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om/playlist?list=PLWrH-17DCY3GfHip2JJaMR3ytQGPlFqnt
석유는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을 결정적으로 바꾸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조명용 원료로는 1등품의 고래기름, 2등품 식물성 기름, 3등품의 송진 추출유 등이 있었다. 고래기름은 질이 좋았지만 무차별 포획으로 고래의 개체수가 줄어들어 포경선이 먼 바다까지 나가야 했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쌌다. 식물성 유지는 품질이 낮았고, 송진 추출유도 가격은 저렴했으나 그을음이 심하고 폭발성이 강해 자주 폭발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바로 이런 등유 시장의 틈새를 석유가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다. 석유는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해가 지면 곧바로 잠자리에 들던 사람들이 값싼 등유 램프 덕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참고적으로 석유 재벌 록펠러가 회사명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로 지은 것도 엄격한 품질 관리로 생산되는 ’표준 등유‘를 판매한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등유는 가격으로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 우위를 보였다. 석유로 만든 등유가 나오기 전 일반 도시 가정은 매월 거의 10달러씩 도시가스 사용료를 지불했지만 석유 등유는 연간 평균 10달러에 불과했다.
석유산업이 성장하면서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석유의 수송이었다. 처음에는 원유를 맥주 통에 모아서 철도역까지 운반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1865년에는 최초의 송유관이 부설되었으며, 그것은 유전지대에서 철도역까지 약 10킬로미터를 연결하고 있었다. 1870년대 이후에는 통 대신에 탱크 화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이 화차는 비축 탱크를 이용해 석유를 비우거나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석유가 당시 주요 에너지원이었던 석탄보다 부피도 작고 무게는 가벼우면서도 더 많은 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석탄은 부피가 큰 고체 덩어리여서 고운 가루로 만들더라도 액체인 석유보다는 밀도가 낮았다. 따라서 보관 장소도 많이 차지했고 다루기도 번거로운 데다 운반도 불편했다. 더구나 석탄 가루를 온 천지에 뿌려 인근을 시커멓게 만들었다.
석유의 에너지 밀도는 석탄보다 약 50퍼센트 높다. 게다가 액체여서 철도나 선박, 송유관 등을 통해 저장과 수송이 보다 간편했다. 더욱이 중유나 휘발유가 내연기관에 사용될 수 있게 되자 석유의 수요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폐기물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1862년 프랑스 기술자 에티엔 느누아르(Etienne Lenoir, 1822∼1900)가 석탄가스로 작동하는 내연기관을 선보인데 이어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A. Otto, 1832∼1`891)가 1867년 휘발유로 움직이는 내연기관을 발명함에 따라 원유의 용도는 등유에서 휘발유까지 영역을 넓혔다. 결정적으로 카를 벤츠(Karl Benz, 1844∼1929)가 1886년 선보인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의 등장은 석유의 가치를 더욱 높이자 석유는 공전의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발전한다.
당시에 석유산업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석유 왕’으로 불리는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였다. 록펠러는 폴섬 상업대학을 졸업한 후 곡물 중개상의 회계 일을 담당하다가 1863년부터 석유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석유산업의 성공 여부가 철도회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며, 1870년에 클리블랜드 지역의 철도회사와 원유수송에 대한 할인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에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후 할인계약을 미끼로 삼아 다른 정유회사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록펠러는 탱크 화차의 소유권을 독점하고 송유관 회사들을 매입하는 데에도 열을 올렸다. 1881년에는 스탠더드 오일이 철도와 독립적으로 가능한 최초의 송유관을 부설하였고, 다음 해에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발족되어 이사회가 각 주에 소재한 기업들을 관리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를 통해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는 미국에서 유통되는 석유의 약 95%를 장악할 수 있었다.
