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비어로 만든 괴물 라스푸틴>
<13조사부>의 자료를 검토한 라진스키 박사의 결론은 간단하다.
‘사악한, 변태 수도승’으로 매도되었던 라스푸틴은 정치 음모의 희생자로 제정 러시아 황실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과 러시아 황제 반대 혁명 세력 등이 각종 유언비어를 유포해 라스푸틴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광직 박사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한다.
라스푸틴에 대한 가장 큰 공격은 그가 반역자로 황후와 결탁하여 러시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악한 라스푸틴의 사주에 의해 독일계의 황후가 독일에게 유리한 세계정세를 만들어가려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중추인 영국과 독일의 전투에서 러시아가 어떤 조처를 취하느냐이다. 문제는 러시아의 경우 인구 즉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장정의 숫자가 많다고 하지만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에 비해 전력이 엉망진창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라스푸틴은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화마에 휘말릴 경우 이득이 없다고 강조했다.
사실 러시아로 보아 엄밀한 의미에서 당대의 상황은 라스푸틴과 황후의 이야기가 타당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는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황제인 니꼴라이 2세의 능력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여 1915년 말까지 500여 만 명이 전쟁터에서 살해되었는데 이들 대부분 소총은 물론 군화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전쟁터에 투입된 터였다.
그런데 영국으로서는 필사적으로 러시아의 참전을 유도해야했다. 러시아의 전력이 형편없으므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희생되더라도 독일과 대치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독일과의 대결과 전력 분산을 의미하므로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투에 손을 놓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이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핵심 주제인데 이를 위해서 영국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러시아 내에서 절대로 독일과의 전투를 중단케 해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빌미는 바로 독일계 황후 알렉산드리아와 이와 밀착한 라스푸틴이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영국이 가장 우려하는 러시아의 전쟁 개입을 반대하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정확하게 러시아의 전력을 러시아 각지의 순례를 통해 잘 알고 있으므로 독일과의 전투는 일방적인 참패에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죽게 되며 이는 러시아의 치명타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황만 보면 러시아는 일방적인 패배로 치닫았다. 러시아로 보아 엄밀한 의미에서 당대의 상황은 라스푸틴과 황후의 이야기가 타당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니꼴라이 2세가 정세를 정확히 판단했다면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마디로 독일과 영국과의 전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무기가 중요한데 러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장병 숫자는 연합군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러시아군은 소총도 없이 전쟁에 투입되어 총알받이가 되었다. 이 사실을 니꼴라이를 비롯하여 러시아 위정자들이 몰랐을 리 없었다.
사실 당대에 러시아군의 피해가 상상을 초래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하자 독일과의 협상론이 상당이 제기되고 있을 당시였다. 이것을 러시아가 카드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대에 러시아의 참전을 결사적으로 바라는 곳은 독일에 반대하는 영국 등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이런 동태를 감지했는데 연합군의 대안은 간단하다. 한마디로 러시아가 독일과 협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으로 황후와 라스푸틴가 반역자, 독일에 고의적으로 패방케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런 행태로 러시아가 패배의 길로 들어서고 있으므로 애국 러시아인들이 적어도 독일을 상대로 협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2월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수많은 요인들이 개제하지만 독일과 소총도 없이 전장에 나간다는 것은 현대 전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가 이를 카드로 사용하여 적어도 독일군과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소총, 군화라도 지원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이다. 영국 등 연합군이 독일과 싸우는 러시아에게 소총 등 군수품을 지원해주었겠느냐는 의문은 제기되지만 러시아가 나름대로 세계대전을 빌미로 카드를 쓸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여하튼 영국 등 연합군과 당대 제정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은 근본부터 달랐다. 영국은 러시아가 독일과 전투하도록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반면 공산주의자 등 반대파들은 독일에 연전연패하는 것을 이용하여 제국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빌미를 두 진영이 함께 이용했다는 점이다. 연합군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손을 떼려는 이유로 간첩으로까지 매도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을 거론하면서 여론을 부추켜 러시아를 독일에 팔아먹을 수 없다고 선전했고 공산주의자 등은 제국주의자로 볼 수 그들을 제거하면 신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실제로 라스푸틴 제거의 실무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제거해야한다는 왕당파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확인된 자료로만 보면 유수포프 왕자가 영국 정보부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M16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덤이다.
존 심킨(John Simkin) 박사는 당대 러시아의 핵심들이 당시 무섭게 세력을 키우고 있는 공산주의 등 신세력에 대해 엄밀한 의미에서 큰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고 적었다. 소위 농민 등 하층계급 사람들은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러시아의 악화된 민심과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모든 문제점을 일으킨 사기꾼, 최면술사, 몽상가이자 섹스 중독자, 치료사이자 대담한 성추행자, 신의 남자이자 이단자 라스푸틴만 제거하면 러시아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완고한 러시아의 기득권 세력들은 새로운 세대가 군주주의자들이 견지하는 독재 원칙을 원천적으로 해체해야 한다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말썽 많은 라스푸틴만 제거하면 전제 군주 체제를 유지하면서 구정권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당시 당대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러시아에 없을리 없다.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을 10년이나 역임하고 초대 총리인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Sergei Yulyevich Witte) 백작은 러시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피해야 하며 영국의 우위에 맞서기 위해 프랑스 및 독일과의 경제적 우호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와같은 생각은 자신의 재임 기간 중 러시아 제국이 연평균 8〜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공업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대규모 전쟁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은 라스푸틴과 궤를 같이하며 러시아는 연합군과 독일과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면 공전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스푸틴과 같은 생각을 견지하던 비테 백작이 갑자기 사망한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라스푸틴에 대한 정치 분야에 대한 비판, 라스푸틴의 전쟁 개입은 그야말로 소설이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당대의 세계 정치 역학상 라스푸틴의 죽음을 싫어하는 측이 없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에 따라 라스푸틴을 수많은 순례를 통해 체득한 평화론자라고도 말한다. 러시아와 독일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라스푸틴의 이적 행위 등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한 <13조사부>의 결론에 소비에트 등이 아얏소리하지 않고 이를 발표하지 않은 이유라 볼 수 있다.
