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놓친 비운의 천재들/에디슨과 테슬라

발명왕 에디슨과 테슬라의 혈투(3)

Que sais 2020. 10. 1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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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와 손잡은 웨스팅하우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전등을 더욱 개량하여 수명을 늘리는 데 주력하는 한편 전기의 공급에 필요한 송전선, 소켓, 스위치, 퓨즈 등의 부품을 개발했다. 그는 백열전구를 보급시키기 위한 송전사업을 전담할 뉴욕중앙발전소건설했다. 200마력의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두목 부인이라는 이름의 점보 발전기를 설치하고 직류 송전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전구 400, 1년 후에는 10,000개 분량으로 확대하여 가스등완전히 대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디슨직류송전에는 큰 결점이 있었다. 전기에는 직류와 교류가 있는데 보내려는 전력은 어느 것이나 똑 같았다. 그러나 에디슨전류의 송전110V의 직류를 사용했기 때문에 낮은 전압과 전선의 저항에 의한 손실, 발전소에서 23마일 정도밖에 송전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소규모 도시에는 하나의 발전소로 가능하지만 대형 도시일 경우 직류발전소를 수없이 건설해야했다. 테슬라가 강조한 것이 이 점으로 교류를 사용하면 송전 때문에 발전소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여하튼 테슬라와 손잡고 에디슨을 꼭 격파하겠다는 웨스팅하우스도 보통사람은 아니다.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앞선 생각을 갖고 있는 탁월한 사업가였다. 에디슨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웨스팅하우스는 남다른 발명과 경영 능력을 겸비한 거물로, 철도용 에어브레이크의 발명으로 큰 부를 이룬 사람이다.

웨스팅하우스의 성공은 그야말로 신화라 할 수 있다. 그도 에디슨처럼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고 기술을 배웠지만 발명에 남다른 일가견이 있었다. 웨스팅하우스1882자동식 철도 신호기를 만들었고, 1886웨스팅하우스 전기 회사를 세우고 라디오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100여 개나 되는 특허를 갖고 있는 당대의 발명가이자 부호였다.

1865년 회전식 증기엔진으로 첫 번째 특허를 받았다. 이 엔진은 실용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추후에 이 원리를 이용하여 수량계 개발성공했다. 같은 해 웨스팅하우스탈선된 화물차량철로로 되돌려 놓는 장치를 발명했다. 그의 나이 20가 채 안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웨스팅하우스21가 되는 1867년 어느 날 선행하던 기차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사고처리가 끝날 때까지 뒤의 기차에서 무한정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발명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자질을 갖고 있던 그는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앞에 서 있는 기차의 문제점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기관사들이 전방에 있는 위험물을 발견하더라도 전 차량을 동시에 멈출 방법이 없었다. 기관사가 호각을 불면 그것을 신호로 각 차량의 담당자가 수동브레이크를 잡아당겨 속도를 늦춰야 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각 차량 담당자의 행동 시간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열차 전체를 재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세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긴급 정차를 하게 되면 차량의 탈선 등 큰 사고로 이어졌는데 바로 웨스팅하우스의 앞에서 달리던 기차가 그런 경우였다.

 

웨스팅하우스열차 차량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수동 제어장치를 장착하면 기차의 제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동력이었다. 증기의 힘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전 차량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증기 제어장치를 장착하면 위급 상황시 곧바로 제동시킬 수 있음을 떠올렸다. 그는 곧 실험 장치를 만들어 실험했으나 예상처럼 작동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잡지에서 알프스 몽스니산의 터널공기 드릴뚫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수천 미터의 파이프를 통해 터널 속에 보내진 압착공기드릴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는 이 방법을 기차의 브레이크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압착공기를 모든 차량에 보내고 기관차에 설치한 레버를 움직여 동시에 전 차량의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원리는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같았으나 압착공기가 좀 더 효율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어브레이크 설계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투자자에게 설득시키냐라는 문제가 남았다. 그는 우선 에어브레이크의 원리뉴욕 센트럴철도 회장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17941877)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철도의 왕은 단숨에 그의 설명을 잘랐다.

 

기차를 바람으로 세운다고? 나는 바보 녀석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그러나 바보는 웨스팅하우스가 아니라 밴더빌트였다.

