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에디슨과 테슬라

발명왕 에디슨과 테슬라의 혈투(1)

Que sais 2020. 10. 1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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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인류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을 한 발명왕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vity Disorder)'를 갖고 있는 치료하기 어려운 문제아로 간주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이 위인전에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로 호기심이 왕성한 에디슨이상한 행동이 많았고 집단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시험이 오면 당황하고 공부를 시키려고 해도 어쩔 수 없으므로 학교 교육제도가 비교적 잘 정비된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이런 아이들은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에디슨은 주위의 어른들을 붙잡고 ?’라는 질문을 연발해서 납득할 수 있는 답이 얻어질 때까지 계속 질문하여 어른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그러나 에디슨이 다른 귀찮게 구는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의문 나는 것을 가만 놔두지 않고 곧바로 실험해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면에서는 에디슨을 따라오지 못한다. 물론 다 빈치에디슨보다 400이나 앞섰던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비교는 어리석은 일이다.

불이 왜 붙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어린 에디슨이 헛간에 불을 붙였다가 헛간을 모두 태우고 말았다. 에디슨에게 관대한 아버지였지만 이때만은 엉덩이가 터지도록 매 맞았다고 했다. 현대라면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방화범으로 구속되지 않았을지 걱정된다.

다리가 어떻게 사람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작은 개천에 다리를 만들고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는지를 시도하기 위해 그 위에 올랐다가 다리를 부수면서 개천에 떨어졌다. 병아리달걀을 따뜻하게 하면 부화한다는 사실을 알고 밥도 먹지 않고 양계장에서 달걀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전설 아닌 전설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다른 아이들과 다름을 일찍 간파했다. 에디슨이 관찰력이 뛰어나고, 또 무엇인가를 만들 때는 대단한 집중력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장점을 인식했으므로 자신의 아들이 놀림과 손가락질을 당해도 항상 에디슨을 감싸주었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의 부모라도 에디슨과 같은 자질을 알았다면 감싸주었을 것이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ADHD 아동들이 정서불안으로 감정이 급변하지만 대단히 뛰어난 특수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하며 이런 아이들을 주의 깊게 지도하라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면 아주 높은 집중력과 능력을 발휘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디슨노벨상에 강력한 후보자로 추천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전등을 발명하여 밤을 낮으로 만들어 준 에디슨이야말로 노벨상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그런데 에디슨쌍벽을 이루는 또 다른 발명가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와 원수와 같은 처지였는데 노벨상위원회에서 테슬라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여하겠다는 내용이 유포되었다.

비밀 위주가 기본인 노벨상 위원회의 기밀 누설테슬라는 자신이 에디슨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로 거론되자 공동 수상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912노벨상은 또 다른 발명가 달렌(Nils Gustaf Dalen)에게 돌아갔고 더 이상 노벨상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문제는 달렌의 노벨상이다. 그의 노벨상 수상조명 표지등과 부표(light buoy) 등에 쓰이는 기체 완충 장치연결해서 이용할 수 있는 자동 조절 장치 발명인데 그것은 간단히 말하여 등대에서 사용하는 조명등 개발한 것이다.

달렌의 노벨상 수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계속 일어나자 결국 발명 또는 공학자들이 노벨상 수상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학자들은 노벨상위원회의 이런 생각은 계속 견지되어 1979하운스필드(Sir Godfrey N. Hounsfield)CT스캐너 개발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을 때 비로소 공학부분에서 노벨상수여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여하튼 노벨상의 취하는 천하의 발명가인 에디슨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힌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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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

