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과학과 픽션>
『삼국지』에서 나관중은 적벽대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특히 적벽대전에서 공명의 역할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유비와의 연합에 반신반의했던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 대항하도록 설득했으며 조조의 수군을 화공으로 공격할 때 이에 절대 필요한 동남풍이 불도록 했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을 매우 간략하게 적었지만 이와는 달리 나관중은 적벽대전에 대해 매우 공들여 적었다. 사실상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유비가 제갈량을 초빙하는 삼고초려를 포함할 경우 그 내용이 거의 1/5에 달하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당연히 적벽대전에도 나관중이 허구로 적은 내용이 많이 삽입되어 있다. 적벽대전을 설명하려면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삼국지』를 읽은 독자가 대상이므로 『삼국지』에서 그려진 ‘적벽대전’ 자체에 대해 일일이 적는다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와 스피드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나관중이 작가적인 허구로 작성한 부분만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제일 먼저 『삼국지』는 주유가 제갈량의 능력을 볼 때 결국 손권에게 해가 될 것으로 예측하여 제갈량을 반드시 죽이려고 한다. 그 빌미로 10만개의 화살을 단 3일 만에 만들어 달라고 한다. 제갈량은 안개를 이용하여 서로 묶어놓은 20척의 배로 하여금 조조군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였고 이에 놀란 조조군에서 화살 10여만 대를 쏘았는데 이를 회수하여 주유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초선차전(草船借箭)이라 하는데 이 이야기 자체는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삼국지』가 나오기 전의 베스트셀러인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에 다음과 같이 초선차전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다.
‘주유가 장막으로 배를 씌우라고 명했다. 조조군이 쏘는 화살이 모두 배의 왼쪽에 꽂혔다. 그러자 주유는 노 젓는 사람들에게 배를 돌리라고 했다. 배가 방향을 바꾸자 이번에는 화살이 모두 배은 우측에 꽂혔다. 주유는 화살이 가득 박힌 배를 몰고 돌아왔다. 수백만 개의 화살을 얻은 주유는 “승상. 화살 고맙소”라고 외쳤다.’
나관중은 위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주인공도 제갈량으로 바꾸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있기 때문이다.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적진을 정탐하는데 조조가 화살을 쏘라고 명령했다. 조조의 궁사들이 어지러이 화살을 쏘자 손권의 배 한 쪽에 집중적으로 꽃혀 배가 기울며 전복되려고 했다. 그러자 손권이 배를 돌리라고 명령해 반대쪽을 화살을 받아 배의 균형을 잡은 후 무사히 돌아왔다.’
이것이 ‘화살을 빌린’ 이야기의 원본으로 사실은 화살을 빌리는 것이 본래 목적이 아니다. 화살은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언제부터인가 주유가 화살을 빌린 것으로 각색되더니 나관중은 아예 주인공까지 바꾸어 당초부터 화살을 빌리는 용도로 포장했다.
여하튼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화살 10만 개를 약속대로 갖고 오자 노숙이 놀라 제갈량을 과연 신인(神人)이라고 한다. 이에 제갈량은 다소 거만하게 다음과 같이 주유를 농락한다.
“장수 된 사람이 천문과 지리, 기문(奇問, 고대 미신의 술법 중에 하나로 군사(軍事) 행동의 성패와 길흉을 예측하는 일)을 모르고 음양과 진도(陳圖)를 볼 줄 모르고, 병세(兵勢)에 밝지 못하다면 용렬한 장수입니다. 나는 3일 전에 오늘 크게 안개가 낄 것을 짐작하고 주유가 열흘 동안에 10만 개 화살을 만들라고 하여 나를 죽이려 했으나 내 명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주유가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학자들은 실제로 제갈량이 볏단을 잔뜩 실은 선대를 조직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첫째, 화살은 커녕 모두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조조군에서 불화살 한 발만 쏘더라도 선대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강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면 선대는 길을 잃고 조조 수군 진영으로 돌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선대 자체가 조조군의 공격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셋째 배마다 1,000개가 넘는 볏단을 싣고 거기에 5,000개의 화살이 박힌다면 배의 무게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으므로 조조군의 공격에 침몰했을 가능성이 높다.