웨스팅하우스가 끈질기게 철도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다닌 끝에 이윽고 미국 전역과 전 세계의 철도에 그의 아이디어가 채용되었다. 1893에 제정된 철도 안전장치 규정미국의 모든 열차에 의무적으로 에어브레이크를 장치하도록 했다. 밴더빌트도 결국 자신의 전 열차에 그의 아이디어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웨스팅하우스의 투자 요청을 거부한 대가로 수백 배나 더 큰 비용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테슬라와 손잡은 웨스팅하우스>

당대의 갑부가 된 웨스팅하우스는 또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린다. 전기의 장래성이 유망하다고 본 것이다. 특히 당대 발명계를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가 양분하고 있었는데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에디슨이 자신을 앞선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에디슨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전류송전 논쟁이 벌어지자 에디슨이 고집하고 있는 직류에 문제점이 있음을 알았다.

발명에 남다른 일가견이 있는 웨스팅하우스송전 과정에서 중간 손실이 큰 직류 방식변압기를 통해 교류 송전방식을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뒤, 승부수를 던졌다. 직류가 아닌 교류송전방식으로 채택하여 에디슨을 공격하자는 것이다.

웨스팅하우스에디슨에게 펀치를 먹일 준비를 했지만 문제는 변압기였다. 그런데 마침 에디슨과 알력을 빚고 뛰쳐나와 독자적인 회사를 만든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변압기와 교류전동기를 개발하고 에디슨에게 강타를 먹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테슬라의 변압기 관련 특허를 사들이고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에디슨 공격에 나서자고 했다. 발전소에서 송전할 때에는 전압을 높여 중간의 손실을 줄이고, 수신소에서는 전압을 낮추어 수신함으로써 일반 가정에서는 안전한 낮은 전압을 쓰도록 하는 오늘날과 같은 송전방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더불어 웨스팅하우스사는 독일인으로 교류 이론창시한 수학자 겸 기술자스타인메츠고용하여 이론을 정비했다. 스타인메츠는 이론으로 교류홍보하고 테슬라는 기술적으로 교류의 모든 필요 장비를 담당하며 웨스팅하우스는 이에 따른 자금을 공급한다는 구도다.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는 의기투합하여 에디슨을 공격하는데 앞장서기로 했는데 이들의 목표는 같았다. 에디슨이 전등으로 가스등 사업을 말살시킨 것과 똑같은 일을 해주자는 것으로 한마디로 직류를 고집하는 에디슨에게 강펀치를 먹여 다시는 자신들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에디슨의 사업체를 문 닫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에디슨의 방어는 생각보다 강했다. 그는 전구를 개발하여 이를 사업에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시스템, 발전소전선모터 등을 직접 개발하여 한마디로 거대한 전기 제국건설하고 있었다. 사실 당대의 슈퍼 천재이자 자본가인 에디슨과 대결한다는 것은 자동차 중소기업미국의 디트로이트에서 GM과 대결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잘 알려진 직류와 교류에 대해서 간단하게 집고 넘어간다.

직류(+)(-)을 가진 전기로 건전지, 휴대전화 전지, 자동차 전지 등에서 사용된다. 반면에 벽에 있는 콘센트교류로 (+)(-)극의 구분이 없어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어는 쪽으로 꽂아도 전기가 흐른다. 현재 가정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기는 모두 교류.

그런데 전기라면 기본적으로 (+)(-)이 있어야한다. 사실 교류도 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성이 계속 바뀌기 때문극성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160(+)(-)가 바뀌며 유럽1초에 50번 바뀐다. 그러므로 유럽의 가전제품을 구입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려면 한국의 전기에 맞는 제품을 구입해야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직류발전기(90%) 교류발전기(70%)에 비해 효율이 높다. 그런데 직류 송전시스템을 놓고 보면 직류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직류는 전압을 올리거나 내리는 것이 어려우므로 발전소에서 전송하는 전압도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압과 같아야 한다(110볼트). 그런데 송전하려는 전력 차원에서만 본다면 송전 중에 열에 의한 손실이 관건이다. 열 손실은 송전하는 전류의 제곱비례하여 증가하는데 전압을 높일 수 없는 직류에서는(전력=전압x전류) 전류가 크지 않으면 안 되므로 필연적으로 열 손실이 커진다.