전기가 만든 마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밤을 낮으로 만든 것이다. 요즈음도 벼락 등 천재지변에 의해 갑자기 정전이라도 되면 온통 암흑천지가 되며 수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의 사용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 비상 전원 시설이 없는 공장에서는 기계 가동이 중단되어 생산에 차질을 초래한다. 정전 시간이 길어지면 암흑을 틈탄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실제로 몇 년 전에 뉴욕시 전체가 몇 시간 동안 갑자기 정전이 되자 수많은 상점들이 폭도들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전기가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은 해가 진 후 장작불, 횃불, 기름등잔 또는 촛불로 어둠을 극복했다. 이런 방식으로 불을 켜면 불편한 일이 많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화재의 위험성이 항상 따랐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대도시의 거리에 등장한 고래 기름을 사용하는 등이다. 고래 기름을 사용한 등은 급속히 보급되어 가로등은 물론 가정에서도 사용되었다. 자연스럽게 등에 사용하는 연료인 고래 기름에 대한 수요가 급등했고 고래를 잡기 위해 포경선이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허만 메일백경이라는 소설은 바로 이 가로등으로 소비되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출어한 포경선과 모비딕이라는 흰 고래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고래 기름 역시 문제점은 있었다. 소기름에 비해 빛 효율이 훨씬 뛰어났고 냄새가 적었지만 기름이 엎질러져 화재가 발생할 위험은 여전했다. 런던의 대화재도 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18세기 초반스코틀랜드의 발명가 머독가스등을 고안했다. 머독은 파이프를 통해 불이 켜지는 곳으로 석탄가스를 보내 가스등의 화구에서 석탄가스가 나오면서 타게 만들었다. 가스등은 곧바로 가로등, 공장, 가정을 파고들면서 고래 기름 등을 대체했다. 대도시의 밤이 가스등으로 밝혀지자 범죄율이 감소하고 시민들의 안전이 증대되는 등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명장치도 화재의 위험성이 따르므로 보다 안전한 조명 장치의 개발이 필요했다. 1802영국의 데이비(Sir Humphry Davy)볼타(Count Alessandro Volta)가 개발한 전지를 실험하다가 2가닥의 철심 끝에 각각 목탄 조각을 붙인 후 서로 가까이 대면서 전기를 계속적으로 흐르게 하면 방전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전선을 타고 흐르던 전자들이 탄소라는 소재를 거치면서 저항 때문에 빛과 열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는 1806유리관을 씌운 아크 전등을 발명했고 2년 뒤에 가로등으로 만들어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바로 아크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전극의 양쪽에 붙여 놓은 탄소가 열 때문에 곧 타버려 매일 전극을 갈아주어야 했고 불빛도 너무 강렬한데다 전기의 가격이 비싸 실용화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류 사상 최고의 발명가라는 에디슨이 등장한다. 에디슨84에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1,100여 개의 발명을 했다. 4중 전신기, 전화기, 축음기, 활동사진기 등을 발명하여 사실상 20세기의 문을 연 장본인으로도 일컬어진다.

 

<왕고집 에디슨>

에디슨1847211 오하이오 주 마일렌에서 태어났다. 그가 학교를 단 3개월, 7개월 혹은 1년만 다녔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여하튼 그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르는 무엇에도 흥미를 보인 에디슨에게 특히 흥미를 불러일으킨 책은 자연실험철학이었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골머리 아프게 생각하겠지만 이 책은 전기분해나 열전도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실험을 다루고 구체적으로 실험에 관한 삽화가 있는 등 현재로 보면 참고서였다. 에디슨은 이 책에 나와있는 모든 실험을 직접 해 보려고 했다. 그는 집의 지하실 구석에 실험실을 차리고 전기나 화학에 관계되는 실험에 몰두했다. 물론 실험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므로 12 때부터 그랜드 트랭크 철도의 기차의 급사가 되었고 기차 안에서 신문팔이도 겸했다.

15이 되자 전보교환원 조수가 되었으며 기차 안에 들여놓은 인쇄기로 그랜드 트랭크 헤럴드(주간)을 직접 발행했다. 이 신문은 세계 최초의 차내 신문이었다. 물론 철도회사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회사의 허가를 얻었다. 신문 판매가 순조로워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자 화물차의 빈 공간화학실험실까지 만들었다.

기차 안에 실험실을 차린 것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운 나쁘게도 열차가 급커브를 돌 때 생긴 원심력으로 인해 실험 장치가 엎어지면서 불이 나고 말았다. 열차는 급정지했고 다행히 불을 끌 수 있었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실험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던 승무원이 에디슨귀중한 실험 도구를 모두 열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때 승무원으로부터 주먹으로 오른쪽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되어 난청이 되었다고 알려진다(실제로는 중이염 등 병 때문으로 추측). 이유야 어떻든 에디슨은 후에 중요한 모임에서는 난청인 귀를 안 보이게 하려고 반대쪽 귀를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한다.

웬만하면 이 정도에서 좌절할 만한데 에디슨은 그야 말로 왕고집이었다. 소위 자신만큼 발명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몰이해하는 사람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을 하지 않겠다고 하던 중에 에디슨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다. 철로 위를 걸어가던 마운트클레멘스 역역장맥킨지두 살 난 아들을 달려오는 열차로부터 구해낸다.

