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플라스틱

조물주가 빼먹은 물질, 플라스틱(4)

Que sais 2020. 10. 9. 13:25

 

youtu.be/WqfeXr3W8EA

<중단없는 플라스틱 등장>

베이클랜드의 성공은 또 다시 수많은 화학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사람이 플라스틱으로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합성 고중합체를 만들기에 전념하였다.

1932년에 스웰로우는 화학반응에 미치는 초고압 효과를 연구하였는데 흥미 있는 생성물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에틸렌과 벤즈알데히드의 반응을 시험하였는데 실험이 끝나자 용기의 벽에 매우 긴 사슬을 갖고 있는 백색 왁스와 같은 고체가 발견되었다. 스웰로우는 그 이유를 찾던 끝에 압축기의 균열을 통해 들어온 산소가 촉매작용으로 에틸렌을 중합시켜 폴리에틸렌을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고체가 에틸렌의 폴리머인 폴리에틸렌(오늘날의 저밀도 폴리에틸렌)으로 폴리에스테르와 폴리아미드(polyamide, 아미드 결합(-CONH-)을 포함한 화합물)의 성질을 갖고 있었다.

폴리에틸렌(폴리텐)은 전기 절연성이 있고 방수성이 있으며 물에 뜰 정도로 매우 가벼워 마침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용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 초기에 지상 및 기상탑재 레이더 장치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고주파용 절연케이블에 폴리에틸렌이 사용된 것이다. 특히 폴리에틸렌은 그때까지 불가능했던 안테나의 다양한 디자인을 가능하게 했고 간단하게 보수 공사를 할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폴리에틸렌이 때마침 개발되지 않았다면 영국은 독일군의 폭격에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폴리에틸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폴리에틸렌 제법이 공개되자마자 폭발적인 수요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필름 생산이 급속하게 증가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폴리에틸렌이 셀로판을 대신하게 되었다. 또한 폴리에틸렌은 농작물과 냉동식품이나 부패되기 쉬운 식품과 섬유 제품 그리고 기타 모든 종류의 상품 포장에 이용되었다. 농업에서 비닐하우스, 웅덩이나 수로의 바닥 깔개에 이용되는 것은 물론 건축용으로 습기차단, 만능 시트, 도장용 피복으로도 사용되며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쓰레기봉투 등에도 이용된다. 물론 아직도 전선의 절연체로서 폴리에틸렌이 사용된다.

 

한편 학자들은 또 다른 중합체를 발견하는데 주력을 하면서도 이들 중합체 자체에 대한 원리를 캐고자 했다. 여기에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스타우딩거(Hermann Staudinger, 1881 1965)이다. 스타우딩거는 1903년에 할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26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임용된 후, 1940년부터 화학연구소 연구실장, 1951년부터 1956년까지 고분자화학주립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슈타우딩거는 1920년대 초에 거대분자 이론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였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분자는 간단한 화합물의 화학결합을 되풀이하는 거대분자로 예를 들면 고무 분자의 경우 매우 많은 이소프렌의 단량체(monomer)가 고무나무 속에서 생합성으로 연결되어 거대분자이다. 그러나 후에 그의 이론은 플라스틱 제조에 이용되었고, 그로 인해 기술 및 산업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의 선구적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다수의 연구자들이 거대분자 분야에서 연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1953년 노벨 화학상은 거대분자 연구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에 대한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화학위원회틔 수상추천사를 보면 그의 연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1953년 노벨화학상 수상 추천사>

 

전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고대 그리스인들조차……라는 표현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책에서 흔한 머리말이며, 듣는 사람은 놀라운 심연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세계 최초로 원자 개념을 공식화하고 최초의 원자 개념을 창조한 아브데라의 데모크리투스를 서두로 이 연설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의 의미는 약 1800년이 되어서야 모든 원소는 서로 같은 원자들의 특이한 형태를 갖는다고 가정한 영국인 돌턴에 의해서 더 근사하게 정의되었습니다. 화합물을 형성할 때, 둘 또는 더 많은 종류의 원소들로 이루어진 많은 원자들이 화학결합으로 서로 연결되어, 이탈리아인 아보가드로가 분자라는 이름을 붙인 입자를 형성합니다.

