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원자력

원자력발전소의 사고(2) : 체르노빌

Que sais 2020. 10. 1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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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 사고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방사능에 대한 세계인의 우려를 한꺼번에 노출 시킨 것은 구소련의 체르노빌(Chernobyl) 원전 사고이다. 1986426일 토요일 새벽 1시경 체르노빌에서 세계를 경악케 하는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체르노빌 원전단지는 지리적으로는 우크라이나공화국 수도 키에프 북방 90킬로미터, 벨라루스공화국과의 접경지역으로서, 곡창 우크라이나 평원 중앙부에 흑해로 흘러드는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프리피야트 강변에 위치한다. 드네프르강은 키에프 수원지를 구성하는 지역의 핵심 수자원이다. 사고 원자로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로 체르노빌원전 근무자를 위한 신흥계획도시 프리피야트(인구 49,000여명)가 위치했으며 체르노빌 원전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체르노빌시를 비롯하여 발전소를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 내의 총인구는 약 12만 명이었다.

사고 당시 4기의 RBMK형 원전이 가동 중이었고 2기의 WWER형이 건설초기 단계에 있었다. 사고원전은 RBMK형 제4호기로서 1983년에 완공된 열출력 3200MW, 전기출력 1000MW이었다. RBMK-1000은 소련 고유설계의 흑연감속, 압력관형 비등형원자로로서 2%의 저농축 우라늄 연료(U235)를 사용하며 당시 구소련 내에서 16기가 가동되고 있었다.

이 원자로는 일반적인 원자로인 경수로와는 달리 물이 아니라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고 증기발생기가 없다. 노심의 크기는 지름이 약 14미터 높이가 약 7미터인데 각각의 연료관은 핵연료봉과 냉각수가 흐를 수 있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료관 속에서 핵분열이 일어나고 그 열로 물이 뜨거워져 증기를 생성하므로 연료관은 하나하나가 작은 원자로라고 할 수 있다. 핵분열의 제어는 211개에 달하는 제어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어봉은 전자석에 붙어 있으므로 정전이 되면 중력으로 인해 밑으로 자동적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RBMK-1000은 정상 운영되는 고출력에서는 별 문제가 없으나 최대출력의 20%(열출력 640MW)보다 낮은 출력에서는 원자로가 불안정하게 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또 하나의 결함은 원자로 긴급정지(scram)를 위한 제어봉의 삽입시간이 20초 정도로 서방형 가압경수로의 1초에 비해 매우 늦어 출력의 급증시 긴급대응이 어렵다는 점이다.

원래 발전 당국은 소외전원 상실 후 디젤발전기에 의한 비상전원 공급개시까지 시간동안 터빈의 관성회전이 비상장비 및 노심냉각수 순환펌프를 기동시키는 데 충분한 전력을 제공할 수 있는 가를 실험할 계획이었다. 한마디로 실험 중에 폭발사고가 일어나 방사능이 방출된 것이다.

RBMK-1000에서 물은 경수로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작용을 한다. 경수로에서는 물이 감속재 작용을 하기 때문에 물이 있어야 연쇄반응이 일어나고 물이 빠져나가면 연쇄반응은 중단된다. 반면 RBMK에서는 흑연이 감속재 작용을 하기 때문에 물은 오히려 중성자를 흡수하여 연쇄반응을 제어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노심을 흐르는 물의 양이 많아지면 연쇄반응이 줄어들어 출력이 떨어진다.

실험 계획에 의하면 열출력 1000MW 정도로 운전하다 원자로를 정지하고 계획된 실험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운전원의 운전미숙으로 인해 열출력 30MW 정도까지  떨어지자 운전원은 열출력을 700~1000MW까지 올리기 위해 수동으로 제어봉을 조정하면서 제어봉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규범에는 적어도 30개의 제어봉이 항상 원자로 심내에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용을 잘 모르는 직원이 제어봉을 단지 6〜8개만 남기고 모두 빼낸 것이다.

이 상태에서 사전에 입력된 실험이 시작되었다. 즉 원자로가 정지 상태로 되면서 외부전원 대신 터빈의 관성회전에 의한 전력이 원자로의 계통에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저출력으로 운전되던 터빈 관성에 의한 전력은 충분하지 못했고 따라서 냉각수 펌프회전이 줄어 냉각수 유량이 감소하자 냉각수 온도가 상승하면서 증기생성에 의해 정기포계수의 작용으로 원자로 출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확대된 것은 제어봉 구동속도가 늦어 운전원조차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시내 한복판에서 브레이크를 떼어낸 채 자동차의 고속 주행 실험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추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운전원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교대 근무 및 수면 부족으로 인한 판단 착오였다고 한다. 수면부족이 큰 원인이었다는 것은 스리마일 아일랜드와 유사하다.

