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에서 이전된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도 국립경주박물관의 간판스타나 마찬가지다. 높이 약 179센티미터의 입상으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으로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금동비로좌나불좌상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3대 금동불 중 가장 큰 불상으로 1930년 백률사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삼국유사』에 '백률사에 대비상(大悲像)이 모셔져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금동불이 기록의 대비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리는 신체에 견주어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비례에 가까우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원형이다. 긴 눈썹, 가는 눈, 오목한 코, 잡은 입에 온화한 미소가 감돌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불상이다. 아랫배가 나오고 상체가 뒤로 젖혀지면서 우람한 체구를 과시하고 있지만 어깨가 다소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두 손의 모습이 잘라져 알 수 없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취하고 왼손은 약단지와 보주를 받친 듯하다. 발과 발톱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두 팔에서 늘어진 옷자락은 자연스럽게 처리했고 옷무늬는 하나 건너씩 중앙에서 절단된 반원형이다. 현재 도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주홍과 녹색으로 채색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약사여래에 기원하면 모든 병이 치유된다 하여 신라 때부터 왕족은 물론 일반인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다. 내부가 완전히 비어 있는 중공식 주조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내부에는 많은 틀고정쇠를 사용해 생긴 흔적과 주물 뒤 결함 부분을 보수한 땜질 자국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금동약사여래입상과 함께 백률사에서 국립경주박물관에 이전된 이차돈순교공양비는 불교 전파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는 공양비로 헌덕왕 9년(817)에 만들어졌다. 육면의 특이한 기둥 형식으로 다선 면에는 명문이 있고 나머지 한 면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양각되어 있다. 약간 허리를 굽혀 공수하고 있는 인물상의 머리는 땅에 떨어졌고 머리 없는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오르고 있으며 꽃비가 내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을 추상적인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문은 창림사 비문 글씨로 유명한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비의 밑 부분에는 별석의 대석이 있었고 위에는 지붕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경주박물관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것 중의 하나는 경주인들의 삶이 엿보이는 질그릇 즉 토기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이 중앙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나 권위를 보여주는 것임에 비해 토기는 당시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반영해 주기 때문이다.
낙동강을 경계로 구분되는 신라와 가야 토기는 가야와 물레를 사용하는 회흑색 경질 토기가 대부분이다. 기본형은 굽다리와 목항아리다. 대부분 무덤의 부장품인데 신라토기는 굽이 높고 접시 모양이 둥글며 목과 어깨가 구별된다.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허세를 느끼게 하는 과장이 보인다. 이에 반해 가야의 토기는 굽이 낮고 접시가 납작하며 목에서 어깨로 둥글게 돌아가 전체적으로 공예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실생활과 관계없는 이형 토기들로 말, 오리, 집, 배, 기마인물 도상 등이다. 동물형은 등에 구멍이 있고 속이 비었으며 술잔 같은 목이 있다. 조형 감각이 매우 섬세하고 샤머니즘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신라의 토기 중에 항아리 목에 그리거나 붙인 인물과 동물의 조각들이 있는데 인물 모양의 경우 성적(性的)인 면이 과장되어 당시 사람들의 풍요와 다산에 대한 염원을 보여준다.
흥미 있는 것은 손으로 마구 빗은 것으로 보일 정도로 조잡한 인상을 주는 흙 인형들이다. 학자들은 이들 인형이야말로 그들을 만들어 낸 민중들의 현실감과 소박한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성기가 엄청나게 과장된 모양 등에서 당시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보여준다. 불교의 나라인 신라라 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느끼는 일거수일투족이 이들 토기나 인형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박물관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또 다른 기쁨이다.
<로마의 보물 황금보검>
끄새에게 신라의 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출토품 두 가지를 꼽으라면 금관과 황금보검을 든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국보도 아닌 황금보검(보물 635호)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금관보다 황금보검을 선정한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존하는 세계 금관 10개 중 한국이 7개를 소장하고 있다고 설명하면 다소 수긍하지만 어떤 이유로 황금보검을 제일 처음으로 꼽느냐고 다시금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을 신라에 조예가 깊은 요시미츠 츠네오의 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보로워에(현 카자흐스탄)의 귀금속 상감검의 장식은 얼핏 보면 신라의 황금보검 장식과 전혀 무관해 보일 정도로 디자인이 다르다. 그러나 제작 기법은 모두 공통적으로 복스 세팅법에 의한 귀금속 상감법이고 상감한 귀금속 주위에 금알갱이를 장식하는 누금세공 기법도 동일하다. (중략) 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에 비하면 보로워에 귀금속 상감검의 디자인이나 제작 기술은 훨씬 뒤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황금보검은 현존하는 보검 중에서 세계 최고의 디자인과 제작 기술을 갖고 만들었다는 뜻이다. 경주박물관에 있는 황금보검은 전체 길이 36센티미터, 최대 폭 9.3센티미터다. 전체 모양은 칼자루 끝장식이 반타원형이고, 칼자루의 폭은 반타원형 장식의 지름보다 좁다. 칼집 입구는 역사다리꼴이며, 그 옆은 허리띠에 차도록 만든 고리를 붙였기 때문에 산모양이다. 칼집은 끝이 넓으며, 칼집 위에 반원형 장식 금구로 구성된 단검으로 표면에 석류석 등의 귀금속과 누금세공 투각으로 전체가 장식되었다. 칼몸은 철제이지만 의례용 패도로 만들어 진 것으로 뒤쪽에는 장식이 없다. 황금보검의 표면에 보이는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에 금알갱이를 장식하고 메달의 틀과 공백 부분에 금알갱이를 장식했는데 이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기법이다. 그런데 5〜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이 출토된 곳은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이다.
