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적벽대전은 없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었다(3)

Que sais 2020. 11. 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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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과 유비의 연합>

결론을 말하자면 손권과 유비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고 결국 승리하였지만 당대의 정황을 볼 때 이들이 연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 군진을 종횡무진하면서 탁월한 정세를 논하여 오나라 수뇌진을 설득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형주를 접수하고 자신의 취약점인 수군을 확보하자 동오 공격에 자신감을 얻은 조조는 곧바로 손권에게 공갈의 의미를 지닌 다음과 같은 초항서를 보냈다.

 

최근에 나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죄를 지은 자들을 정벌하고 있소. 군대의 깃발이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은 바로 손을 들어 투항했고 형양(荊陽)의 백성들도 모두 귀순했소. 이제 나는 다시 80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여 그대와 함께 그대가 머무는 오나라 땅에서 사냥이나 하며 유비를 치고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며 오래 동맹 관계를 맺고 싶소.’

 

조조80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겠다고 하지만 조조의 모든 병력을 다 합쳐도 80만 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조조의 초항서가 도착하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항복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북의 세력들은 육군이 주력이므로 오나라는 수군으로 이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권의 옥좌

그런데 수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조조형주의 수군을 접수했기 때문에 오나라의 전술적인 잇점마져 상실된 상태였다. 손권의 신하들이 전투가 벌어지면 오나라가 백전백패하므로 사전에 항복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건의한 것이다. 실제로 오나라의 건국공신으로 손책이 죽은 뒤 손권정신적인 고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소(張紹 156236)조차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가 천자의 이름을 빌려 사방을 정복하는데 만약 이를 막는다면 불순(不順)이 됩니다. 더구나 오가 지금까지 조조에게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은 장강(長江) 때문이었는데 이제 조조가 형주를 얻었으니 장강의 험한 요새를 우리와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조조의 대군과 대적하기는 어려우니 항복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조조의 막강한 육군에 형주의 수군이 합세했으므로 이들을 격파할 재간이 없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항복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손권과 장소의 사이가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나라 중신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한 것은 아니다. 이의 선봉장이 노숙이다.

 

노숙(魯肅, 172217)은 유표가 죽은 것을 알고 즉시 손권에게 유비와 협력하여 조조와 대적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노숙삼국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은 주유. 주유가 손권에게 노숙을 추천한 추천서는 그야말로 화려하다.

 

노숙은 자를 자경(子敬)이라고 하며 임회군 동성현 사람입니다. 모든 병서를 두루 공부했고 지략과 무용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재산도 많습니다. 제가 옛날 거소(居巢)의 현장(縣長)으로 있을 때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임회군에서 군량미가 떨어져 어려움을 겪 있었습니다. 그때 노숙에게 부탁했더니 쌀 창고 한 채를 전부 제공해 주었고 그 후 저는 그를 최고의 벗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품도 훌륭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도 지극한데 다른 사람이 그를 차지하기 전에 신속하게 교섭하여 우리 군에서 영입해야 할 것입니다.’

 

노숙은 당대의 재력가로서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는데 소호(巢湖)의 정보(鄭寶, 2세기 말)로부터 벼슬자리를 권유받았음에도 주유의 추천으로 손권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노숙은 손권의 진영에 합류하면서 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가 제갈량보다 다섯 살 위인 제갈근(諸葛瑾 174241)이다. 적벽대전이 벌어질 때 제갈근은 오나라, 동생인 제갈량은 유비 측에서 싸웠으므로 사실 두 형제가 힘을 합하여 조조에 대항했다는 설명도 과언은 아니다.

 

<공명의 설득>

손권노숙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형주로 파견하였지만 조조의 진군이 재빨라 유종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한 후였다. 그러므로 설사 유비와 유기가 연합하였다고 하더라도 형주를 손에 넣은 조조에 비할 때 유비와 유기는 큰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손권은 알아차렸다.

 

제갈량과 노숙

한 마디로 노숙의 건의대로 유비와 연합하려고 생각하였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변했으므로 유비와 연합하는 것이 유리할지 불리할지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유비가 제갈량에게 손권의 휘하에는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 174241)이 있으므로 함께 손권을 설득하라고 제갈량을 사자로 파견했다.