석유 산업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석유 재벌로 당대 최고의 부자인 존 D. 록펠러의 재산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억만장자가 된 것은 그의 나이 74세 때인 1913년이다. 물론 그는 그 뒤 24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당시 존 제이콥 에스터의 재산이 5,000만 달러, 코머도어 밴더빌트가 1억 달러, 유명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4억 50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합해도 록펠러에 비하면 형편없는 숫자였다.
록펠러의 재산이 얼마였나는 2006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부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당시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을 2006년 화폐가치로 환산한 순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530억 달러,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460억 달러였다. 그런데 록펠러는 2위인 빌 게이츠보다 몇 배나 많은 3,053억 달러의 재산을 가졌다.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재산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자 록펠러는 매우 특이한 자선행동을 벌린다. 홍보 책임자인 아이비 레드베터 리(Ivy Ledbetter Lee)의 권고에 따라 아이들에게 5센트짜리 백동화, 어른들에게는 10센트짜리 은화를 거저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자 그는 대규모 자선 사업을 벌였다. 록펠러가 살아 있을 당시에 그의 막대한 재산에 힘입어 많은 자선단체가 설립되었는데 그가 죽음을 앞두고 기부한 자금이 5억 달러나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석유가 얼마나 많은 황금알을 낳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석유산업은 자동차산업과 함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2005년을 기준으로 매출액 기준 세계 10대 기업 중에 석유업체 4개와 자동차업체 4개가 포진했을 정도이다. BP(British Petroleum), 엑슨 모빌, 로열 더치 쉘, 토탈, 제너럴모터스, 다임러크라이슬러, 도요타, 포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인류 사회는 석유 가격의 상승으로 큰 곤혹을 치렀다. 이를 계기로 석유 생산량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미 1956년에 허버트(M. King Hubbert)가 예언했던 석유정점(peak oil)이 가시화되는 듯했다. 석유정점은 2006년 구글 검색어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에 대한 논의가 다소 수그러든 상황이다.
석유는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라 재생이 불가능한 에너지다. 석유 위기에 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뿐이다.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자동차의 왕 포드>
20세기 초만 해도 증기 자동차, 전기 자동차, 가솔린 자동차가 3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솔린 자동차가 승리한 결정적인 계기는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대중용 자동차 시장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대중용 자동차인 모델 T는 1908년에 출시된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미국 사회는 1920년대에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돌입했다.
“누가 자동차를 발명했는가?”에 대한 간단한 정답은 없다.
왜냐하면 자동차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복잡한 기술시스템이며, 고정된 기술시스템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를 겪어온 기술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개발은 19세기 후반에 소규모 동력기관이 요구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중소기업가들이나 발명가들은 대규모 증기기관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작은 공간을 차지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이 용이한 엔진을 모색하였다. 또한 철도가 거미줄처럼 확산되면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근거리 운송수단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19세기 말에는 소형 증기기관, 전기모터, 가솔린기관 등과 같은 다양한 엔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였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가솔린 자동차가 다른 경쟁 상대를 능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1900년에 4,192대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는데, 그 중에서 1,681대는 증기 자동차였고 1,575대는 전기 자동차였으며 나머지 936대만이 가솔린 자동차였다. 증기 자동차가 40.1%, 전기 자동차가 37.6%를 차지했던 반면, 가솔린 자동차는 22.3%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3가지 자동차 중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예측 불가능이었다.
20세기 초까지 가장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것은 증기 자동차였다. 당시의 증기기관은 이전의 것과는 달리 규모도 작아졌고, 출력도 향상되었으며, 강철 부속으로 정밀하게 제작되었다. 증기 자동차는 구입비와 유지비가 매우 낮았으며, 엔진이 강력하여 어떤 도로 조건에서도 운행될 수 있었다. 특히 스탠리 증기 자동차는 1899년에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오르는 최초의 자동차가 되었으며, 1906년에는 플로리다 자동차 경주에서 시속 205km라는 대단한 속도를 선보였다.