천하의 제갈량이 이런 무모한 작전을 추진했을 리 없다는 뜻이다. 특히 조조군이 아무리 바보라고 하더라도 북치는 곳에 10만 대의 화살을 쏠 리 없으며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손권의 배도 앞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동남풍을 빌다>
『삼국지』에서 가장 흥미를 자극하는 대목은 동남풍의 문제이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채택한 화공전술로 모든 배를 묶어 놓은 조조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조조 쪽으로 불어야 했기 때문에 동남풍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제갈량은 제단을 쌓고 제를 지내서 동남풍을 불게 했다고 설명한다.
『삼국지』의 결론은 손권의 수군이 제갈량이 불러온 동남풍을 만나지 못했다면 결코 조조에게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제갈량의 동풍 빌리기는 원대 잡극 『칠성단제갈제풍』에서 유래한다. 『삼국지평화』에도 ‘제갈량이 누런 옷을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왼손에 검을 들고 어금니를 부딪치며 술법을 행하자 곧 큰바람이 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는 여기에 살을 붙이고 보다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여하튼 학자들이 중점적으로 연구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조조는 건안 13년(208년) 7월 남정을 시작하여 9월 중에 형주를 점령하고 한 달간 손권이 항복할 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항전할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조의 예상과는 달리 손권이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전의를 불사르자 조조는 계속 남진했다. 그러므로 실제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음력 10월에서 11월 사이로 추정하는데 진수의 『삼국지』<무제기>에는 12월로 적혀 있다.
놀라운 것은 적벽대전이 겨울에 벌어졌다면 적벽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제갈량의 동남풍이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적벽대전이 겨울에 벌어졌다면 장강유역의 지형적인 위치 때문에 동풍이 부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삼국지』처럼 공명을 통해 바람을 불러올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조조의 함선들이 모두 철사슬로 묶여 있었다면 사실상 쉽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화공을 하더라도 반드시 동남풍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쪽에서든지 바람이 불어준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나관중의 이야기처럼 공명이 바람을 빌려 조조군을 격파했다는 것은 애초부터 과장이라는 설명이지만 나관중이 어떤 연유로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어오도록 플로트를 작성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의 연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적어도 나관중이 겨울에 장강 유역에서 동풍이 분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제갈공명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도록 소설의 주요 소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한 치도 결말을 알 수 없는 전쟁에서 기후는 긴박함과 통쾌한 반전이라는 흥미를 자아내기에 매우 유용한 소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남풍을 불러왔다면 인간이 아니라 마법을 지닌 마법사라고도 부를 수 있다. 오죽하면 노신(魯迅)이 이 사건처럼 황당한 일은 없다며 “제갈량의 지혜를 그린다는 것이 거의 요괴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라고 평했을 정도이다.
<황개의 고육지계>
『삼국지』의 백미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수군이 완전히 궤멸되었다는 것이다. 조조의 수군이 참패하게 되는 여정은 우선 조조가 형주를 점령하여 수군을 확보하여 유비․손권의 연합군과 일전을 준비하는데 조조는 방통의 연환계에 걸려 모든 배를 쇠사슬로 묶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이때 황개가 위장 항복한다. 이때의 정황을 『삼국지』는 매우 자세하게 적었다.유비․손권의 연합군은 처음부터 조조의 수군 즉 형주에서 접수한 수군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화공을 사용해야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때 황개가 주유에게 화공으로 조조를 격파하려면 조조의 계책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이 고육지계(苦肉之計)에 자임하겠다며 자원한다.
황개는 다음 날 전투를 계속 미루려면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여 주유를 화나게 하자 주유는 곤장 1백 대를 치라고 한다. 결국 신하들의 반대로 100대에서 50대로 중지되었지만 황개는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고 주유를 욕하면서 동료들에게 끌려 나갔다. 이것이 고육지계임을 정확하게 파악한 회계군 산음현의 감택(闞澤, ?~243)이 조조에게 보내는 황개의 항복문서를 전달한다. 황개는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항복하겠다고 적었다.
