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은 없었다>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장차 중국의 전체 판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투로서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적벽대전’이란 말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보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적벽지전(赤壁之戰)’이라고 부른다. ‘전’이란 회전(battle)을 가리키는 말로 적벽은 회전이 발생한 지점이다. 예로 들자면 해하지전(垓下之戰)은 바로 초․한 양군이 해하에서 한 판 벌인 회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적벽지전’이란 적벽에서 발생한 한 번의 회전을 뜻한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적벽대전으로 적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런데 적벽대전이라는 대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적벽대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점 때문이다.
이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당시 조조 진영과 연합군 진영의 배치에 대해 설명한다. 우선 손권과 유비의 연합이 확정되자 곧바로 조조에 맞설 전투 부대가 구성된다.
손·유 연합군 5만여 명(기록에 따라 7∼8만여 명)은 장강을 따라 서진하여 장강 남쪽 적벽에 주둔했다. 노숙의 건의로 손권의 어릴 적 친구인 주유가 대도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손권의 선친이 "나라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 결정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자질이 있는 강골이자 전략가였다. 주유도 손권에게 일단 결심이 섰으면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그는 북방의 조조가 말안장을 벗어나 선박에 앉아 오나라와 다투는 것은, 자신의 주무기를 버리고 전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조조가 수많은 기병을 끌고 왔지만 기병의 기본 전투력인 말을 먹일 여물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기병들이 제대로 활약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또한 조조군이 지형을 잘 몰라 악전고투하면서 내려왔으므로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이야말로 적벽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주유가 원정군의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손권은 주유의 말을 듣고 전의를 다지는데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의 모든 면이 제갈량의 의중대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한다.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의 활약상이 그 어느 곳보다도 자세하게 기술되었는데 그것은 제갈공명에 의해 적벽대전의 승패가 갈리고 그 때문에 삼국이 정립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당시 제갈량의 나이는 고작 28세로 도략(韜略)과 병법에 능통하다고 하더라도 실전에 있어서는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따라서 적벽대전은 손권이 감독을 맡고 주유가 군대를 통솔했으며 유비와 유기가 행동대원으로 참가하고 제갈량은 조연에 머물렀다는 것이 정설이다.
참고적으로 적벽대전이 벌어졌을 당시 주인공들의 나이를 보면 조조 54세, 유비 48세, 손권 27세, 주유 34세, 노숙 37세이다.
<부실한 정사의 기록>
진수의 『삼국지』는 사마천의 『사기』와 달리, 여러 부분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 많은데 ‘적벽대전’도 예외는 아니다. 즉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투인 ‘적벽대전’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이 없어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물론 ‘적벽’이란 말은 여러 번 나타난다.
①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으며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삼국지』 <무제(조조)기>)
② 손권은 주유․정보(程普 2세기말~220년대)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삼국지』 <선주(유비)전>)
③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정보․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공(조조)에 대항하였다. 조공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삼국지』 <제갈량전>)
④ 주유와 정보를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공과 맞서 적벽에서 조우하였다. 그때 조공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공의 군대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다.(『삼국지』 <주유전>)
⑤ 주유와 정보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삼국지』 <오주전>)’
⑥ (정보)와 주유가 좌우독이 되어, 조공을 오림(乌林)에서 물리쳤다.(『삼국지』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
이상이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에 관한 기록인데 이 내용만 보면 도대체 적벽대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주전>에서는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고 적었고 <제갈량전>에서는 조조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고 적었다. 이 두 설명에 기초한다면 회전지는 ‘적벽’이 틀림없으며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의해 조조가 패배하자 조조는 곧바로 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유전>에서는 쌍방이 적벽에서 조우했지만 조조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는데 막상 강북이 어디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정사에 기록된 설명만 보면 적벽대전이 적벽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에서는 조조를 물리친 지점은 ‘적벽’이 아니라 ‘오림’이라고 확실하게 적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설명에 학자들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즉 실제 전투가 일어났다면 어디에서 일어났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실제로 적벽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오림에서 벌어졌다고 부단히 주장한다. ‘적벽지전(적벽대전)’이 아니라 ‘오림지전(오림대전)’이 맞는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적벽대전’이라는 명사가 너무나 잘 알려졌고 특히 나관중의 『삼국지』에 의해 과대 포장되어 전쟁사에 종사하는 학자들조차 명칭이 부정확한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오림대전’이 아니라 ‘적벽대전’으로 설명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적벽대전이라 함은 한 판 전투가 아니라 적벽에서 일어난 전투를 모두 통칭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벽대전에서는 실제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첫째는 수전으로 주로 형주에서 항복한 군사로 이루어진 조조의 수군과 오나라의 수군과의 전투이다. 둘째는 오나라군에 의해 조조의 수군이 궤멸되자마자 곧바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조조의 육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을 향해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조조의 육군을 격파했다. 이 와중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론은 간단하다. 조조가 수전과 육전 양쪽 전투에서 모두 패배했기 때문에 남정을 중단하고 퇴각했다는 것이다.