신라고분에서 어김없이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나 반지 등 금은제품들이 출토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등의 디자인, 기법, 기술은 로마 세계에서 비롯된 누금세공 기법이다. 금사슬 기술도 특징적이다. 사슬은 원래 그리스시대에 발달하여 로마 시대에 장신구용으로 대유행했는데 사슬은 금은제의 가는 선을 어떻게 꼬았느냐에 따라 여러 방식이 있다. 즉 사슬을 만들려면 금은제 가는 선과 그것을 꼬아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신라에서 출토된 두 갈래로부터 여섯 갈래 사슬을 이용한 장신구는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 신라에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가는 선이나 금알갱이를 만드는 것은 매우 특수한 기술로서 단지 아이디어 차원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는 줄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주조된 금이나 은막대를 두 점의 석판이나 브론즈판 사이에 기워 압력을 가해 굴리면서 조금씩 가늘게 늘인다. 일정한 굵기가 되면 끝을 가늘게 만들어 마노나 브론즈 덩어리의 구멍에 집어넣어 천천히 당긴다.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가는 금줄이나 은줄을 만든다.
금알갱이를 만드는 방법을 금속공예명장인 경주민속공예촌 삼선방 김진배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는 금은줄을 지름과 비슷한 길이로 잘라, 탄가루에 늘어놓고 다시 그 위에 탄가루를 덮는다. 탄가루 위에 다시 잘라낸 금은조각을 늘어놓고 그 위에 또 탄가루를 뿌린다. 이런 공정을 몇 번 반복하고 이것을 가열하여 금은줄 조각이 융해될 때까지 열을 가한다. 융해된 금조각은 표면장력에 의해 작은 알갱이가 된다. 이것을 세정하여 다시 석판 등을 겹친 사이에 끼우고 연마 처리해 금알갱이를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땜질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녹청(동록)을 갈아서 풀과 물로 반죽 상태로 만들어 금알갱이나 가는 줄에 묻혀 기판 위에 접착한다. 섭씨 100도에서 녹청은 산화동이 되고, 섭씨 600도에서 풀은 숯이 된다. 다시 섭씨 850도까지 높이면 숯은 산화동의 산소를 빼앗아 순동 피막을 기판 위에 남기고 탄산가스가 된다. 그대로 가열하여 섭씨 850도에 달하면 피막이 된 동은 기판의 금, 금줄 등과 반응하여 합금되면서 땜질이 완성된다. 한마디로 금의 마술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기술이다.
황금보검 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세 개의 파무늬 즉 태극무늬이다. 일반적으로 태극무늬 안에는 다른 무늬를 새겨 넣지 않는다. 그런데 이 황금보검에 들어 있는 세 갈래의 태극무늬 안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들어있다. 특히 각 공간에 매우 균형 있게 능숙한 방법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제작한 사람은 태극무늬를 매우 자주 사용하였고 이 칼에 의도적으로 삽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 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 넣는 것은 동유럽 트라키아(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구권) 지역에서 살던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켈트파’라고 한다. 이들이 잉글랜드의 북부 즉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켈트인이 된다.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Brave Hart)」는 바로 스코틀랜드의 켈트와 잉글랜드와의 알력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 아직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라는 것을 거부한다고 한다. 근간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분리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요시미츠 츠네오 교수는 그리스 소용돌이무늬와 로만로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황금보검을 제작한 금세공 기술자는 로마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며 황금보검을 주문한 사람은 켈트파(태극무늬)를 잘 알고 있는 트라키아라는 광대한 지역에 근거지를 가진 어떤 지배자 중에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트라키아에서 신라까지의 거리는 7000〜8000여 킬로미터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거리감각으로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그러면 트라키아 어떤 지배자가 최고의 의례용으로 만든 황금보검을 아시아의 최동단이라고 볼 수 있는 신라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가 어떻게 갖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보물이 동유럽에서 신라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트라키아 지배자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 국에 가서 왕을 알현한 후 하사받은 보물들을 갖고 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당시의 상인들이 신라로 황금보검을 갖고 왔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보물 중에 보물을 상인을 통해서 트라키아에서 신라로 전달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 제국의 유물들은 하나같이 신라 유적지에서만 출토되었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가야, 신라로 나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은 이들 유물들의 목적지가 오직 신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라키아의 지배자가 왜 신라로 보물 중에 보물을 보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을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많이 있다.
