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적벽대전은 없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6)

Que sais 2020. 11. 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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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공은 뻥>

함부로 화공을 쓰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화공은  삼국지처럼 대형 전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정상이다. 무경총요에 적힌 화공술을 보면 고대 전투에서 여러 가지 화공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작행(雀杏)이다. 적의 성 안에 있는 새를 잡아 속이 빈 은행 안에 쑥을 넣어 만든 불씨를 새의 다리에 묶은 후 황혼녘에 둥지로 돌려보내 적군의 식량 창고를 불태운다.

둘째행연(行煙)이다. 성 바깥의 바람이 잘 부는 곳에 건초나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연기를 만든 후 연기에 의해 성 위를 수비하는 병사들이 자리를 피할 때 이 틈을 타서 성을 공격한다.

셋째연구(煙毬)로 화약을 황호(黃蒿)에 싼 후 빨갛게 달군 송곳으로 찔러 불을 붙인 후 투석기를 이용해 적진으로 발사한다.

넷째양진거(楊塵車)로 분말 형태의 석회 등을 뿌려 적군의 입과 코를 공격하는 방법이다.

 

불타는 조조선박

삼국지평화에서는 적벽대전 직전에 주유와 제갈량이 각각 손바닥에 ()()을 썼고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주유에게 조조를 섬멸하려면 화공을 써야 하는데 동풍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제갈량이 동풍을 빌려오는데 성공한다는 것이 주안점이지만 나관중이 제갈량의 공적을 부각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각색을 했는데 적어도 동남풍을 제갈량의 역할로 볼 수 없다. 실제로 제갈량이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사망했을 리 만무이다.

여하튼 조조의 수군이 불타는 요인으로는 두 가지 설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첫째는 유비손권의 연합군에 의해 불탔다는 것이고 둘째는 조조 자신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선주(유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손권은 주유정보(程普 2세기말220년대)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조조)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 선주가 오군과 수륙으로 진격하여 남군까지 추격했다. 당시 역병이 창궐하여 북군(조조군)이 대부분 죽게 되자 조공이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곽가전>에는 조조가 스스로 불태웠다고 이렇게 적혀있다.

 

태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파구(巴丘)에서 역병을 만나 함선을 불태웠다.’

 

진수의 삼국지<오주전>에도 조조가 불태웠다고 적혀있다.

 

주유와 정보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

 

근래 학자들은 두 가지 주장 중에서 후자에 손을 보다 많이 들어준다. 조조가 직접 자신의 함대를 불태우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주유전> 배송지의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에서는 조조가 손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적혀있다.

 

적벽에서의 전투는 전염병이 생겨 내가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물러난 것인데 뜻하지 않게 주유가 이런 명예를 얻었다.’

 

이중천은 이 조조의 편지 자체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조조가 역병이 돌자 철수하면서 함선을 모두 불태웠다는 설을 지지했다. 결국 조조의 패배에 역병이 큰 역할을 했고 자신이 형주로부터 얻은 배들을 태우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조조의 퇴각

 

<화용도 전투>

적벽대전은 조조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군과 육군이 손·유의 연합군에게 패패하여 도망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을 제갈량은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조조의 도피로에 관우를 매복시켜 조조를 격멸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조조가 제갈량의 예상대로 화용도로 도주하는데 이곳에 매복해 있던 관우에게 붙잡히지만 관우는 정에 이끌린 나머지 그냥 놓아준다. 이 장면은 삼국지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조조의 수군이 손·유의 연합군의 화공에 의해 완전히 궤멸되는 것은 물론 조조의 영채까지 불이 붙자 곧바로 손·유의 연합군이 오림에 상륙 작전을 벌여 조조의 육군을 공격했다. 조조가 즉각 퇴각하는 와중에서 화용도에서 결정적인 육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실상 적벽대전은 화용도에서의 패배로 막이 내린다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판소리 적벽가에서도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지는데 판소리에서 조조는 매우 비굴하게 목숨을 구하려는 가련한 모습으로 나온다. 적벽가화용도타령, 화용도라고도 부르는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놓고 조조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관우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조조가 관우를 살려주고 후하게 대접한 것 등을 들어 관우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의리의 사나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화용도 이야기는 조조가 참패하며 매우 곤욕스러운 처지에 봉착한다는 부분을 강조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정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삼국지에만 등장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특히 나이어린 제갈공명이 군령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관우를 참하려고 하지만 유비의 청으로 못이기는 척하고 관우를 살려주는 것이 사실상 화용도 사건의 핵심이다.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이 관우가 조조를 정에 이끌려 결국 살려줄 것을 미리 짐작하고 관우로 하여금 조조와의 은원을 매듭지을 수 있도록 화용도에 매복하 했다고 설정되어 있.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관중이 작가적인 아이디어로 삽입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조와 관우의 만남 화용도

문제는 조조와 관우가 조우하는 화용도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적벽가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관우가 조조를 살려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화용도 전투는 적벽대전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의 하나이다.

진수의 삼국지에서 배송지는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조)의 군선이 유비에 의해 불에 타자 군대를 이끌고 화용도를 통해 도보로 퇴각했지만 진창길을 만나 지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큰바람까지 불어 닥쳤다. 허약한 병사가 모두 풀을 등에 지고 가서 진창을 메워 가까스로 기마병이 지나갈 수 있었다. 허약한 병사들은 사람과 말에 짓밟히고 진창에 빠져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군대가 탈출한 뒤에 공은 매우 기뻐했다. 여러 장군들이 까닭을 묻자, 공이 대답했다.