고대 전투에서 수륙 양진을 펼치면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북방의 조조 육군이 강을 따라 행군하고 조조가 접수한 형주 수군은 이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동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유의 연합군은 이들에 맞서 수군은 수군으로 육군은 육군으로 격퇴할 방안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학자들이 각종 사료와 실제 전투가 벌어졌음직한 현장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구성한 적벽대전의 전투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조조는 초전에 패배한 후 즉시 강북으로 후퇴하여, 잠시 오림에 주둔하며, 부대를 정돈하면서 반격을 준비했다. 당시 주유는 강의 남쪽에 있었는데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 2세기 말~229 이전)가 “지금 적이 많고 우리가 적으니 시간을 오래 끌기 힘들지만 조조의 군선을 불태우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황개가 수십 척의 배를 하나로 이어서 장작에 기름을 칠한 후 천으로 두르고 조조에게 항복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조조는 정말로 황개가 투항하는 줄 알고 황개가 길게 줄이어 몰고 오는 배를 관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황개가 배를 풀고 불을 붙였다. 마침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 조조군에게로 옮겨갔고 수많은 조조군이 희생되었다. 조조는 즉각 후퇴를 명했고 남은 배들을 모두 불살랐는데 유비와 주유 등의 육군이 곧바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조조를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성을 지키도록 하고 홀로 북으로 돌아갔다.’
오림 또는 적벽대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전투가 두 장소 중에서 어디에서 벌어졌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적벽대전에서 중요한 육군의 전투는 조조의 주력부대가 오림에 주둔하고 있었고 손·유의 연합군은 조조의 수군이 격파되자마자 곧바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조조의 육군을 공격하여 패퇴시켰으므로 이들 전투가 적벽에서 벌어지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오나라 수군의 공격으로 불에 타 완전히 격멸된 조조의 수군이 어디에 있었느냐하는 점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적벽대전의 장소 즉 회전 지점에 대해 엇갈리는 기록을 했다. 즉 적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처럼 설명한 것은 물론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에서 단 한 번 조조를 오림에서 물리쳤다고 기록한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진수가 이와 같이 부실한 기록으로 중국 전쟁사를 오도했고 또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결코 과언은 아니다.
현재 『삼국지』의 영향으로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전 세계에서 몰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호북성의 적벽시 인근의 적벽이라고 알려진 곳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적벽은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 동정호와 파촉에 이르고 동으로는 오월과 소주·형주에 이르며 북으로는 한강 유역의 천리 평야가 보인다. 남으로는 옛 성 포기가 있어 강남의 지형 우세를 전부 포괄하므로 예로부터 전쟁의 활동 무대였다. 실제로 주유가 조조의 대군이 밀려들어오더라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연합군의 병력은 작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적벽은 중국 고대 10대 전쟁터 중 유일하게 완전히 보존된 유적인데 적벽 절벽에 ‘적벽’이란 글이 적혀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주유가 조조 군사를 격파한 후 검으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적벽대전을 엄밀히 검토한 학자들은 조조와 손·유 연합군이 격돌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반면에 오림은 바다와 같이 넓은 지역이므로 조조의 수군이 진주하기에도 적합하다.
결론을 말한다면 손․유의 연합군이 진주한 적벽은 장강 동쪽에 있고 조조는 장판을 거쳐 곧바로 강릉까지 남하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강 동쪽을 따라 내려가 장강의 북쪽이자 적벽에서 다소 하류로 장강의 서쪽인 오림에 주둔했다. 이들은 서로 장강을 마주보는 근접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적벽 또는 오림에서 대전이 벌여졌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특히 오나라의 주력부대는 적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 상황을 보면 적벽보다 오림대전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한 것은 조조의 수군과 육군이 오림에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조의 수군은 연환계에 의해 모두 철쇄로 묶어 두었는데 화공으로 공격을 받아 수군의 선박들이 불에 탈 때 조조 육군의 진영까지 불이 옮겨졌다고 했다. 이는 조조의 수군조차 적벽이 아니라 오림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오나라의 주력부대는 적벽 지역에 주둔했고 위나라의 주력은 수군·육군 모두 오림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조의 수군이 화공으로 격멸되자 손․유의 연합군이 곧바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조조의 육군을 격멸한 곳도 장강의 서쪽인 오림 지역이다. 당연히 대전이 일어난 곳은 적벽이 아니라 오림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적벽대전의 증거물도 오림에서 발견되었다. 오림 고채(古寨)에서 인골과 말의 뼈는 물론 ‘건안 8년’이라고 적힌 구리로 된 등자가 발굴된 것이다. 학자들은 이들 유물이야말로 적벽대전 당시의 유적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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