그러나 증기 자동차에도 몇몇 약점이 있었다. 증기 자동차는 보일러, 증기기관, 연료, 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무거운 기계였다. 또한 증기가 대기로 증발하면 다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30마일마다 증기 자동차에 물을 다시 공급해야 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시동을 걸기 위해서 증기를 발생시키는 데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었다. 비록 보일러가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증기 발생 시간이 지속적으로 단축되긴 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전기 자동차는 소음과 냄새가 없었으며, 매우 안락하고 깨끗하였다. 더구나 전기 자동차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운전이 편리하고 유지와 정비가 쉬웠다. 이와 함께 전기가 가진 현대적 이미지 덕분에 전기 자동차는 대중의 기대 면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전기 자동차는 속도가 느렸으며,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 없었고, 구입비와 운행비가 만만치 않았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충전의 문제였다. 납과 산으로 이루어진 무거운 배터리는 약 30마일마다 다시 충전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전기 자동차는 장거리 운행에 적합하지 않았고, 주로 대도시 지역의 백화점이나 세탁소가 배달 서비스를 위해 사용하였다.
초기의 가솔린 자동차는 한마디로 ‘불편한’ 기계였다. 가솔린 자동차는 속도조절장치, 냉각장치, 밸브장치, 기화장치 등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고장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유지와 정비도 쉽지 않았다. 특히 가솔린 자동차를 가동시키려면 정교한 손동작과 근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선호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가솔린 자동차는 증기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언덕을 오를 수 있었고, 증기 자동차보다 효율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도로를 주행할 수 있었다. 가솔린 자동차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일단 시동을 걸기만 하면 연료의 추가적인 공급 없이도 70마일을 달릴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솔린 자동차가 3파전을 평정한 이유는 다소 생소롭다. 흥미롭게도 많은 기술사학자들은 ‘모험 지향성’을 골자로 하는 당시의 자동차 스포츠 문화로 돌린다. 폭발음과 함께 거칠게 돌진하는 가솔린 자동차는 얌전하게 운행되는 전기 자동차나 신사다운 소리를 가진 증기 자동차에 비해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가솔린 자동차 업계가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전기 자동차나 증기 자동차가 미국 동부 지역을 이미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솔린 자동차 업계는 주로 중서부의 농촌 지역을 공략했다. 농촌 지역의 사람들은 전기 자동차가 가지는 안락함이나 깨끗함에는 별다른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가솔린 자동차 업계는 증기기관이 검은 매연으로 가득한 공장 지역에 적합한 것이어서 평온한 농촌의 이미지와 상반된다는 점을 자주 강조하였다.
가솔린 자동차가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헨리 포드가 대중용 자동차 시장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포드는 모델 A, B, C, F, N, R, S, K를 설계한 후 이러한 모델들의 장점이 결집된 모델 T에 주목하였다. 그는 모델 T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수많은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이다. 최고의 재료를 쓰고 최고의 기술자를 고용하여 현대적 공학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디자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적당한 봉급을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입해서 신이 내려주신 드넓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 것이다.”
모델 T는 1908년 10월 13일에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모델 T는 무게가 1,200파운드에 불과하면서도 20마력의 강력한 힘을 가진 4기통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델 T에는 발로 조작하는 톱니바퀴식 2단 변속기가 장착되어 있어서 운전을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모델 T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작업의 세분화와 작업 공구의 특화에 입각한 대량생산 방식으로 저렴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1913년에 포드 자동차 회사는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된 조립 라인을 구축했다. 그러나 작업의 단순화는 높은 이직률로 이어졌고, 이에 대응하여 포드는 1914년에 ‘일당 5달러(Five-Dollar Day)’라는 정책을 실시했다. 당시에 모델 T의 가격은 400달러 정도였는데, 그것은 포드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던 일반 노동자의 4달치 봉급과 비슷했다. 이제 일반 노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정책을 통해 대량생산과 대중소비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결국 미국 사회는 1920년대에 들어와 풍요한 경제와 모델 T의 확산을 배경으로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다.
