 야외에서 콜로라도잎벌레가 들끓는 감자 식물에 DDT를 뿌려보았다. 그러자 유충들이 즉시 땅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충들은 DDT를 뿌리자마자 금방 잎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DDT를 먹을 수 없었다. 따라서 DDT는 뮐러가 찾던 접촉성 독성 물질이 분명했다. DDT는 뮐러가 제시한 조건 중에서 단 하나 즉 즉효성은 다소 떨어졌다.
DDT는 곤충의 피부가 물에 젖지 않게 보호해주는 얇은 지방 물질층을 녹임으로써 곤충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그 층에 침투한 DDT는 곤충의 신경 말단에 이르러 점차 중추 신경을 마비시킨다. DDT와 접촉한 곤충은 짧은 동안 흥분상태를 거쳐 점점 몸이 마비되다가 마침내 죽는다. 훗날 DDT는 나트륨이온을 전류에 민감한 통로를 통해 곤충의 조직 속으로 들어가게 해 신경 신호를 무차별적으로 발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물과 사람은 조직 속에 나트륨 이온을 훨씬 적게 흡수하므로 DDT는 곤충에게만 독성을 나타낸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처음에 설정했던 거의 모든 기준을 만족하는 살충제 DDT를 발견한 것이다. 더불어 DDT는 파리 이외의 다른 곤충들에도 효과가 있었다.
발진티푸스는 ‘감옥병’ 또는 ‘난민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감옥이나 난민수용소처럼 위생 상태가 좋지 않는 곳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경우 자주 발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유태인들 중 사망자의 1/3은 처형이 아니라 발진티푸스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이 DDT가 그야말로 수용소에서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1943년 10월, 이탈리아 나폴리의 난민수용소에서 발친티푸스가 발명하여 25%의 사망률을 기록했는데 연합군이 수용소 난민들 130만 명에게 DDT를 살포했다. DDT는 사람들의 모자와 옷, 머리카락 등에 뿌렸는데 그해 겨울에 발진티푸스로 인한 사망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일일이 DDT가루를 뿌리는 것이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자 군에서는 말라리아의 병균을 옮기는 모기 유충을 박멸하기 위해 분말 형태의 DDT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에어로졸 캔에 DDT를 넣은 것을 ‘벌레폭탄(bug bombs)'라 했는데 이것은 남태평양에서 미군들이 널리 사용했다. 벌레폭탄은 엄청난 양의 CFC와 DDT를 동시에 방출했는데 이들 지역에서 이와 벼룩, 모기가 사라졌으며 자연스레 발진티푸스, 말라리아도 사라졌다. 특히 전쟁은 곤충이 많은 열대 지방에서도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DDT의 성과는 더욱 컸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인들은 이를 없애기 위해 옷에 DDT를 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DDT가 발명되었을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이므로 군은 DDT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군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발진티푸스였다. 발진티푸스는 ‘이’가 전염하는데 기아 또는 그 밖의 재난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전염병이었다. 발진티푸스는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철군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지나는 동안 군대를 궤멸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직후에 러시아인 2,000〜3,000만 명이 번창하여 무려 300만 명이 사망했다. 동 유럽에서도 수십 만 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DDT를 전투지역의 곤충에 대해 시험할 결과 곧바로 효능이 입증되었다.
자원자의 피부에 뿌린 DDT는 3주일 동안 ‘이’에 대해 치명적인 효과를 보이지만 제충국을 8일밖에 가지 않았다. 연못에 DDT를 뿌리자 그 연못뿐만 아니라 이웃 연못의 모기 유충들도 모두 죽었다. 물새들의 몸에 묻어 이웃 연못으로 DDT가 옮겨졌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모기 유충을 박멸하기 위해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서만 사용했지만 연합군은 DDT를 전방위로 활용했다.
처음 군부는 DDT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러나 각종 실험을 통해 DDT를 5% 농도로 희석시키면 군대에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었다. 역사상 처음 겨울철 발진티프스가 사라졌고 서아프리카에서는 DDT가 벼룩을 매개하는 전염병, 서태평양의 사이판 섬에서는 뎅기열,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에서 발진티푸스를 사라지게 했다.
DDT는 페니실린, 원자폭탄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현대 과학의 경이로운 산물 중 하나였다. 윈스턴 처칠은 1944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화합물에 찬사를 보냈다. 미국경제연합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곤충학 역사에서 인류에게 공중 보건, 가정의 안락, 농업 부분 등에서 안심할 수 있는 그러한 약속을 제공한 화학 약품은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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