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패인은 전염병>
조조가 압도적인 별력과 전력을 갖고 있음에도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이 궁금한 것은 바로 당대의 판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적벽대전인데 조조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인 손․유 연합군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인가이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배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조조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호기롭게 형주를 점령하고 손권과 대치했는데 이때 조조에게 계속 패배만 하던 유비는 유기와 합하여 겨우 2만 여 명의 군사만 갖고 있었다. 손권도 많아야 3~5만 명의 군사를 갖고 있었으므로 총 5~7만 명에 불과했다. 조조군이 실제로 20~25만 명이라고 하더라도 전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세임에 틀림없다.
앞에서 설명한 황개의 ‘고육계’, 방통의 ‘연환계’에 의해 조조의 수군이 완전히 궤멸했다고 하더라도 조조의 대군이 전멸한 것은 아니다. 조조의 수군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수군의 일이지 육군이 궤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조조의 수군은 형주의 수군을 인수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조조의 주력군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조가 적벽에서 패퇴했다는 것은 적벽대전의 서전에서 패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적벽대전을 보면 매우 이상한 점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조조가 남정할 때 동원한 병사를 20~25만 사이로 추측한다면 조조의 수군 즉 형주의 수군이 전멸했다고 하더라도 조조의 주력부대인 육군의 병력은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숫자는 손․오의 연합군에 비해 최소한 3~4배에 달하는 대군다.
손․오 연합군은 오림에 주둔한 조조의 수군이 궤멸되자 곧바로 상륙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오림에 주둔한 조조군을 상륙작전으로 격파하기 위해서는 조조군보다 최소한 5~10배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이런 병력을 투입한다고 해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륙전의 습성상 그러하다는 것인데 손~오의 연합군이 조조의 수군과의 전투에서 손실이 전혀 없더라도 5만 명 정도의 병력이라면 조조군을 상대로 무난히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조조의 군사가 1만여 명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상륙작전을 펼치는 공격군에 비해 수비군이 절대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조조가 퇴각한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적벽대전의 대패란 조조가 수군에 이어 오림에 주둔하던 육군도 완전히 궤멸되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작은 손․오의 연합군에 조조의 육군이 어떻게 패배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전투라면 일가견이 있는 조조가 병력도 적은 상륙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인데 이는 비상식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조조는 뛰어난 천재일 뿐만 아니라 학습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병법에 능했다. 제갈량조차 「후출사표(後出師表)」에서 ‘조조의 지모와 계략은 매우 남다르며, 그의 용병은 마치 손무 오기와 같이 뛰어나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제갈량이 조조에 대해 탄복했다는 것은 그만큼 조조의 지략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조조가 손·유 연합군의 인재인 주유, 손권을 알지 못했고 제갈량의 능력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사실 조조는 손권에게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을 때 형주의 유종처럼 순순히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장소를 비롯한 동오의 신하 중에서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자들이 많았는데 조조가 이를 알고 소위 편안하게 항복 받을 생각만 하여 다소 자만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개가 항복한다는 것도 진실로 믿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다.
이는 조조가 동오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패배해도 북쪽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동오의 경우 조조에게 패배한다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투 초기부터 사기 면에서 조조군과 다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손·유 연합군이 막강한 조조의 대군에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원인은 기만(deception)과 기습(suprise) 작전 때문으로 본다. 천하의 조조도 손·유 연합군이 기만작전과 기습으로 나오자 이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둘째 조조는 승리에만 집착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병들의 사기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조조는 형주의 수군을 점령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역전의 용사들인 손권의 수군과의 전투를 서둘렀다.
원래 항복한 군사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부대로 편성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조의 북방부대는 조조와 함께 동고동락한 병사들이라 그의 명령에 잘 따르지만 형주군의 입장에서 볼 때 조조는 겨우 한 달 전에 한솥밥을 먹기 시작한 정복자에 지나지 않는다. 형주의 수군에서 볼 때 조조는 수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는 장군으로 비쳐질 수 있으므로 형주의 수군이 조조의 원래의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마디로 조조군에 편입된 항복한 형주 군사들이 전의를 발휘하지 않았으므로 수군에 관한 한 주유가 이끄는 동오군이 조조군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셋째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조조에게는 겨울철 전투가 매우 불리하다.
조조가 전투를 시작했을 때가 동계라는 것은 적벽대전 자체가 작전상으로 매우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계 전투는 만일 패배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장병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
고대 전투에서 동장군(冬將軍)은 장병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사기 저하를 가져다준다. 동절에는 무사히 회군하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장병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상 어느 전투에서건 진격보다 후퇴가 더 어렵고 사상자가 많이 생긴다. 이래저래 조조군의 사기는 전투하기 전에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진수의 『삼국지』 <무제(조조)기>와 『삼국지』 <주유전>에 들어 있는 관련 기록이다. 조조가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을 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자 조조가 후퇴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조조군의 사기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땅에 떨어져 있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질병마저 돌자 더 이상 전투할 여력이 없게 되어 조조가 서둘러 철수를 명령했다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 <가후전>에서 배송지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적었다.