발열의 급격한 증가로 핵연료가 파손되자 고온의 핵연료가 물과 반응하여 발열함으로써 이를 더욱 악화시켜 20초 후에 원자로심을 파괴하는 증기폭발을 일으켰으며, 2, 3초 후에 제2폭발이 뒤따랐다. 처음 폭발은 증기폭발이었고 두 번 째 폭발에서 수소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 두 차례의 폭발로 4호기 노심은 물론 1,000여 톤에 달하는 원자로 건물의 지붕까지 파괴시키자 고온․고방사능의 핵연료와 흑연 파편이 공중 1킬로미터까지 치솟으면서 공중으로 비산하였다. 체르노빌 원자로는 한국의 원전과는 달리 중성자를 감속시키기 위해 많은 양의 흑연이 들어있는데 이들 서로 간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폭발로 인해 치솟은 것 중 무거운 것은 인근에 낙하하였으나 불활성기체를 포함하는 가벼운 성분들은 바람을 타고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이어서 4호기 원자로의 남은 노심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타 올랐고 터빈 건물 지붕 등에 발생한 화재는 방사성 물질의 방출을 증가시키면서 이를 1,500미터 고공으로 끌어올려 피해를 원거리까지 확대시켰다. 이 당시 누출된 방사능량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보다 400배 많은 수치로 방사능 낙진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수만 평방킬로미터 안에 살던 100만 명의 주민 가운데 3분의 1이 자기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였다.

 

<구소련 붕괴의 주역>

체르노빌 원전의 여파는 구소련이 붕괴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고가 일어난 후 정부의 안일한 대처와 사고를 은폐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원자로가 통제 불능 상태로 불에 타고 있는 동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방사능 물질의 70퍼센트가 벨로루시로 이동해 국토의 약 25퍼센트를 오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소련 당국은 오염지역 주민들에게 곧바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당시 사고는 한밤중에 일어났는데 사고를 목격한 산 증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지상 최대의 불꽃놀이였지요. 거대한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고 또 작은 불꽃들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졌지요. 이내 지상의 이곳저곳에서 불꽃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체르노빌 원전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체르노빌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잠든 한밤중의 이 불꽃놀이는 관객도 없는 지상최대의 원자력발전소 사고였다. 그런데 발전소 고위층이나 국가위원회에서는 이 재난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앞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추궁이 두려워 처음에는 원자로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래 원전에서 사고가 생긴 초기부터 원전 사고에 준하는 철저한 비상대책에 따라 수습대책을 가동시켜야함에도 원전사고 자체를 묵살하였기 때문에 방사선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화재진압 등 일반적인 사고 복구 활동이 가동되었다.

사고 상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일 급한 일은 눈에 보이는 불을 끄는 일이었다. 사고가 발생하자마자 발전소의 소방대원들이 긴급 출동하였는데 이들은 방사성 물질이 있는 시설의 소방작업에 대해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불을 끄는 일에만 충실했다. 국가위원회에서 군대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아침 6시 30분 경 다행히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원자로 내부에 있는 흑연에 붙은 불을 끄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다. 수많은 물을 퍼부었는데도 허사로 돌아갔는데 후에 이 물들이 원자로에 들어가지 않고 옆 건물로 넘쳐들어가 오히려 방사성 물질을 여기저기로 퍼뜨리는 주범이 되었다. 할수없이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원자로 상부에 모래, 납, 보론 등을 떨어뜨려 원자로 무덤을 만들었다.

공군 헬기의 작업으로 5월 6일부터 원자로에서 방사성 물질의 유출량이 급격히 줄었고 5월 10일에 원자로 무덤 작전은 종료되었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가 새벽에 일어났다는 점은 방사성 유출에 관한 한 상당히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원래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는 방사선 비상 사고가 발생되면 주민들이 취하는 일차적인 행동은 건물 등의 옥내대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소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인근 도시의 주민들이 모두 집안에서 잠들어 있었으므로 자연적인 옥내대피가 되어 주민들이 받은 방사선량이 상당히 적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당국이 체르노빌 사고를 쉬쉬했으므로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더욱이 날씨가 매우 좋아 프리피야트시에서 16쌍의 결혼식이 치러졌고 축구시합이 열렸으며 유원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방사선에 피폭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당국에서도 사고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밤 10시에 프리피야트 주민 45,000명에 대한 대피 명령이 떨어졌고 인근 지역에 대한 방사선 조사의 결과에 따라 안전한 대피 경로가 선정되었다. 다행한 것은 프리피야트 시민의 대피가 단 3시간에 질서정연하게 완료되었다는 점이다. 추후 소련 사회체제의 위력을 보여주었다는 자찬이 일어나기도 했다. 체르노빌 사건의 진상이 보다 정확하게 알려지자 5월 3일까지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의 주민들이 대피되었고 5월 7일까지 반경 30킬로미터 이내의 186개소 주민 11만6천 명 모두 이주시켰다.