<세계의 악당 라스푸틴의 복권>
라진스키 박사가 놀란 것은 떠도는 소문처럼 황당한 사생활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가 광란의 섹스 파티를 벌이며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달랐다.
조사결과에서 그는 복잡한 애정관계보다는 뒤끝이 없는 매춘부를 선호했다고 적혀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라스푸틴은 성직자가 아니므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섹스에 문제가 없지만 자신이 섹스 문제로 많은 곤혹을 치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매춘부들에게 돈을 주고 섹스했다는 점이다. 돈을 지급하고 매춘부와 어울렸다는 뜻으로 이 문제에 관한 한 라스푸틴은 매우 현명한 조처를 한 셈이다. 한마디로 라스푸틴이 섹스광이며 상류층 여자들과 난행을 벌였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스푸틴이 섹스광으로 광란의 축제를 벌었다는 비난이다. 이는 라스푸틴에게 줄곧 따라다니는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상당한 이력이 있다. 당대 모스크바 시장이 라스푸틴이 식당 야르(Jar)에서 ‘성적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시장의 발언은 어떤 내용이든 파괴력이 있기 마련인데 당시의 신문들이 서로 경쟁하며 한 목소리로 ‘여론전선’을 형성하면서 보도했다. 그런데 라스푸틴의 파일은 라스푸틴의 섹스파티가 사실이 아닌 거짓이라고 밝혔다.
가짜 뉴스를 만드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일이다. 라스푸틴 암살의 주동자인 푸리쉬케비치의 주장도 적혀있었다.
‘어떤 어두운 힘이 라스푸틴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러시아제국의 존립이 위협 받고 있다.’
한마디로 라스푸틴이 반역자라는 뜻이다. 황실에서 소외된 귀족들, 황제의 반대세력, 잠복해있던 혁명세력들이 추구한 시나리오는 철저하다.
첫째는 라스푸틴과 황후를 한 묶음으로 겨냥하고, 그 다음 황후를 넘어 니콜라이 2세 황제, 최종적으로 제정 러시아를 공격해 무너뜨리는 발판으로 라스푸틴을 악마의 승려로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스푸틴은 승려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를 승려 또는 수사라 부르는 것은 라스푸틴이 당대 이들과 같은 차림을 즐겼기 때문이다. 당대 러시아 상류층들은 그야말로 퇴폐라 부를 정도로 호화스러운 생활과 의복들을 자랑했는데 라스푸틴은 이들과 달리 서민들의 옷을 선호했다. 사실 가장 서민적인 옷이 성직자의 옷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성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사들의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자신이 민중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적폐조사위원회>는 라스푸틴의 친구, 황실, 친인척, 황실 경호대 요원, 정적, 은밀히 만났던 인사들, 매춘부들 등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소환해 조사했다. 황제 재임 중에도 라스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은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 있었다. 비밀정보원은 그의 집 일층과 계단에서도 감시했고, 라스푸틴이 외출할 때는 비밀경찰의 자동차가 따라 붙었다.
귀족부인, 매춘부, 채권자, 청원자 등 모든 방문객의 이름과 방문시간, 떠난 시간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가 식사했던 식당에서의 동향은 물론 파티, 고위층들의 방문 내역 도 기록되었다. 그가 황후에게 추천했던 공직 후보자들에 관한 내용도 비밀경찰 기록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볼 때 라스푸틴이 황후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한 수사 자료에 의하면 음악대학 졸업생이 제국극장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라스푸틴의 도움을 받고자 라스푸틴에게 접근했으며, 라스푸틴이 “내 맘에 들면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걸 다 해 주겠다”라고 진술했다고 적혀있었다. 다른 정보원은 이 무대 예술 지망생이 라스푸틴의 뜻에 따라주고 난 후 그는 그녀를 곧바로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쫓아내었다고 진술했다.
라스푸틴이 청탁을 위해 자신을 방문한 여성들과 때때로 성관계를 가졌지만 누가 먼저 유혹했는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라스푸틴에게 이 문제를 뒤집어 씌울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유태인 등 부자들에게 금전을 대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선해 주었다는 자료도 포함되었다. 물론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이나 부유한 남자들이 보통으로 저지르는 정도의 일탈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황후와 라스푸틴과의 친밀한 관계는 제정 러시아의 존립에 위협적일 만큼 큰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심지어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의 황후와 성적 관계를 갖고 농락했다는 유언비어도 퍼졌지만 <적폐조사위원회>는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확인했다.
라스푸틴에게 음탕한 강간범, 색광, 황후를 범한 자, 성스럽게 보이는 악마 등등 모든 악행을 덮어씌웠는데 이들 거의 대부분 과장 또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국정농단의 주범, 제국의 배신자, 독일간첩 등등 모든 나쁜 죄를 범했다고 왜곡 유포됐는데 이는 궁전 내의 왕후 반대파, 주전론자(主戰論者), 자유주의자, 과격 사회 혁명가, 볼셰비키에 의해 정략적 목적에서 유포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로마노프 왕조의 모든 적폐와 비리는 결국 라스푸틴의 잘못으로 귀착되었는데 라진스키 박사는 이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라스푸틴이야말로 속죄양이라는 뜻으로 이제부터라도 라스푸틴에 대한 그동안의 비난을 중지하고 그가 잘한 것은 잘한 것,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복권 무대에 올려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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