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에디슨과 테슬라

발명왕 에디슨과 테슬라의 혈투(4)

Que sais 2020. 10. 1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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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 효과>

에디슨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은 그의 발명품 때문만은 아니다.

에디슨전등의 밝기증대시키기 위해 탄화시킨 대나무 필라멘트를 실험하고 있을 때였다. 대나무 필라멘트에 있는 탄소는 아주 높은 전압으로 열을 받자 증발하여 전등 안쪽의 유리벽에 거무스름한 침전물이 전등 안에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에디슨탄소 분자들이 전기 작용으로 필라멘트로부터 유리 전등 표면으로 전도된다고 추리했다.

이 때 에디슨탄소 검댕 속에 필라멘트 고리의 가장자리와 나란히 뚜렷한 줄무늬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탄소 원자들은 필라멘트 고리의 한쪽에서 밀려나왔고, 그 고리의 다른 쪽에는 흰 그림자가 생겼다.

발명가로서 이 기이한 현상을 놓칠리 없었다. 1883 진공관에서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실험에 몰두했다. 에디슨필라멘트 노릇을 하던 머리핀같이 생긴 탄소 고리의 두 끝 사이에다 금속판 하나를 갖다 놓고 그 판에 백금으로 만든 도선을 연결했다. 전등직류를 공급하고 계기를 금속판과 필라멘트의 도입 전극에 연결하면 계기는 강한 전류를 나타냈지만, 금속판과 배출 전극에 연결하면 그 계기는 아무런 전류도 나타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유명한 에디슨 효과. 전선없이 전기가 흐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에디슨은 자신이 과학사적으로 엄청난 발견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이한 현상을 증명하는 특별한 램프를 만들어 특허를 획득하곤 곧바로 다른 일에 몰두했다.

이때 에디슨이 약간의 열린 마음 즉 교류전류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그는 엄청난 발견을 했을 것이다. 즉 그가 AC 전압철사나 평판 전극에 접속시켰다면 그는 전류가 절반 동안만 즉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고 쌍방향 AC단방향 DC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AC에 대한 혐오 때문에 그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에 1884 영국 우편국의 수석엔지니어인 윌리엄 프리스필라델피아 국제전자박람회에서 에디슨의 전등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긴 금속판 전극을 지닌 전등 하나를 구입했다. 프리스는 그 전등을 실험한 후 뜨거운 필라멘트로부터 음전하된 입자분출되는 현상을 에디슨 효과라고 붙였다. 이때 에디슨전기회사 자문역인 존 암브로스 플레밍(Sir John Ambrose Fleming)교류 전압필라멘트에 가해질 때에도 전류가 흐르며, 전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전류는 더 이상 교류가 아니라 이미 직류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이 몇 년 뒤 전공관 라디오의 발명으로 이어졌으며 근대 전자공학의 문을 열도록 유도했다. 플레밍에디슨의 발견을 면밀히 추적한 공로로 조지 5세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암브로스 경이 되었다. 한편 영국의 물리학자 리처드슨(Sir Owen Willans Richardson)1900년에서 1903년 사이에 실험을 통하여 에디슨 효과진공 상태에서 자유 전자의 발생과 이동으로 생겨난 현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공로로 리처드슨1928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효과가 20세기에 들어서 라디오, 소리 증폭, TV, 전파 탐지기에서 사용되는 등 많은 전기 기구들의 기초를 이룬다.

 

에디슨이 자신의 발견에 큰 주목을 하지 않고 신기한 현상으로만 간주첫 번 째 이유청력이 약해서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1920년대라디오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에도 에디슨은 그것이 그저 지나가는 유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초창기 라디오의 소리는 쉭쉭거리고 잡음이 많았으며 음질이 좋지 않아서 에디슨처럼 청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좋지 않게 들렸다.

그러므로 라디오, TV 등 현대 문명의 근간이 되는 에디슨 효과를 발견하고서도 자신이 직접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 한 관심을 접었다. 혹자는 에디슨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론 규명을 누구보다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에디슨테슬라와의 개인 감정 때문에 노벨상을 놓쳤고 비정한 사람이라고 사망할 때까지 매도되었다. 더구나 그의 잘 나가는 회사는 GE에 인수된 후였다.

에디슨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밤을 낮으로 변모시킨 전등의 발명이다. 그러나 에디슨의 전구백열전구는 발명된 지 120여년 만에 고에너지 낭비의 주범으로 지구상에서 근간 퇴출될 전망이다. 이에 가장 앞선 나라는 호주. 호주는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오는 2010까지 에너지 낭비가 심한 백열전구를 에너지 효율이 높은 형광등으로 모두 교체하겠다고 발표했다. 호주는 호주 전역에서 백열전구완전히 퇴치시킨다면 2012까지 총 400t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뉴질랜드 정부도 호주의 경우를 모델로 삼아 백열전구 퇴치를 동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이 백열전구가 경원시 당하는 것은 백열전구가 형광등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월씬 낮은 것은 물론 수명도 짧아 에너지 낭비의 주범으로 지적되기 때문이다. 백열전구를 에너지 효율이 좋은 형광등으로 바꿀 경우 전기 소비량80% 이상 줄어든다.