위에 설명된 내용을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부는 체르노빌 폭파사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에야 사고 사실을 방송으로 알리면서 전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그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버스 1만 1000대가 도착했고 오후 5시가 되자 도시는 텅 비었다. 사고 직후 며칠간 소위 ‘사후처리반’인 여러 직종의 작업반 수천 명이 ‘방사능 지옥’의 진화작업에 투입되었다. 석탄 광부들은 활활 타고 있는 노심 밑을 파고 액체질소를 주입하여 핵연료를 냉각시켰다. 헬기 조종사들을 불길을 잡기 위해 납, 모래, 진흙 등 5000톤을 공중 투하했다. 3,400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정확한 간격을 두고 지붕으로 올라가 원자로에서 나오는 연기 나는 흑연조각들을 다시 노심 안으로 퍼 넣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평생 동안 흡수할 방사선량을 몇 초 만에 흡수했음은 물론이다.

파괴된 원자로의 화재는 사건이 생긴지 10일 후인 5월 6일 마침내 진압되었다. 곧바로 철강-콘크리트 관으로 된 석관을 4호 원자로 내부에 설치했으며 핵폐기물은 체르노빌 인근에 있는 수백 곳의 매립장에 모두 처리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 내역은 발표를 주도하는 단체나 기관에 따라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라 어느 내용이 타당성이 있는지 가늠하기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특히 일부 발표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런 자료일수록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받아들인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사망자가 6000〜8000명에 이르며 또 이때 생긴 방사능 영향으로 수많은 후유증 환자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자료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상당히 많은 곳에서 인용하는데 당시 체르노빌 사고 방사능 오염 정화 책임자였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게오르기 고토프치츠 장관이 사고 6주년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는다.

 

‘사실은 이 사고로 6천〜8천 명이 숨지고 특히 정화작업에 관계한 비상 복구반 대원들의 경우 같은 연령층의 사람보다 3〜5배의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다.’

 

이 내용은 담당 장관의 발언이라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체르노빌 사태를 면밀히 분석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제스처이거나 개인적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이후 그의 설명은 더 이상 신빙할 수 없는데다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비중 때문에 체르노빌 사고의 부정적인 영향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후 발표되는 공식적 자료들을 위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어느 자료를 신뢰성 있는 발표로 믿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이곳에서는 그 어느 기관보다 자료의 엄밀성과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는 유네스코 자료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발표를 토대로 설명한다.

2000년 유엔방사선영향과학위원회(UNSCEAR)의 보고에 의하면 체르노빌 당국은 발전소 직원, 소방대원, 긴급 작업자 등 다량 피폭 우려자 499명을 후송하여 검진했다. 검사 결과 237명에게서 급성방사선증후군(ARS)이 진단되었으나 나중에 정확한 임상분석 결과 134명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급성방사선증후군를 보인 사람 중 1986년 즉 사고 당해에 28명이 사망했고 1987~2004년 사이 추가로 19명이 사망했다.

또한 1995년까지 갑상선암 환자 중 10명 정도가 사망하여 체르노빌 사고가 직접 원인이 된 사망자 수의 공식통계는 초기 사망자 31명(1명 실종, 폭발사고 후 진화 중 1 명 사망 포함)을 합쳐 40명 정도였고 2006년에는 사망자가 56명으로 발표되었다. 반면에 사고 처리반에 속하지 않은 일반 주민들 중에는 급성 방사선 증후를 나타낼 만큼 높은 전신피폭을 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1986년 5~6월 벨라루스 지역에서 조사된 11,600명 중에도 급성 방사선 장해자는 없었다고 발표되었다.

체르노빌 방사능 누출 사고는 초유의 일이었으므로 전 세계의 많은 의사들이 가장 촉각을 크게 세운 것은 초창기에 사고 처리에 투입되었던 사람들의 백혈구 수가 감소한다는 보고였다. 이 내용만 보면 그들 모두 치명적인 후유증을 앓을 것으로 예측했다. 즉 백혈병의 경우 370만 명의 오염지역 거주민과 초기 2년간 정화작업자 20만 명 중 각각 200명 정도의 백혈병 환자가 사고 후 10년 동안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학자들도 놀랄 만큼 대부분의 피폭자들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백혈병에 대한 역학조사도 체르노빌사고로 인한 방사선 피폭과 실제 백혈병 발생빈도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했으며 실제 역학조사 결과는 기저 발병률에 머무르고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방사능 누출 사고로 인한 백혈병의 증가는 인지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었다. 한마디로 아동 갑상선암을 제외한 다른 암의 현격한 증가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오염이 심한 벨라루스 고멜 지역의 사망률이 지난 10년간 9/1000에서 13/1000으로 증가했고 출생률은 17/1000에서 12/1000 정도로 감소했다는 통계가 벨라루스 국가보고서에 제시되었지만 이 역시 방사선영향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판단이다. 특히 2005년 9월 <체르노빌 포럼>은 체르노빌 사건에 따른 실제적인 피해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발표했다.

이들의 발표는 그동안 수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을 안겨주었다. 체르노빌에서 방사능이 누출된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출산율이 줄어들지 않았으며 선천적 기형아 출산이나 임신합병증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체르노빌에서 인명피해가 50여명도 되지 못한다는 것은 원전사고가 생각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재난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때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