이 당시에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전신 기술이었다. 철로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전신망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신 기술은 누가 보다 빠른 정보를 얻느냐로 금전적 희비가 엇갈려 정보가 늦은 회사를 순식간에 파국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등 마법의 기술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전신기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전문직이므로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통 서부극 영화에서 모르스 부호를 치고 있는 전신 기사들이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신 기사들은 서부극에서 항상 깨끗하게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하튼 아들의 구출에 감명 받은 맥킨지에디슨에게 전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초등학교도 단 3개월에 중퇴한 에디슨이 놀랍게도 전신기사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가 많은 전문가들을 제치고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숙련된 많은 전신 기사들이 남북 전쟁에 소집된 이유도 있지만 그는 남보다 빨리 전신 내용을 보낼 수 있는 기계를 이미 고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제일의 전신기사 타이틀에디슨의 신화가 일어날 서막을 알려주는 징조에 불과했다.

 

<에디슨의 발명 비결>

에디슨전신기사로 근무할 때, 당시로 보면 첨단 전문서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영국의 물리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가 저술한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를 접했다. 이 책은 그에게 가장 약점으로 작용하는 수학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책에 나오는 실험을 거의 전부 직접 실험해 본다.

그러나 끊임없이 상상력이 발동되는 에디슨 같은 사람에게 전신 기사 일은 따분하기만 했다. 발명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그는 좀 더 넓은 활동 분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바로 발명에 투신한 것이다.

그가 첫 번째 특허를 얻은 것은 1869전기투표 기록기이다. 투표기 자체는 나무랄바 없었지만 의회에서 투표가 빨리 이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므로 그의 최초의 특허는 실패로 끝났다. 이때부터 에디슨은 발명이란 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발명을 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두 번째 특허주식상장 표시기였는데 남북전쟁 직후 투기의 붐을 타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고 1871 에디슨은 16세의 메리 스틸웰과 결혼했고 가정도 함께 옮긴다

그 후 각가지 발명품을 팔아 1876 뉴저지 주의 멘로파크에 거대한 응용과학연구소를 세웠다. 에디슨은 연구소에 기계공, 화학자, 모형제작자20여 명의 전문 인력을 고용하고 발명 기구, 각종 화학 재료, 증기 엔진은 물론 자료실까지 구비하여 세계 최초의 기술개발센터(테크노센터)로 개인적 차원이 아닌 조직적 차원에서의 발명에 착수했다.

에디슨 연구소는 한마디로 발명 공장이었다. 에디슨아이디어를 내면 세밀한 부분을 연구원들이 나누어 분업적으로 개발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으로 번 재산을 아낌없이 연구소에 재투자했다. 에디슨의 연구소에서는 발명이나 특허5일에 한 건, 4년에 300건 정도의 속도로 양산되었다. 열흘에 하나 정도우수한 발명품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실용성이 있었다. 이처럼 상상을 넘는 성과를 이뤄낸 그에게 천재 발명가라는 별칭은 매우 걸맞은 이름이었다. 이 연구소에서 에디슨의 최대 발명 중에 하나가 전술한 탄소 필라멘트 백열전등이다.

에디슨의 발명 방법뭐든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였다.

오늘날에는 사전에 방침을 정하고 그 계획에 따라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한 다음 샘플을 제작한다. 컴퓨터를 사용할 경우 시뮬레이션으로 결과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나의 발명이 우연한 다른 발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므로 에디슨은 생각나는 대로 직접 실연했다. 효율성은 그야말로 뒷전이었다. 이런 방법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랜 시간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에디슨의 전설 중에 하나는 하루 20시간 이상 연구에 몰두했으며 은 많아야 4시간 정도였다는 것이다. 한 직원의 이야기는 에디슨이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벌레인 에디슨이 건강을 돌보지 않았음에도 그는 84까지나 살았음을 볼 때 그는 건강조차 특별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치 나뭇가지와 같이 하나의 발명을 통하여 다른 발명을 계속 연구하는 종합적인 기술 개발원칙으로 했으므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만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기존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종합적인 개발에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사용했다. 특허권으로 분쟁이 벌어질 때 자신이 불리하면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에디슨에게 따라다니는 가장 유명한 말은 천재란 90%의 노력과 10%의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이다. 어떤 강연에서는 좀 더 과장하여 ‘99%의 노력과 1%의 직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노력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대단한 노력이란 대부분 배고픔과 피곤함이 따른다. 중도에서 포기하면 되지만 그 어려움을 넘어서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 에디슨과 같은 사람도 노력을 일상화했다는 것을 볼 때 보통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지만 일반 사람들이 90% 노력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디슨의 실험해 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 미국이 소위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는 유럽을 따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술 개발에는 헛수고가 따르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헛수고를 많이 한 상태에서 새로운 신기술이 예상외로 나타날 수 있다. 에디슨도 수없는 실패를 했지만 헛다리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하는 의지에디슨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