‘미욱한 저는 손씨 가문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모반의 마음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동 6군의 미미한 세력으로 백만 대군을 당해내려는 것은 전략을 무시한 무모한 생각이며 군중에서도 저와 뜻을 같이하는 자가 대다수입니다. 그런데도 나이 어린 주유가 도독이라는 지위를 빌려 제 재간만 믿고 닭의 알로 돌을 치는 어리석은 수작을 부릴 뿐만 아니라 참람하게 권세로 사람을 눌러 죄 없는 사람에게 형벌을 주고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아니합니다. (중략) 승상께서는 성심으로 사람을 대접하시고 허심탄회하게 선비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높기에 황개는 군사를 거느려 항복을 올린 후에 공을 세워 부끄러움을 씻으려 합니다. 양초(糧草)와 거장(車仗)을 배편이 있는 대로 바치려 합니다.’
조조도 바보가 아니므로 황개의 항복문서가 거짓이라고 문서를 가져온 감택을 처형하려고 하지만 구변이 좋은 감택이 결국 조조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조조가 오나라 군에 심어 놓았던 첩자가 황개의 항복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때 봉추(鳳雛, 178~213)가 조조를 만나 전선을 흩어지지 않도록 한데 단단히 묶어 놓는 ‘연환계(連環計)’를 사주한다. 봉추는 방통(龐統)으로도 불리는데 스승인 사마휘(司馬徽, 3세기 초)가 제갈량과 함께 유비에게 천거한 사람이다.
방통은 조조에게 배를 쇠사슬로 한데 묶으면 큰 풍랑에서도 견딜 수 있다는 이른바 '연환지계'를 주장하여 조조가 이를 승낙한 것으로 묘사된다.
‘장강에는 조수 간만의 차가 있어 파도가 잔잔해지는 때가 없습니다. 북방의 군대는 배를 타 본 적이 없으므로 날마다 파도에 흔들리면 병에 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큰 배, 작은 배를 하나로 연결하여 30척 또는 50척을 한 조로 하여 뱃머리를 쇠사슬로 연결하고 그 위에 넓은 판을 깔면 사람은 물론 말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것을 타고 적진으로 쳐들어간다면 파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조조가 형주로부터 획득한 수군의 선박을 모두 하나로 묶어 이동이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위장 항복한 황개가 화선(火船) 20척을 준비하여 항복해 오는 척 하면서 불붙은 짚더미로 조조의 배를 공격하여 모든 배가 불타면서 전멸시켰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허구로 인식한다.
학자들은 오히려 당시 조조군의 군사들은 북방출신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배를 타 본 적이 없으므로 배멀미가 심해 조조 스스로가 고안해 낸 방법으로 추정한다. 즉 방통의 연환계에 속은 것이 아니라 조조군이 스스로 배를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적벽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화공을 할 때 바람의 방향임은 틀림없다. 아무리 화공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바람이 조조군이 아니라 연합군 쪽으로 분다면 화공이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칠성단을 쌓고 길일에 목욕재계하고 도복 차림으로 하늘에 빌어 절묘한 시간에 동남풍이 불도록 했다는 것이 『삼국지』의 기본 틀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대체로 조조의 함선들이 모두 불탔다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그 요인으로 제갈량의 동남풍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부정한다. 소위 비상식적이라는 설명이다.
화공이 『삼국지』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손자병법』에 적힌 화공의 목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① 인마 살상
② 군수물자
③ 적의 치중(輜重, 수레 등 운송 수단)
④ 적의 창고
⑤ 적의 양도(糧道)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공격 목표인데 화공 조건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불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하며 불을 붙일 때도 적절한 도구와 장비가 있어야 한다. 불을 놓는 데는 때가 있고 불이 잘 타오르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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