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의 능침은 다행히도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진 것이 많다. 장릉 터를 풍수가들은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능역 내에는 홍살문, 정자각, 단종비각, 재실 등 여타 왕릉과 다름없다. 그러나 장릉은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이 일반 능과 다르게 배치돼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공간과 다른 형태다. 이것은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장릉의 상설은 정릉(貞陵)과 경릉(敬陵)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문인석은 있지만 무인석은 생략됐고, 세자 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능역이 조성된 숙종 때는 왕 단종이 아니라 세자 ‘노산군’이었기 때문이다. 중종 때 첫 능지 확인 후 숙종대에 이르러 혼유석과 장명등, 석호, 석양, 망주석 등 석물을 정비했는데 석물의 양식은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진 후릉(厚陵)을 따랐다. 명릉 이래 만들어지는 사각의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 선을 보인다.
장릉의 상설 배치는 곡장 3면, 상석 1, 장명등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석마 및 석양, 석호 각 1쌍,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서, 홍살문, 재실 등이 있다. 이곳의 산신석은 다른 곳과 달리 위쪽에 예감, 아래쪽에 산신석이 있어 왕과 산신의 위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특히 규모는 작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세종의 영릉과 더불어 으뜸으로 꼽힌다.
영조대에 제향공간을 만들고 정자각과 수복방 등이 설치되었고 정조 15년(1791) 왕명으로 장릉 밑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으며 더불어 장판옥, 박충원 정려각, 엄홍도 정려각, 배견정, 충신각 등이 보인다.
배견정, 장판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따라다닌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사사되자 단종의 영혼은 불교의 환생논리에 의해 ‘두견새’가 됐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단종의 유배시 함께 따라 온 시녀들은 청령포 건너 동강 절벽에 있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들 영혼은 단종의 유택이 있는 장릉의 능선 끝자락에 와서 단종의 영혼에 절을 하고 시중을 들었다.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뜻을 기려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주고, 뒤편 바위에 ‘배견암’이라는 글자를 썼다. 또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32인, 조사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 6인 등 총 268명의 위패를 모셔 그들을 위로했는데 이 건물이 ‘장판옥’이다.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에서는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영월에서 가장 큰 문화행사인 단종제를 지냈는데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때 이들의 제사도 지낸다.
장릉 주변에는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대의에 따라 절개를 지킨 4명의 충신을 포함하여 10충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가 있다. 또한 영흥리 일대에는 단종이 사망하자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여섯 시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민충사와 영모전 등이 있다.
장릉의 원찰 성격을 지닌 사찰이 보덕사다.
지덕사, 노릉사라고도 불리는데 월정사의 말사다. 668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지덕사라 명명된 천년고찰이지만,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다시 조성된 매우 작은 사찰이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되자 사찰 이름을 노릉사로 개칭했고 후에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보덕사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보덕사 입구는 수령이 6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연못 주변으로 450년 이상 되는 여러 느티나무들이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으며 극락보전이 지방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면 3칸 규모로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현판은 김규진이 썼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유명한 해우소 즉 화장실이 지방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는데 1882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해우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는 송현수의 딸로 단종보다 한 살 위로 1454년 가례를 올렸다. 1455년 단종이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는데 16세로 사망한 남편보다 64년을 더 살다가 중종 16년(1521)에 세상을 떠났고 현재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있다. 사릉은 그동안 비공개였는데 2013년 1월부터 공개하고 있으며 <조선 왕릉(18) : 제1구역 사릉>에서 다루었다.
사릉이 공개되면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능을 한 곳에 두자는 목소리도 있다. 사춘기 소년소녀로 생이별한 지 500여 년, 이제라도 두 사람의 한을 풀어주자는 생각이다. 영월에 있는 단종을 정순왕후 곁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있고 사릉을 장릉 옆으로 이전하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문화재는 제자리에 원형대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보인다.