지난 세기 후반부에 독일인 케쿨레와 네덜란드인 반트 호프의 연구를 통해서 분자구조의 중요한 원리에 관한 인식이 축적되었습니다. 원자의 상대적인 위치도 어느 정도 결정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단순한 또는 가지가 있는 사슬을 형성하거나 더 복잡한 구조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때는 분자와 원자 둘 다 완전히 가설의 개념이었습니다. 세기가 바뀔 때쯤 되어서야 그들의 실제 존재에 관한 정확한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크기와 질량을 결정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매우 작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리터의 물에 있는 원자의 수는 26자리 수를 갖는 숫자로 표현됩니다.

분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원자들이 결합될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 이 물질이 압축될 수 있는가와 같은 그 시대의 선도적인 과학자들이 표현한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 가끔씩은 경이로웠습니다. 분자 내에서 원자들이 화학결합으로 서로 붙어 있다는 사실은 화학결합 세기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데, 화학결합 세기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 외관상 매우 안정한 화합물 분자가 전기분해로 쉽게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론 화학적 힘이 고체 결정구조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100개 내지 200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들이 단계적으로 합성되었고 사실 놀랄 만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1920년대 초에 슈타우딩거 교수는 분자가 매우 클 수 있으며, 사실 거의 임의적으로 커질 수 있어서, 1만 또는 10만 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분자가 매우 쉽게, 때로는 명백히 자발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콜로이드 용액의 입자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형태의 실제 분자라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의 논지를 재연해 보겠습니다.

유기화학에서는 좀처럼 녹지 않는 또는 불용성의 수지 또는 피치 같은 물질이 예상했던 생성물 대신에 얻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가끔 이러한 형태의 변화가 분명한 이유 없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징후는 어떤 방식으로든 분자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생성물들을 보통 고분자 또는 고분자 물질이라고 명명했으나 많은 이유로 이 현상을 물리적인 것으로 여기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2개 또는 3개와 같이 몇 개의 분자들이 결합해서 고리구조를 갖는 큰 분자를 만들게 되는 많은 이유가 알려져 있었습니다.

슈타우딩거 교수는 원래 고리 형성반응을 기대하였으나 기하학적 이유로 방해를 받을 때, 다시 말해서 원자 사슬의 끝을 만나기가 어려울 경우에 고분자 물질이 생성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슬 끝은 다른 분자와 결합해야 하고 그 분자는 차례로 새로운 분자와 결합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 과정은 어떤 외부 환경, 아마도 그 물질이 고갈되었다거나 하는 환경에 의해 방해를 받을 때까지 사슬은 계속해서 자랍니다. 그래서 고분자 물질은 이러한 방식으로 생성된 사슬로 구성되어 있다고 표현됩니다. 금방 인용한 고리분자가 보통의 화학결합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사슬의 경우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논지는 오늘날에는 완전히 명백하지만 1920년대 초에는 매우 이상했으며 주기율 정신에 부분적으로 반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 10년은 논쟁으로 채워졌습니다. 결정적 증거나 반대 증거를 찾는 것은 이론적으로 매우 어렵고 실질적으로 무척 수고스러웠습니다. 당분간 여기에 포함된 크기의 분자량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은 화학결합의 세기에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화합물 개념을 포함한 개념들과 정의들을 수정해야 했고, 분자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카테고리의 화합물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고분자화합물은 보통 패턴에 따라 만들어진 사슬분자로 이루어지며 가끔은 특징적인 평균 길이를 갖지만 각 사슬의 길이는 임의의 환경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새로운 이론은 1930년대까지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거대분자 이론은 이미 기술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하고 거대한 분자를 이용해서 오늘날 보통 플라스틱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조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분리된 생성물이 전에도 있었으나 이제 연구를 위한 이론적 원리가 다양한 요구에 따라 그 물질의 성질을 바꾸는, 거의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적용 가능해졌고, 그래서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이 분야에 많은 성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이러한 발전이 현대 물질문화에 큰 자취를 남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플라스틱 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또한 순수과학을 위해서도 거대분자 이론은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거대분자를 활발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슈타우딩거 교수는 기술적이거나 산업적 발전에 직접 관계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활기차고 대범한 선구적 연구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발전은 거의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슈타우딩거 교수님.