 

<경제성이 없는 영화>

에디슨의 발명품 중에 영화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에디슨축음기에 이어 오락 문화에 대 혁신을 불러 올 새로운 연구에 몰두한다. 바로 영화였다. 영화는 영상의 지속(잔상)이라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으로 일련의 정지된 사진을 빠르게 돌리면 마치 연속적인 동작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 연구는 매우 빨라 1880년대에 이미 동료인 윌리엄 케네디 딕슨(W.K.L. Dickson)과 함께 24,000달러라는 거금을 투입하여 활동사진 촬영기와 영사기 개발에 착수했다.

원래 영화의 시작사진기가 발명되기 전(1839)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30년대 유럽에서는 마법의 원반응접실용 장난감으로 유행했다. 정지된 원반에 뚫린 좁은 틈을 통해 또 하나의 돌아가는 원반을 보면 원반의 주위에 그려진 조그만 그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이나 마법의 등불(정교한 광선상자)을 이용해 그림을 스크린 위에 투사하는 개량된 형태도 등장했다.

1860년대 필라델피아의 콜먼 셀러스사진과 마법의 원반을 결합하면 연속적인 동작을 볼 수 있다는데 착안했다. 그는 두 아들이 못을 박는 모습을 연속동작으로 찍은 6장의 사진바퀴모형으로 돌려 사람이 실제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10 필라델피아의 헨리 헤일은 두 남녀가 월츠를 추는 모습을 한 장 한 장 연속동작으로 찍어서 이를 스크린 위에 투사하여 춤추는 모습을 재현했다. 또한 에드워드 제임스 뮤브리지는 동물과 사람의 연속동작을 사진에 담기 위해 24대나 되는 카메라를 사용했다. 1882에 프랑스의 발명가 에띠엔 마리는 장총의 개머리판과 방아쇠를 고속셔터와 연결시킨 한 대의 사진총을 사용하여 새들이 나는 모습을 회전원통에 감긴 인화지에 담을 수 있었다.

1888년 뮤브리지는 자기가 발명한 동물생태관찰기를 가지고 에디슨을 만났다. 뮤브리지의 발명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우리지 않던 에디슨은 우연한 기회에 눈을 위한 축음기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나 연주자의 음악을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축음기가 더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9 그는 조수 딕슨과 함께 코닥사를 만든 조지 이스트맨이 발명한 15미터짜리 신축성 셀룰로이드 필름을 감을 수 있는 스프로킷(사진기의 필름을 감는 톱니바퀴)개발했다. 셔터 한 번 누르면 1초에 48이나 닫혔다 열렸다 하며 놀라운 속도로 필름이 돌아가는 카메라다. 이때 영화사상 최초의 배우가 등장한다. 프레드 오트(Fred Ott). 프레드 오트에디슨 실험실에서 잡일을 하던 일꾼인데 1889 마침 일하면서 재채기를 했는데 그것이 에디슨의 카메라에 우연히 촬영되어 최초의 영사 슬라이드기록된 것이다. 그가 깜짝 놀랄 정도로 재체기하는 장면은 추후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오트는 돈도 벌지 못했고 사인해달라고 팬들에 둘러싸인 적도 없지만 그가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디슨은 스크린에 영사하는 방식의 영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발명가로서의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금전적인 이득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활동사진영사기라고 하는 동전투입식의 개인용 뷰어가 크게 성공하리라 생각했고 어느 정도 재미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활동사진을 계속 개발하여 1891발명특허를 낸 키네토스코프는 뒤에 잇따라 등장하는 모든 활동사진장치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특히 그는 35밀리미터짜리 필름을 사용했는데 그 이후 이 필름의 폭은 국제표준규격이 되었다. 그런데 키네토스코프와 축음기를 동시에 작동시켜 동작과 음을 일치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국제특허를 내는 데 추가로 드는 비용 150달러 마저 아깝다고 특허제출을 포기했다. 이것이 다른 나라 발명가들이 에디슨의 방식을 본떠 유사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였다.

물론 그는 축음기와 영화를 연결시키는 것은 포기했지만 키네토스코프 자체는 활용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권투시합에서 촌극에 이르기까지 단편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낮 동안의 일사량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 다소 부족했다. 그는 죄수호송차를 가리키는 속어인 블랙 마리아라는 검은색 건물을 건설하여 영화 사상 최초의 스튜디오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더욱 많은 빛을 얻기 위해 지붕은 개폐식으로 되었고 건물 자체를 회전시킬 수도 있었다. 블랙 마리아에서의 촬영은 계속되었고 때때로 야외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의 발명품은 부와 행운을 낳는 거위로 18944 첫 번째 키네토스코프 전문점이 뉴욕에서 선을 보인 후 급속하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의 키네토스코프를 설치한 오락실은 미국과 유럽에 불길처럼 보급되었다. 5센트짜리 동전만 내면 조그맣게 뚤린 들여다보는 구멍을 통해 실제와 똑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15초 동안 볼 수 있었다. 리더스다이제스트를 보면 당시에 에디슨연구소의 직원 프레드 오트가 재채기하는 모습을 찍은 필름은 큰 인기였다고 적었다.