제2차 산업혁명은 독일과 미국의 부상을 초래했다. 독일이 제2차 산업 혁명 도중 유럽의 주요 공업국으로 부상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 독일은 산업화에서 초창기 영국에 뒤쳐졌지만 공장 등은 영국을 모방함으로써 자본과 노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진전을 이루었지만 영국은 비교적 오래된 기술을 계속 사용했다.
둘째, 화학 및 기초 연구의 발전은 독일 쪽이 영국보다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셋째, 독일은 카르텔(기업 연합)의 구조가 효율적으로 집약되어 유동 자산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70년에서 18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의 승리로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이를 철도와 같은 기반 시설에 많은 투자를 한 것도 큰 효과를 보았다. 즉 새로운 제철 기술을 사용한 교통수단을 사용하여 대형 시장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독일이 천연자원의 보고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합병하여 많은 생산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의 핵을 이루는데 이를 대변하는 것은 토마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이끄는 전기의 이용다.
전기는 밤과 낮을 사라지게 만들어 밤에도 낮과 같은 생활을 이어가게 만들었으며 작업시간을 연장시켰다. 또한 작업 공간이 확대되어 지상이나 지하 공간에서 활동이 가능해지자 작업시간의 연장과 함께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전기 사용은 다양한 전기제품 개발로 생활을 더욱 편하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생활문화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암흑세계를 밝은 세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의 증기기관 에너지는 석탄이었다. 석탄의 열효율은 일정하지 못했고 석탄공급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공간이 많이 필요한 것은 물론 공해도 만만치 않았다. 전기는 이러한 에너지 공급방식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석탄은 채굴부터 관리까지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만 전기는 소수의 인력으로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했다.
제2차 산업혁명의 중요성은 일자리의 변화에 있다. 1차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이 마부의 일자리를 바꾸었듯이 2차 산업혁명은 노동방식을 관리자 일자리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단순노동에서 기술노동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1⋅2차 산업혁명은 3⋅4차 산업혁명의 정보시대를 만드는데 촉진제가 되었다.
전기를 통한 정보혁명은 인류 생활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계기점이면서도 새로운 문화생활을 만든 원동력이다. 이동과 운송수단의 바퀴혁명이 전기로 인한 이동수단과 생산수단으로 바뀌면서 인류생활은 급속하게 변화되었다.
학자들은 1⋅2차 산업혁명을 인류의 3대 발명(불, 화폐, 바퀴) 중 하나인 바퀴혁명으로 부른다. 바퀴는 서로의 공간을 이어주는 관계를 만드는 발명이다. 전기는 낮과 밤을 이어준 생활의 바퀴와 같다. 1차 산업혁명은 마차 바퀴를 증기기관 바퀴로 바꾸었고 2차 산업혁명은 전기에너지를 통한 생활환경과 작업환경의 생산방식을 바꾸어주었다.
참고문헌 :
「파열된 조화, 붕괴된 신념」, 조준현, 인물과사상, 2010년 3월
「제2차 산업혁명」, 위키백과
『과학사의 뒷얘기 III(생물학⋅의학)』, A. 섯클리프 외, 현대과학신서, 1985
『탐욕에 관한 진실』, M. 허시 골드버그, 중앙M&B, 1997
『Basic 고교생을 위한 지리 용어사전』, 이우평, 신원문화사, 2002
『부의 역사』, 권홍우, 인물과 사상사, 2008
『가술의 역사』, 송성수, ㈜살림출판사, 2009
'넛지 4차 산업혁명 > 4차 산업혁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차 산업혁명(2) (0) | 2020.10.31 |
---|---|
3차 산업혁명(1) (0) | 2020.10.31 |
2차 산업혁명(1) (0) | 2020.10.31 |
1차 산업혁명(3) (0) | 2020.10.31 |
1차 산업혁명(2) (0) | 2020.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