이때 제갈량이 주유와 노숙을 만나며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 항복하지 못하는 장면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오나라 집권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공명이 말했다.

 

공명 : 조조는 본래 호색지도(好色之徒)라 오래 전부터 강동 교공(喬公)에게 두 딸이 있는 것을 알고 이들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큰딸의 이름은 대교(大喬)요 작은딸의 이름은 소교(小喬)인데. (중략) 조조는 극히 화려하고 장려한 동작대(銅雀臺)를 짓고 맹세하기를 내 사해를 소탕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제업(帝業)을 이루게 될 때 강동의 이교(二喬)를 얻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조조가 백만 대병을 거느리고 강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이 두 여자를 노리기 때문입니다. 교공을 찾아가서 천금으로 두 여자를 매수하여 조조에게 보내면 조조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갈 것입니다.

 

주유 : 조조가 이교를 손에 넣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공명 : 조조가 어린 아들 조식에게 명해서 동작대부(銅雀臺賦)를 지어 글 속에 천자가 되어 맹세코 이교를 취한다고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나관중은 조식이 지은 동작대 원문에는 연이교어동서해(連二橋於東西兮)로 되어 있는데 이교(二橋)를 음이 같은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인 이교(二喬)로 고쳐 불러 남이교어동남혜(攬二喬於東南兮)로 말했다고 적었다. 동작대부의 원문을 모르는 주유가 공명의 이 말을 듣고 발끈하며 크게 노하자 공명은 그의 화에 불을 붙인다.

 

옛적에 흉노 선우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니 한나라 천자께서는 공주까지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서 화친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민간의 두 여자를 조조에게 보내는 것이 무어 그리 아깝다고 하십니까.”

 

공명손권의 부인대교이고 주유의 부인소교인 것을 알고 그들의 분노를 재촉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실제로 동작대는 적벽대전이 일어난 후 2년 후에 건축되었으며 동작대부는 그보다도 2년 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아무리 신묘하다고 해도 4년 후에 조식이 지은 동작대부를 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손권의 대교, 주유의 소교

이때 노숙은 또 다시 손권에게 조조와 일전을 겨루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노숙은 동오의 모든 사람이 조조에게 항쟁할지언정 항복은 불가하다고 말한다.

 

제가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저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자사(刺史) 등의 벼슬을 주어 금의환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이 항복한다면 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잘해야 후()로 봉할 정도이며 시종도 겨우 두어 명에 불과할 겁니다. 신하들이 항복하자는 것은 다 자신을 위한 겁니다.”

 

제갈량도 손권을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어나, 장군(손권)이 병사를 일으켜 강동을 거점하고, 유예주(유비) 역시 무리를 이끌고 한남을 수복하여, 조조와 함께 천하를 다투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 을 평정하여 그 위세가 사해를 진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유비도 이곳까지 도망했습니다. 장군이 만약 오월의 무리로 중국과 대항할 수 있으면 일찍 그와 단절하는 것이 순리이며 만일 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병기를 버리고 갑옷을 묶어 둔 후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장군이 밖으로는 복종의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망설이며 계략을 세우지 못하니, 사정은 급하되 결단하지를 못하여, 화가 올 날이 멀지 않을 겁니다.’

 

제갈량 손권을 설득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유비가 하구로 도망왔다사실을 감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손권이 유비보다 주도권이 있음을 인정하여 유비와의 결합을 반대하는 측으로 하여금 유비가 손권을 이용하여 자신을 구하려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강조했다. 둘째손권에게 결단력이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는 점이다. 사실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용기가 없다는 비난을 가장 싫어하는데 제갈량이 바로 손권의 취약점을 정확히 꼬집었다.

이때 손권은 제갈량에게 만약 당신의 말이 옳다면 유비는 왜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는가 질문했다. 이때도 제갈량은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전횡(田橫, ?기원전 202)은 제나라의 장사에 불과함에도 의를 지키고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하물며 유비는 왕실의 자손으로 뛰어난 재명이 세상에서 으뜸가고, 수많은 사내들이 앙모하여 바다로 물이 돌아가는 것과 같다. 만일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하늘의 뜻으로, 어찌 조조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제갈량이 유비가 조조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이유를 이와 같이 설파한 것은 고단수의 심리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제갈량의 말은 손권이 유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위에 있지만 유비항복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이고 손권항복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을 암시한다.

