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을 좌우로 야외에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목할만한 것은 신라 석탑의 규범이나 마찬가지인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높이 9미터의 고선사지삼층석탑은 화강암 석재로 건조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올려놓은 일반형 석탑이다. 원래 경주시 고선사지에 있었으나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77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규모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과 비슷하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인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하층기단은 굽처럼 올려진 기대와 면석이 같은 석재로서 12개석으로 짜여졌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3주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12매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상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의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12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2주의 탱주가 모각되었다. 상층기단 갑석은 8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었는데, 하면에는 부연(副椽, 탑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마련되고 상면에는 별개의 석재로 조성된 각형의 높직한 굄대를 2단으로 놓아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초층 옥신은 각 면의 우주와 면석을 별개의 석재로 구성하여 도합 8개의 석재로 조립하였다. 또한, 4면에는 문틀을 모각하여 감실을 표시하였고, 중앙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못 자리가 있으며, 문비형 윤곽 안에도 상하에 못 자리가 있어 장식이 달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2층 옥신은 4매석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각 층이 같은 양식과 수법으로 조성되었는데 낙수면석과 하면의 받침석은 별개의 석재이나 각각 4매석으로 결구하였다.
밑면의 받침은 5단씩이고 낙수면 정상부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높직하게 각출하여 그 위층의 탑재를 받치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4면의 합각(合角)도 예리하며 전각(轉角)의 반전이 잘 표현되어 장중하고도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층 ·단이 없는 노반과 복발 ·앙화석이 남아 있고, 찰주는 없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노반석이 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상단부에 받침 층단이 없고 반대로 굄대가 각출되어 그 위에 복발을 받고 있는 점이다.
이 탑이 서 있던 고선사는 원효(元曉)가 머물렀던 일이 있고 그의 입적이 686년이므로 석탑의 건립연대는 이때로 추정한다. 고선사지삼층석탑은 감은사지삼층석탑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석가탑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는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박물관 건물 주위로 온통 전시물들이 있는데 장항리 석조여래입상,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은 에밀레종을 마주보는 곳 즉 박물관 입구의 좌측에 전시되어 있다.
장항리절터 석불은 도굴범에 의해 여러 파편으로 파괴되어 있던 것을 수습하여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석불이 있었던 장항리절터에는 지금도 석불의 대좌였던 팔각대좌와 오층석탑 2기가 있는데, 대좌의 중대석에는 사자무늬와 연꽃무늬가, 석탑의 초층탑신에는 금강역사상이 뛰어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신(佛身)을 같이 조각한 이 여래입상은 불신을 고부조(高浮彫)로 하여 마치 광배와 따로 조각한 느낌을 준다. 머리는 울퉁불퉁한 나발이고, 육계가 크고 높게 올라와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 자국이, 목에는 세 줄의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대의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의인데, 매우 얇아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난다. 광배는 머리를 감싼 두광과 몸을 감싼 신광으로 구성되었고 안쪽에는 화불, 맨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현재 화불은 5구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7구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좌까지 합하여 복원하면 전체 높이가 5m 가량 되는 거대한 장륙상(丈六像)으로 추정하는데 석굴암을 만들었던 시기보다 약간 늦은 8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통일신라 최절정기 마지막 단계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의 높이는 3.75미터, 제작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로 추정한다. 원래 이 보살상의 머리와 몸체가 각각 따로 있었으나 1997년 몸체가 묻혀 있던 부근에서 연꽃 대좌를 발견하여 지금의 완전한 모양을 갖추었다. 원래 관음보살상은 보관에 작은 화불이 새겨져 있고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보관의 화불은 마모 상태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상으로 추정한다. 얼굴과 팔이 다른 부분보다 길게 표현되었으며 얇은 옷자락 흐름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것은 물론 잘룩한 허리의 굴곡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므로 S라인 몸매로도 알려진다.
또한 현재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흥륜사)는 고선사지삼층석탑 앞에 있다. 숭복사 거북모양의 받침돌 등은 수많은 파편들과 함께 있다. 조선시대의 훼불 조치로 분황사의 우물 속에서 발견된 목이 없는 석불들은 전시관 건물 후면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머리가 있는 석불도 있다.