유비는 나와 동등한 무리이지만 계략을 짜는 일이 나보다 조금 늦다. 그가 만일 일찍 불을 놓았다면 우리는 전멸했을 것이다.” 그 후 유비가 불을 놓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사실 삼국지에서 관우와 조조의 조우는 각색된 것이지만 위와 같은 정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렸다. 조조가 퇴각할 때 엄동이었는데 말과 군사가 나가지 못했다. 전면 산이 굽이진 곳에 비가 와서 땅이 패어 진흙 구덩이가 되자 말굽이 빠져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조의 명에 군사들이 흙을 나르고 섶을 깔아 구덩이를 메워 행군을 하게 했는데 당시 얼마나 이 일이 어려웠는데 잔도(棧道)에서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요 호곡하는 울음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 쳤다고 했다. 이 당시 조조군 피해가 컸던 것은 조조가 기마병에게 우선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급한 상황이 되자 기마병을 무사히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보병들을 희생시켰다. 조조가 기뻐한 것은 자신과 함께 기마병이 탈출했기 때문이다. 즉 기마병 부대만 무사하다면 반드시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인 작가 토모로 로는 적벽대전을 정확히 분석한 후 손권과 유비가 불을 질러야 했던 것은 조조의 수군이 아니라 기마병이라고 적었다. 물론 조조에게도 수군은 있었지만 적벽대전의 주력은 유종에게 귀속된 형주의 수군이었다. 한마디로 당시에 조조의 수군 전체가 전멸했다하더라도 조조에게 큰 타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화용에서 진창을 만나 고비를 넘기자 조조가 기뻐한 것은 그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학자들이 화용도가 어디인지 추적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화용은 장강 북쪽 기슭의 호북성 홍호시(洪湖市) 감리현(監利縣) 중부에 있는 약 10킬로미터 정도의 도로로 본다. 더욱 상세하게 말하면 감리현을 흐르는 변하(汴河)의 조편항(曹鞭港)에서 모시진(毛市鎭)의 방조파(放曹坡)에 이르는 좁은 길이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조조의 패주 경로는 다음과 같다.

 

조조는 오림에서 장강 북쪽 기슭을 따라 수륙 양로로 서쪽으로 향했다. 나산(螺山), 양림(楊林)을 지나 백라기(白螺磯), 사자산(獅子山)까지 와서 수군의 배를 불태우고 상륙하여 육군과 합류했다. 주하, 변하를 지나 화용을 빠져 나가 서북쪽으로 진로를 돌려 군량미가 집적되어 있던 강릉(江陵)을 목표로 진군했다.’

 

<백만 대군 불가능하다>

조조가 중국의 패권을 위해 남정에 돌입하면서 백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조가 하북의 강자인 원소를 패망시킨 데다 형주를 아무런 싸움 없이 병합하면서 그야말로 백만 대군을 손에 넣고 이들 장병을 적벽대전에 투입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실제로 조조가 군사를 움직인 것은 20~25 사이로 추측하며 유의 연합군은 유비군 1, 유기군 1, 동오군 35 정도로 추정한다. 주유는 전투 전에 조조의 군대가 100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17만 정도라고 말했다. 그가 그와 같이 추정한 것은 조조가 원소로부터 얻은 병사와 형주에서 흡수한 군사를 7, 8만 명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당대에 100만 명이라는 장병을 동원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이에 부속되는 지원군이 적어도 1.52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마병의 경우 기사가 말에게 먹일 건초를 직접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항상 하인이나 지원부대가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장병 100만 명을 동원하려면 총 동원되는 인원은 적어도 250만 명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의 과장이야 워낙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중국인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 대목이 있다. 기원전 119년 흉노와의 전투에서 기병 5만 명과 보병 수십만 명을 동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적은 한서(漢書)조차 한 번 원정에 동원된 병력은 다 합쳐서 4만 명이었으나 10만 명으로 불렀다라고 적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실제의 숫자로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주유

그렇다하더라도 조조군이 100만 명은 아닐지언정 손오의 연합군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이었음에도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은 조조군이 손·유의 연합군보다 최소한 34배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대의 전투에서 2배의 병력 차이가 난다면 병력의 열세로 승리할 수 없다고 추정한다. 한마디로 2배 이상의 군대에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인데 역전의 용사인 조조가 34배의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패배했기 때문에 더욱 적벽대전이 유명한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설명하면서 여러 정황을 묘사했는데 조조가 주유와 어렸을 적 친구인 장간(蔣幹, 3세기 초)을 보내어 주유가 항복하도록 설득케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를 간파한 주유가 오히려 장간을 이용하여 형주의 호족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후 조조 수군의 대도독이 된 채모(蔡瑁, ?208 이후)와 장윤(張允, 3세기 초)을 죽이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진수의 삼국지에 보면 장간은 회수일대의 실력자로 주유를 설득하러 간 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일이므로 주유에게 이용당할 수 없었다. 또한 채모는 자기 누이를 형주 유표의 후처로, 조카를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시집보낸 실력자로 제갈량과도 인척이 된다.

채모208년 유표가 죽은 뒤 모사 괴월, 부손과 함께 유표의 아들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항복했는데 이때의 공으로 조조수군의 대도독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삼국지에서는 주유의 계략에 걸려 조조에게 살해되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사실 삼국지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이 사실과 허구를 잘 버무려 놓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야 삼국지의 내용이 100퍼센트 사실이든 아니든 흥미로운 부분에 매료되지만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분석하는 학자들로서는 그야말로 곤혹스러운 일을 나관중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