 

 

영웅으로 자처하고 있던 손권에게 제갈량의 설명은 모욕이나 마찬가지이다. 손권은 발끈하여 조조와의 결전을 다짐하면서도 작전가다운 질문을 한다. 동오는 조조에 대항한 경험이 전혀 없으므로 유비에 의지하여 조조와 대적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비는 조조에게 이미 패했으므로 자신과 연합할 병력은 물론 장병들의 사기도 떨어졌음이 분명하지 않은가를 물었다. 유비가 조조에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에 제갈량은 손권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한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패하였지만, 현재 관우군과 유기의 병사를 합하면 수만이 된다. 조조는 장거리 행군으로 매우 지쳐있으므로 이들을 격파하는 것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북방인들은 수전을 잘 모르는 데다 그에게 항복한 사람(형주 수군)들은 일시에 패했기 때문에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이지 심복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비와 정말로 힘을 합치면 반드시 조조를 물리칠 수 있다.’

 

이것이 전력상 현저한 열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와 손권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조조군에 대항하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벌어지게 되는 배경이다.

 

<삼국시대의 수군>

적벽대전은 기본적으로 육지가 아니라 강에서 벌어진 전투다.

적벽대전은 조조와 손유 연합 수군 전투의 백미노장 황개고육계로 조조에게 거짓 투항한 다음 몽충함’ 20척에 인화물을 가득 싣고 장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 함대로 향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조조 진영에서는 백기를 달고 오는 적함이 진실로 투항하는 것으로 알고 그들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갈량이 불어오게 만든 동남풍이 불자 황개는 자신이 이끈 선박들에 불을 붙여 조조 진영에 충돌하도록 했다. 유 연합군의 예상대로 조조 수군은 순식간에 화염에 싸여 거의 모두 불에 타버렸다.

 

몽충선

사실 황개의 몽충함은 자살특공대 가미가제와 다름없다. 물론 일본의 가미가제와는 다른 점이 있다. 가미가제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만 황개는 자살특공대를 투입한 후 뒤따라오던 주가(走軻, 쾌속정의 일종)에 올라타 몸을 피했다.

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적벽대전에 참가했던 조조의 아들 조비의 말이다. 그는 수군을 크게 일으키니 물 위에 뜬 전함이 무려 1만 척에 달했다라고 적었다. 전함이 1만 척이라니 과장이 심하기는 하지만 진용이 매우 장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대의 수군의 실체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전함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컸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보인다. 적벽대전이 끝난 지 약 70년 후 () 무제(武帝)가 오나라를 공격하려할 때 익주자사 왕준(王濬)이 거대한 함선을 만들었는데 가로세로가 120보나 되고 2천 명을 태울 수 있으며 나무로 성을 만들고 말이 드나들 수 있었다고 적혀있다.

2,000명이 탈 수 있다니 과장으로 보이지만 지리학자 역도원의 저서인 수경주에는 손권이 사병 3,000명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번구(樊口) 북쪽의 만()에 정박시켰다라고 적었다. 진대의 문필가 좌사(左思)손권의 거함을 직접보고 비운(飛雲)과 개해(蓋海)가 예사 크기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비운과 개해군함의 이름이다. 삼국시대에 실전에 사용된 선박 규모가 23천 명을 태울 수 있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개가 조조군을 공격할 때 사용한 몽충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동한의 유희(劉熙)석명석선에서 좁고 긴 배를 몽동이라 하는데 적선과 충돌할 때 사용했다고 적었다. ‘몽동이 바로 황개가 이끌던 돌격함으로 몽충소가죽으로 장갑을 둘렀다. 속도가 빠르며 갑판 위의 선창 사면에 노창(弩窓)과 모혈(矛血)이 있다.

전함에는 여장을 쌓았는데 높이가 3척이었다. 여장 아래로 노를 젓는 도공(棹空)을 뚫었고 배 안에 5척 높이로 대를 쌓은 다음 그 위에 또 여장을 쌓았다. 삼국시대의 함선이 거대한 것은 물론 수상에서 충분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