<지구의 공신 스트로마틀로이트>
장릉이 비운의 주인공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석이 있다. 바로 지구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스트로마톨라이트다.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aria)로 이루어진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으로 불리는 이 단순한 생태계가 초창기 지구의 얕은 연안을 뒤덮었는데 학자들은 바로 이 조류가 현재 우리들이 살 수 있는 지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몇 백 미터나 되는 두터운 얼음이 얼어서 흙이란 전혀 없고 영하 70℃의 극저온의 남극에서 살 수도 있고 200℃가 넘는 뜨거운 온천에서도 살 수 있으므로 과거 지구와 같은 작열 지옥과 같은 극한 지역에서도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서(西)오스트레일리아의 샤크 만을 중심으로 현재도 계속 생명활동을 하면서 산소를 배출하고 있다. 이들은 난(暖)바다의 수심 5m 정도인 곳까지 분포하고 있는데 물이 상당히 투명하여 상황에 따라서 산소의 기포가 표면으로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구 대기 중 산소는 복잡한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다. 생명체는 에너지 생성을 위해 호기성 호흡을 통해 산소를 사용한다. 대기 중 산소 농도는 약 24억 년 전에 극적으로 상승했으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상당수 과학자들은 24억 년 전에 처음 진화한, 시아노박테리아라고 불리는 유기체가 산소 생성 광합성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마디로 지구가 태어났을 때 현재의 금성과 같이 작열지옥이었는데 남조류가 출현하여 이들이 몇 십억 년 동안 산소를 만들어 현재와 같은 산소 위주의 지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아노박테리아는 오늘날 모든 식물들이 수행하는 것과 같은 비교적 정교한 형태의 산소 생성 광합성을 한다.
태양이 약 50억 년 전에 태어나고 지구가 45억 년 전에 처음 탄생한 후 몇 억 년이 지난 약 35~38억 년 전부터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살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시아노박테리아는 현재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데 특히 바닷물 속에 살고 있는 이들 부류는 먹이사슬로 볼 때 가장 낮은 곳에 분포하고 있어 고등생물이 생존할 수 있는 저변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선캄브리아대 초기에서 현세까지 약 35억 년간의 모든 지질시대에서 산출된다. 일반적으로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고생대 이전 즉 시생대와 5억 7천만 년 이전의 선캄브리아의 지층에서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화석으로 알려진다.
이들 최초의 생물들이 얼마 만에 분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대박테리아가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 약 15~20분 만에 번식하므로 한 세대의 평균 길이를 두 세 시간으로 간주한다면 현대박테리아는 적어도 10조 세대를 거친 후 생긴 것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살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시아노박테리아의 화석인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발견되는 곳은 대청도와 마주보고 있는 소청도다. 백령도로부터 남쪽으로 약 14km 떨어져 있는 소청도의 남동쪽 약 500m 구간에 원생대 즉 8억4천만 년 전의 화석이 분포한다. 탑동 포구의 남쪽에 해안을 장식하는 하얀 돌들이 보이는데 마치 분칠을 한듯하다 해서 ‘분바위’라 불린다.
소청도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맑은 흰색을 보이므로 일제강점기에 대리석광산으로 개발되어 중앙청 총독부건물의 바닥 재료로 사용되는 등 1970년대까지 채취되어 원형에서 많이 훼손된 상태다. 2007년 1월 끄새가 현장을 방문했을 때에도 채취를 위한 철제봉이 남아 있었다.
한편 대청면 소청1리 김준성 출장소장에 의하면 정부에서 분바위 일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때 주민 상당수가 반대했다고 전한다. 소청도의 주민들은 분바위 일대의 바다 속에서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경우 접근이 불가능하므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9년 천연기념물 제508호「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및 분바위」로 지정되었다.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있는 소청도는 과거에 출입통제를 받았으나 1980년대부터 해제되어 쾌속정이 다니고 있으므로 답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소청도로 가기 위해서는 일기예보에 주목해야 한다. 백령도, 대청도와 함께 최북단에 위치하는 소청도는 일기불순으로 자주 결항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소청도 외에 강원도 태백시 부근, 경남 진양, 하동, 사천, 경북 경산, 군위, 영월 등에도 분포한다. 영월 문곡리의 건열구조 및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다소 연대가 늦어 약 4~5억 년 전에 생긴 오르도비스기 하부고생대 지층에 형성되어 있다. 건열구조는 얕은 물 밑에 쌓인 퇴적물이 물 위로 나와 마를 때, 퇴적물이 줄거나 오그라들면서 생긴 틈이 그대로 굳어져 형성된 지질구조다. 이는 영월 문곡리 지역이 과거에 바닷물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월 문곡리의 스트로마톨라이트 현장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곡리에서는 스트로마톨라이트라고 부르기보다는 '거북등껍질 바위'로 불려지고 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영월의 장릉에서도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발견된다.
영월 장릉의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은 장릉 능침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소 언덕을 올라가는 입구에 있다. 두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고인돌 탁자와 같은 하얀색 돌로 방문객들은 이 탁자가 스트로마톨라이트인줄 모르고 앉아서 휴식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기 마련이다. 일반 사람들이 위치를 모르면 장릉의 관리원들에게 질문하면 친절하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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