동 시대에 이들 지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근거지였다. 훈족의 지도자인 아틸라(Attila, 395〜453)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3대 제국 중에 하나를 만든 왕으로(나머지 두 왕은 징기스칸, 알렉산더이다) 현재의 서유럽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정복자다. 아틸라는 로마 제국(452년)의 밀라노를 점령한 후 로마제국을 정복했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할 정도로 위명을 떨쳤다.
훈족이 서방에 나타나게 된 것은 중국과 흉노(匈奴, 여기에서 흉노는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보다 3배 정도의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북방기마민족의 제국을 뜻함)의 수백 년에 걸친 혈투 때문이다. 이들 간의 전투는 일진일퇴하면서 수많은 흉노의 일족 중 한 일파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이 되었고 한 일파는 동천(東遷)하여 신라와 가야의 지배민족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즉 양자 간에 친연성(親緣性)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근래 놀라운 자료가 발굴되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편찬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은 아틸라가 명실상부한 서방의 패자가 되자 중국과 대등하게 동맹관계를 맺고자 사절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는 중국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로 아틸라가 사신을 보낸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는데 일부 학자들은 아틸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나라가 사실은 신라라고 추정한다. 아틸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낼 정도라면 상당한 예물이 부수되어야하는데 중국에서는 로마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신라에서 황금보검 등 엄청난 로마 유물이 발견되는데 이 당시 아틸라의 사절이라면 그 정도의 예물은 당연할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황금보검을 둘러싼 연구는 계속되고 있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근래 발표되었다. 우선 황금보검에 사용된 붉은색의 보석은 마노가 아니라 석류석(garnet)라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연구에 의하면 황금보검이 생산되던 시기의 트라키아에서 발견되는 장식류에 장식된 석류석의 생산지는 놀랍게도 스리랑카와 인도였다. 로마에서 스리랑카 또는 인도에서만 발견되는 석류석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당시에 로마와 이들 국가 간에 어떠한 경로로든 무역로가 개통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보검이 트라키아에서 신라까지 전달되는 과정은 북방 초원지대만이 아니라 트라키아, 스리랑카(인도), 신라를 연결하는 해상로를 거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대에 세계의 패자라고 자부하던 아틸라에 대한 기록이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 문제는 삼국통일 전의 신라가 한반도의 동쪽 끝에 자리한 궁벽한 나라가 아니라 당대 세계 최고의 제국과 교류하던 세계성을 지닌 나라라는 사실과 우리 민족 형성 과정의 다채로운 기원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 그래! 한국의불가사의>의 ‘황금보검과 아틸라’를 참조하기 바란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역을 설명하면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 않는 중요문화재도 다루었지만 이들 외에도 경주에 수많은 유적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만큼 경주라는 곳이 유산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경주를 방문하면 가까운 거리는 되도록 걸어 다닐 것을 강추하는데 한국의 자랑인 천년의 고도 경주의 참 맛을 단기간의 답사로 느낄 수는 없는 일이다. 신라 천 년 고도를 ‘빨리 빨리’라는 한국 특유의 습성으로만 지나치기보다 경주 전체의 면면을 일일이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주에 대한 답사에 아쉬운 점이 많이 있지만 어떤 일정이라도 항상 마무리의 시간이 오게 되므로 석굴암과 불국사를 별도로 설명하면서 유네스코 지정 경주 답사의 대장정을 마친다.
참고문헌 :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기마 흉노국가 신라연구」, 조갑제, 월간조선, 2004년 3월호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호, 2004
「흉노의 휴저왕 태자 김일제(김일)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88호, 2010
「천년의 설레임, 영원의 미소」, 이배용, 중앙일보, 2013.03.1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1344&cid=42649&categoryId=42649
『경주남산(1)』, 윤경렬, 대원사, 1991
『미술로 보는 우리 역사』, 전국역사교사모임, 푸른나무, 1992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dward Gibbon, Penguin Classics, 1994
『답사여행의길잡이(2) 경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2001
『로마 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츠 츠네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2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5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예담, 2007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기번, 이종호 편역, 지만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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