여하튼 에디슨이 특허를 포기했을 때 프랑스에서 리용 출신의 뤼미에르(Lumiere) 형제는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의 필름에 담긴 영상을 큰 스크린에 투사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그들이 만든 영사기는 매우 가벼웠고 소형인데다 에디슨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그의 발명품은 양쪽에 구멍이 뚫린 필름이라는 개념을 빌려오기는 했다. 그러나 에디슨의 필름 측면에는 네모난 구멍이 네 개 있는 데 비해, 뤼미에르의 필름에는 동그란 구멍이 양쪽에 하나씩 있었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필름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고 필름이 멈추는 순간과 셔터가 열리는 순간을 일치시켜 확대된 영상을 스크린 위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189512 파리 까쀠신사 14번지에 있는 지하실을 빌려 의자 100개를 놓고 요금을 내고 들어온 관중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영화사에서 이날 즉 18951228영화가 탄생한 날로 간주한다. 유럽에서 자신이 발명한 키네토그래프의 원리를 이용하여 뤼미에르 형제가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곧바로 바이터스코프라는 영사기를 개발한다.

바이터스코프18964월 뉴욕의 코스터앤드비알음악당에서 미국의 일반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것은 에디슨도 예상치 못할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기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프로그램에는 멋진 금발머리 아가씨들이 춤추는 모습과 익살스러운 권투시합, 노한 파도가 들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놀랍도록 사실적이며 기막히게 재미있었다.’

 

영화가 급속도로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를 놀라게 한 파리 국제 박람회가 열린 점도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는 에펠탑에 거대한 스크린을 매달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려고 계획했으나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자 박람회장 안에다 매우 작은 스크린을 설치했다. 이 작은 스크린도 가로 21미터, 세로 18미터에 달했다.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박람회는 6개월이나 계속되었는데 326회의 무료시사회를 통해 영화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영화오락은 반발에 부딪친다. 여성들이 권투 시합을 찍은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서자 곧바로 도덕성 시비를 일으켰다. 상반신을 벗은 남자들이 서로 치고받는 권투 경기여성들이 보는 것이 품위 있는 행동인가 하는 이의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영화 장치는 다소 복잡한 면이 있으므로 시장 진입에 실패하고 영화 산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반면에 일부 영화제작자들은 연극을 필름에 담은 영화들이 다른 어떤 형태의 오락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자 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특히 따뜻한 햇빛과 값이 싼 땅이 많은 LA지역으로 영화제작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현재의 영화의 메카인 헐리우드의 모태가 되었다. 1920년경에 이미 헐리우드 최대의 스튜디오칼 라에믈레(Carl Laemmle)의 유니버설시티는 매년 250편의 연속물, 단편, 뉴스 영화, 저비용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영화에서는 실패했지만 그의 연구는 계속되어 X, 전차 엔진, 비행 기계 등에 관심을 쏟았고 축전지 개발에도 손을 댄다. 그의 마지막 연구과제미국 내에서 고무의 원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 그에 따른 국제적인 무역 질서의 붕괴는 산업 기자재의 원료를 외국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20세기를 주름 잡을 자동차 산업에서 필수품인 타이어의 재료고무의 확보는 미국으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친구인 자동차의 왕헨리 포드재정 지원을 받아 고무를 생산하는 식물에 대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고무와 관련된 일을 했고 일부 식물에서 고무의 원료가 될 고순도의 원료를 산출해 내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러나 고무에 대한 외국의 독점은 사실이 아니었고 고무의 가격이 떨어지자 그의 마지막 연구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791926에 비로소 공식적인 업무에서 은퇴했다.

1929 친구인 헨리 포드빛의 50주년을 개최하여 그가 밤을 낮으로 만든 공로를 기렸지만 그의 건강은 매우 나빠져 식장에서 준비된 짧은 원고를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에디슨1931101884의 나이로 뉴저지 주의 웨스트오렌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021 글렌몬트에서 열린 장례식 때, 후버 대통령은 고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조의를 표하자고 제의했다. 그 날 밤 10전국의 모든 전등소등하자는 것이다.

에디슨이 남긴 수 많은 업적, 그와 떼어놓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들, 백열전등, 전신기, 축음기, 전화기와 발전기, 키네토그래프는 그를 살아있는 전설로 만들었다. 그는 살아 생전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그러했다.

오늘날 하이테크라 불리는 먼로파크 연구소에디슨이 시도한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의 조악한 작업장과 현대 기업들의 연구 개발 부서를 연결하는 과도기의 핵심적인 인물로도 큰 역할을 했다. 에디슨이야말로 과학적 지식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인간의 생활을 보다 풍족하게 만드는데 기여한 공헌자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