참고적으로 이들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유물들의 상당수가 국보, 보물은 물론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다. 한마디로 지정된 작품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는 문화재 지정 규칙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현장에 있거나 확실한 출처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연유로든 당초의 현장에서 옮겨진 것은 물론 정확한 발견 위치가 불분명하므로 국보, 보물 등 유산으로 지정되는데 결격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현장에서 옮겨졌음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사전에 지정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경주남산지킴이’ 회장인 유정숙 선생은 예외적인 조처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야외전시물을 본 후 실내전시장으로 들어간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진수>
어느 박물관을 들어가더라도 실내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어느 작품부터 보아야하는지 헷갈린다. 수많은 유물들을 일일이 꼼꼼하게 살펴본다는 것은 시간이 많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각국의 박물관에는 중요 전시품들의 목록을 만들어 그들만은 반드시 보고 가라고 하는데 경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주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유물로 기를 죽이지만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찬란한 금관, 문무대왕비, 남산신성비,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 보물 제636호) 및 말 탄 무사토기 외 각종 토우, 황룡사터 발견 대형 치미 등을 빠뜨리지 말기 바란다. 그러나 예술에 감각이 있는 답사객이라면 경주의 자랑인 ‘신라의 미소(흥륜사 또는 영묘사 출토)’ 수막새에 눈썰미를 주었을 것이다.
수막새는 지붕의 기왓골 끝에 얹는 것으로 무늬는 연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사람 얼굴이 새겨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대체로 기왓장의 무늬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와 앞날의 평안을 소망하는 기원이 담겨 있다.
수막새 자체는 절반 정도 깨어졌지만 둥근 테두리 안에 수려한 코와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린 우아한 미소에서 나오는 세련된 표정이 오히려 돋보인다. 한마디로 와공의 재주가 흘러넘친다. 이배용 박사는 천 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미소를 간직한 수막새만 보면 비록 한쪽이 깨져 떨어져 나갔어도 우리에게 영원한 설레임과 마음의 평온을 준다고 극찬했다.
박물관 실내의 전시물 중의 간판스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 남산 불상 중 가장 앳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장창골미륵삼존불이다. 남산지킴이 원조라고도 볼 수 있는 윤경렬 선생이 신라의 불상 중에서 가장 극찬한 것이 이것으로 윤 선생의 설명을 발췌한다.
‘원형으로 소박하게 핀 연꽃 위의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들었고, 왼손은 가사 자락을 잡은 채 손바닥을 위로 향해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있다. 얼굴은 정면으로 들어 밝은 표정이다. 머리에는 나지막하게 육계가 솟아 있고 이마와 두 눈두덩 사이 곡선으로 패어진 홈에는 단정하고 굵은 눈썹이 암시되어 있다. 부풀어 오른 풍성한 눈시울 아래로는 부드럽게 그늘을 지우면서 아래 세계를 내려다보는 고요한 눈을 형성하였다.
아기들처럼 둥근 얼굴이지만 짧은 인중, 작은 입, 작은 턱이 얼굴의 길이를 줄여서 둥글게 나타냈으므로 얼굴은 아기들처럼 천진스럽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숨겨져 있으며 두 귀는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고 머리 뒤에는 연꽃을 새긴 두광이 빛난다. 상의 다리는 짧게 보이는데 입체상이면서 허벅다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이 아기처럼 어리게 보이는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 아닐까?
아기 부처라 불리는 두 협시보살은 다 같이 머리와 키의 비례가 4등신으로 되어 있다. 4등신은 갓난아기들이 지닌 신체의 비례다. 이마와 두 눈시울 사이를 깊이 파서 눈썹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나 두 눈시울 아래 그림자를 드리워 눈을 나타낸 솜씨나, 갸름한 코며 작은 입술 등은 본존과 같은 솜씨인데 입술 양가에 패어진 홈은 더욱 깊어서 피어나는 미소가 화사하다. 머리에는 넓은 관대(冠帶)를 두르고 양옆과 앞에 꽃 장식을 붙여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꾸며졌다. 오른쪽 협시보살의 보관 앞면은 연꽃 위를 한 개의 보주로 장식하였고 오른손에 연꽃 봉우리를 들어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채 배 앞에 들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의 보관 앞면은 연꽃 위에 앉힌 삼과보주(三果寶珠)로 장식하였으며 왼손에 경문을 들어 어깨 앞에 올리고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대어 배 앞에 들고 있는데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무리하게 펴고 있는 것이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
우협시 보살은 둥근 꽃송이가 달린 세 겹으로 된 목걸이를 걸었고 좌협시 보살도 꽃송이가 달린 두 줄로 된 목걸이를 걸고 있다. 우협시의 목걸이는 목 앞에 짧게 걸렸는데 좌협시의 것은 가슴에 넓게 드리워져 있다. 어깨에 걸친 천의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가슴을 가리면서 오른팔에 걸쳐 아래로 드리워졌고, 오른쪽 어깨에서 흐러내린 자락은 두 무릅 앞에서 반원을 그리며 왼팔에 걸쳐서 아래로 드리워졌다. 두 보살의 천의는 다 같은 모습이다.’
아기 부처라 불리는 협시보살은 1925년 남산 장창골 고개마루에서 발견되었다. 본존상이 옮겨질 때 남간마을 민가에서 갖고 있었는데 본존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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