30년 전에 교수님은 화합물 분자가 거의 임의의 크기이며, 그러한 거대분자는 우리들의 세상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교수님의 견해는 논리적 추론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기대했던 고리형성 반응이 어떤 이유로 실패했을 때 고분자라고 불리는 물질이 생성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유기화학자라면 무시할 수 없는 논지를 제공했습니다. 더군다나 광범위하고 고통스런 일련의 연구를 통해서 교수님은 실험적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동료들이 교수님의 견해에 반대했고, 견해 가운데 일부는 아브데라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했던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고분자 세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지속되고 확립된 개념이 고쳐지거나 새로운 개념이 창조되어야 했습니다. 거대분자 과학의 발전은 평화로운 전원 풍경 같은 그림을 보여 주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충돌은 사라지고 논쟁은 잠잠해졌습니다. 주요 쟁점에 관한 동의가 이루어지고 이 선구적인 일의 중요성이 점점 더 명백해졌습니다. 자연과학, 그리고 고분자화합물 분야에서 교수님의 발견으로 가능해진 재료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교수님에게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과학원을 대신해서 축하를 드리며, 이제 전하로부터 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플라스틱과 같은 물질이 수 만개의 분자 단위가 결합된 엄청난 크기의 분자라는 고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지만 초창기에 많은 학자들로부터 그렇게 큰 분자가 어디 있느냐고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합성 고무에 관심이 깊은 칼 엥그러 밑에서 천연 고무의 단일체인 이소프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소플랜의 중합 반응 연구를 계속했고 폴리옥시미틸렌과 천연고무 그리고 폴리스틸렌의 고분자 합성의 연구를 시작했다. 스타우딩거는 천연고무는 긴 고리 분자로 존재하고 콜로이드 모양의 크기의 고분자가 공유 결합되기 위한 조건을 발표했다. 그는 계속하여 동족의 짧은 고리 분자에서 고중합체까지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성질을 연구하여 후학들의 다음 연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중합체에 관한 고분자 화학 연구로 1953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고분자론이 옳음을 증명했다.

 

1953년에 독일의 칼 지글러(Karl Ziegler, 1898 1973)는 니켈이나 다른 여러 가지 금속 또는 금속화합물이 에틸렌의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1923년에 마르크부르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10년간 강의한후 1936년에 할레 대학교의 교수 및 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시카고 대학교의 객원교수가 되기도 하였으며 1963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니켈과 마찬가지로 에틸렌의 중합을 저해하는 금속도 몇 가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떤 종류의 금속염화물과 유기 알루미늄화합물을 조합하면 매우 유효한 종합 촉매가 되어 거대한 고분자량과 고용융점 그리고 직선형 분자구조의 폴리에틸렌이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결과 전보다 단단하고 강하며 물에 끓는 온도에서도 견디는 고밀도 폴리에틸렌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생산한 폴리에틸렌은 품질이 다소 떨어져 상업적인 면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훌라후프였다. 당시에 로큰롤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를 뒤흔들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싶어했다. 질이 다소 떨어지지만 훌라후프라는 둥근 고리는 엉덩이를 흔드는 기술을 익히는 데는 적격이었다. 1958년 한 해에 매일 2만 개의 훌라후프가 팔렸다니 그 광풍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기술이 개발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초기 제품에서 보여 진 문제점이 해결되자 고밀도 폴리에틸렌의 용도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자동 접시 닦기 기계에 의해서도 변형되지 않는 컵이나 기타의 식기용 재료는 고밀도 폴리에틸렌으로 만든 것이다.

 

폴리에틸렌은 돼지 사육자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좁은 우리에 갇혀 사육될 때 돼지들은 서로 괴롭히는 경향이 있었다. 서로의 꼬리를 물어 잡아당기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감염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돼지 사육자들이 종종 돼지우리에 고무 타이어나 볼링공을 놓아 돼지들의 관심을 돌리곤 했다. 사육업자들의 아이디어는 효과를 보아 돼지들이 이런 장난감들을 밀고 당기고 굴리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했다. 이로 인해 몸무게가 증가하고 적당한 근육이 발달되어 육질도 좋아졌다. 그런데 값싼 폴리에틸렌이 개발되자 사육자들은 보다 효율적인 돼지 장난감을 만들었다. 공 모양으로 만들어진 고밀도 폴리에틸렌 돼지 장난감은 물을 채워 부풀릴 수 있었다. 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돼지는 매우 청결한 동물이다. 이런 공은 물로도 쉽게 닦여 쉽게 더러워지지도 않고 값싼 가격으로 크기를 조절할 수도 있었다. 여하튼 현재 우리의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제품 중 고밀도 폴리에틸렌이 상당수 차지하고 있어 이들이 없다면 현대 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