두꺼운 구리 도선을 사용하면 전력 손실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이럴 경우 값비싼 구리 값 때문에 경제적으로 손해가 많이 생긴다. 결국 유일한 방법은 전기 전송할 수 있는 지역을 제한하는 것으로 직류를 공급하려면 발전소를 중심으로 대략 반경 0.5킬로미터가 적정이다. 직류 발전소를 도심 곳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반면에 교류를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없다. 교류변압기(transformer)를 사용하여 전압을 높였다 낮추었다 할 수 있으므로 1만 볼트로 송전하고 변압기를 사용해서 110볼트로 낮추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디슨직류 송전 방식송전 사업 자체를 두고 볼 때 치명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이를 테슬라가 직류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데 에디슨의 반격은 송전 효율이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송전의 효율을 갖고 공격적으로 나서자 에디슨도 이에 반격해 나섰다.

에디슨웨스팅하우스처럼 직류에 대한 전문가를 찾았는데 그는 에디슨의 친구 브라운이다. 브라운교류 송전 방식이 근본적으로 위험하다고 적극적인 선전 공세를 펼쳤다. 특히 브라운은 근본적으로 교류낮은 전압에서도 직류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고압선에서 매년 수십 명의 사람과 말이 감전사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솔깃해했다. 직류송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류는 기본적으로 인체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의 문제에서 벗어나 당대의 기업계, 학계에서도 교류가 좋은가, 아니면 직류가 좋으냐로 상당한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해럴드 브라운에디슨 측의 실험에 나서 개가 1,000볼트 직류 전기에서는 살아남지만 교류 전기로는 300볼트에서도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류전기 측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개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자 브라운은 사람 크기의 송아지와 말을 이용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반격을 가했다. 브라운은 전압 때문에 감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류가 원래 위험하기 때문에 감전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했고 모든 도시에서 300볼트 이상의 고압선불법화할 것을 요구했다. 에디슨은 연구소에 기자, 시민, 학계 인사들을 초청한 후 개, 고양이들을 고압의 교류 전류로 태워 죽여 시민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웨스팅하우스에서 교류 전기가 직류 전기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계속 주장하자 브라운웨스팅하우스에게 전기를 이용한 결투를 신청했다. 브라운의 몸에 직류, 웨스팅하우스의 몸에 교류 전기를 통하게 하자 어느 한쪽이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전압을 서서히 올리자는 제안이다. 웨스팅하우스가 그 결투를 거절했다.

이때 마침 뉴욕주교수형을 대신할 인도적인 사형집행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에디슨 교류가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웨스팅하우스로 하여금 사형 집행기제작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그 실험은 오히려 전류 전쟁에서 교류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교류흘린 전기의자로도 사형수를 단번에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1886년 뉴욕 버팔로미국 최초의 성공적인 교류 시스템을 개설한 후 1년 뒤에 30개 이상의 동급 발전소를 남부와 서부에서 가동했다. 1887년 말에는 거의 135천 개의 전구에 전기를 공급하면서 에디슨의 직류 시장잠식하기 시작했고 1893년 시카고의 만국박람회에서 25만개의 전등을 켜는 계획에서 에디슨 진영을 제치고 낙찰을 받았다. 또한 나이아가라 폭포세계 최초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웨스팅하우스사가 맡아서 성공시켰다. 이런 일련의 진행으로 결국 직류와 교류 전쟁에서 종지부를 찍으며 교류가 승리하고 오늘날 전 세계의 가정 곳곳에 교류 전류가 송전되고 있는 이유이다.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송전 전투에디슨의 완전히 패배로 끝났다. 당대 최고의 발명가도 송전 전투에서 패배하여 큰 손실을 입고 자신이 경영하던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기업 사냥꾼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에게 넘겨야 했다. 회사 이름에서도 에디슨의 이름이 빠진다. 이 회사가 이후 세계 최대의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하는 GE(제너럴 일렉트릭)이다. 물론 당시 에디슨GE의 주식 5퍼센트를 받았지만 이를 곧바로 팔아버렸다. 만약 에디슨의 후손들이 그 주식을 지금까지 갖고 있다면 약 15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이다.

이와 같은 전력 때문에 에디슨과 테슬라는 원수와 같은 처지였는데 노벨상위원회에서 테슬라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여하겠다는 내용을 유포되자 테슬라에디슨과는 노벨상을 공동으로 받지 않겠다하여 결국 노벨상은 두 사람에게 영원히 수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