‘적벽에서 패배는 운수 탓이었다. 실제로 역병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맹렬하던 기세가 꺾였고,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불길을 조장했다.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으로 사람의 탓이 아니다.’
근래 과학자들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있다.
학자들은 배송지가 실제로 큰 역병이 일어났다는 주석에 주목했다. 『중화의학잡지』의 이우송(李友松)은 조조가 적벽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장강 유역에 만연해 있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조조가 풍토병에 걸린 장병들의 사망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조조가 직접 배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이중천(易中天)도 조조의 패전 원인은 제갈량의 지략보다는 실제로 조조의 군대가 얻었던 유행병일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실제로 유행병이 일어났다면 대체 어떤 유행병이냐 인데 학자들은 이 질병이 ‘급성흡혈충병’이라고 단정한다. 중국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는 병으로 『주역』에서 ‘산풍고(山豊蠱)’라고 적혀있을 정도이다.
1972년 호남성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의 한나라 시대 무덤에서 한 여성의 미라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장사의 승상 대후(軑侯) 부인의 미라로 2100년이나 지났는데도 몸에 탄력이 있고 손발의 관절이 움직일 만큼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미라를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장의 내벽과 간장 조직에서 흡혈충 알을 발견했다. 당시 최상층에 있던 대후 부인조차 이 풍토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이 일대에 흡혈충병이 상당히 유행했음을 말해준다. 『삼국지』는 대후 부인이 사망한 지 약 300년 후에 벌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이 당시에도 흡혈충병이 서민층 사이에 상당히 만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흡혈충병은 여름에 유행하는데 적벽대전 자체는 겨울에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조조군이 강남으로 들어간 것은 여름철이다. 즉 조조 수군들이 익숙하지 않은 수상생활을 하다가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 병의 잠복기는 약 한 달 즉 적벽대전의 결전 시기에 발생하여 조조군은 싸울 여력조차 없었다는 설명이다.
반면에 연합군의 주력인 오나라 군대는 장강 유역을 활동 범위로 삼고 있으므로 이 병에 대해 비교적 면역력이 있었다. 치료약도 제대로 없는 전염병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조조가 전염병이 돌자 곧바로 철수한 것이야말로 오히려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유는 남정으로 긴 여행을 한 북방의 조조의 대군과 싸워도 승산이 있다고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는 조조군이 장기간 남행으로 장병 간에 질병이 만연하여 손․유 연합군이 비록 병력 수에는 열세이지만 승리할 수 있다고 손권을 설득했는데 그는 장강 유역의 풍토병이 조조에 치명상을 줄 수 있다고 사전에 예측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실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면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조조라 하더라도 대안을 댈 수 없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황개의 거짓 투항으로 수군이 설사 궤멸되었더라도 전염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없었다면 손․유의 육군이 오림에 상륙하여 조조군을 물리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적벽대전을 꼬집어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전염병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다. 사서에 따르면 동한 동가 원년(151)부터 건안 22년(217)까지 67년 동안에 8차례의 역병이 돌았다고 한다. 건안 22년에는 조비도 역병에 걸렸는데 그는 훗날 오질(吳質, 177~230)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지난 해 역병이 돌았을 때 내가 직접 그 재난을 겪었소.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소.”
조식도 집집마다 시체가 쌓여가는 고통이 있고 방방마다 흐느끼는 슬픔이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적었다. 건안 13년 적벽대전 당시의 전염병이 조비와 조식이 보았던 것처럼 참담했다면 손․유의 연합군이 오림에 상륙하기 이전에 이미 조조의 전력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발병 주기와 지역, 병사들의 면역력 등을 들어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음을 첨언한다.
나관중이 『삼국지』에 전염병에 대해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 나관중이 조조군에서 전염병이 돌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삼국지』에 질병에 대해 적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나관중이 전염병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제외했다고 생각한다.
『삼국지』 자체가 삼국시대의 영웅담에 대한 이야기인데 조조군이 전염병으로 장병들이 무력했을 때 손․유의 연합군이 승리했더라고 하더라도 영웅적인 행동이라는 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공명과 주유가 전염병에 걸린 조조군을 전멸시켰다 하더라도 문학작품에서 그다지 흥미로운 소재가 아님은 틀림없다.
한편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적벽대전에 대한 기존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 적벽대전의 전투는 『삼국지』의 기록처럼 대단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설명이다. 일부 학자들의 적벽대전에 대한 시나리오는 간략하지만 다음과 같다.
‘적벽대전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조조는 초기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물론 원정군에서 질병이 퍼지자 철군을 결심했다. 이때 선박들이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불태우고 떠났다.’
한편 적벽대전에서 역전의 명장 조조도 장병 수에서 절대적으로 우위를 갖고도 패배했다. 그러나 고금의 명장은 거의 모두 패전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다. 더욱이 조조가 결국은 삼국통일의 토대를 놓았기 때문에 그의 위상이 크게 손상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역사상의 대 영웅들 중에서 일생동안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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