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한민족과 중국인 차별성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0) : 비파형동검

Que sais 2020. 11. 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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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비파형동검분포도 : 중학교국사

11. 비파형동검

고인돌, 빗살무늬토기한민족의 특징으로 설명되는 비파형동검(요령식 동검)으로 더욱 힘을 받는다. 특히 비파형동검고인돌의 분포권과 유사하다는 점으로도 과거부터 한민족의 주목을 받았다.

서쪽은 요하를 지나 베이징 근처와 산둥지역, 북쪽은 네이멍구 남부지역과 북만주, 요동반도의 신금현 쌍방, 벽류하 23, 개주시 패방촌 남단산, 한반도의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수 적량동, 여천 오림동과 봉계동, 고흥 운대리, 승주 우산리, 경북 김천 송죽리, 경남 창원 덕천리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동검과 동모 등의 청동무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비파형동검청동기 문화빗살무늬토기,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중국식 동검일체식이고 비파형동검조립식으로 알려진다. 길이가 3035정도인데, 사상성과 실용성을 고려해 검신과 검자루 및 검자루 맞추개를 따로 만든 3단 조립식 검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북방 유목종족통짜 주조품과 달리 뛰어나고 정교한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노로아호산의 북쪽, 노합하 유역의 이른바 하가점상층문화에서 비파형동검의 검몸과 카라스크계 단검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동검이 출토되었다. 이 검은 손잡이와 검몸을 함께 주조하는 형식으로 날 부분은 굽은 날 혹은 직선 모양인데 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의 이가 있는 것도 있어 송호정 박사는 비파형동검보다는 요령식동검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잘 알려진 비파형동검으로 설명한다.

 

비파형(좌)과 중국식동검(우) : 국립중앙박물관

비파형동검은 한국과 중국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데 서로 설명하는 관점이 다소 다르다. 1980년대 초 중국학계의 근풍의(靳楓毅)요령지역 청동기 문화요서와 요동으로 구분하고 요서 지역은 동호족, 요동지역은 동이족이라고 보았다. 일본학계도 대부분 이 견해를 인정한다. 북한학계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남산근과 십이대영자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를 기본적으로 맥족(貊族 = 호맥 = 동호)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두 유형의 청동기문화는 부여고구려(맥족)옛 조상으로 파악되는 발()동호의 것이며 요동 지역고조선 종족과 함께 고대 조선족(朝鮮族)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남한 학계에서는 시라무렌하노합하 지역요령식 동검과 공병식(銎柄式, 자루를 끼울 수 있는 투겁이 달린)단검을 같은 시기에 공존했던 별개의 문화 유형으로 설정하고 기하학무늬 청동거울과 요령식동검이 주로 분포하는 대릉하 유역과 구분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이들 지역을 동이로 부르며 이를 세분하여 동호와 동이로 구분한 것은 후대의 일임을 부언한다. 앞에서 고인돌을 설명하면서 고인돌의 분포가 중국 동북 지역의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것이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인 비파형동검 분포권과 유사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안테나식 동검

인류는 언제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석기인(石器人)들이 연장이나 무기로 쓰려고 이에 알맞은 돌을 찾던 중 자연동(순구리, copper)이란 광석을 발견을 것으로 추정한. 우연하게 발견한 자연동은 여러 모로 돌보다 편리하여 작은 동기(銅器)를 만드는 도 적격이었지만 구리는 워낙 무르기 때문에 잘 찌그러져 곧 쓸모가 없게 된다.

청동기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는가는 고고학계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일본의 나가사와 가즈도시 교수는 통설로 인정되는 가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원전 5000년대(아나톨리의 차탈 후크 층에서 자연동의 옥 출토)발견되어 기원전 4000년대에 실용화되고 기원전 3000년대에는 코카사스-이란 고원에서 청동이 주조되기 시작했다. 청동은 석기에 비해 예리하고 견고하기 때문에 곧바로 메소포타미아로 전해졌고 그곳에서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동방으로는 약 1000이 걸려 인도북부(모헨조다로)에 이르렀고 다시 7800에 걸쳐 중국 북부에 그 기술이 전해졌다.’

 

청동브론즈(bronze)'로 부르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유래했다. 청동은 고대에 인기가 높아 활발한 교역의 대상이었는데 이탈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브룬디씨움(Brundisium)청동 교역지로 이름이 알려져 청동을 브론즈로 불렀다는 것이다.

여하튼 지표에 있는 동광석적동광, 남동광이나 공작석 또는 산화동이므로 숯으로 태우면 쉽게 환원되어 구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지방에서는 자연동As, Sb(주석)이나 Ni(니켈)이 함유된 것이 있어서 이런 합금(合金)으로 만든 동제품은 순구리보다 훨씬 단단하고 강해서 보다 편리했다. 이것이 바로 청동기라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동이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며 주석의 함량이 클수록 합금의 경도가 높아진다.

순동에 주석을 섞으면 순동에 비해 용해온도가 낮아진다. 동의 용융점1,083도이지만 주석을 일정량 넣으면 용융점700800도로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석을 무한대로 넣는 것은 아니다. 주석1620퍼센트 정도 들어갈 때 굳기가 높아지는데 만약 이보다 주석의 양이 많아지면 쉽게 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주석광상이 편재되어 있고 그 양도 극히 적어 어떻게 주석 자원을 확보하였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한국과학기술원>최주 박사는 지적했다.

한편 주석과 마찬가지로 용융점을 낮추며 주조의 효과성을 높인다. 그러나 주석보다 제련하는 것이 다소 어렵기 때문에 주석보다 후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용융점이 매우 낮은 금속이며 동광석에도 소량 들어 있으나 주로 ()광석에서 추출한다.

앞에서 여러 번 설명했지만 청동기고대사회를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청동기 시대가 되어서야 인류가 본격적인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 수준이 높아졌고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이 시기에 국가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동기 시대에 청동 제품은 일반인들이 함부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다. 당시 최첨단의 청동 제품위정자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청동 단검통치 권력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학자들이 청동기 시대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는 지를 규명하는 데 열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남도 성천군 백원리 9호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세형동검과 팽이토기는 이를 측정한 학자들 놀라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시료(試料)연대를 측정한 자료에 의하면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는 3368±522, 열형광법으로는 3324±465, 핵분열흔적법으로는 3402±553 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덤의 축조 연대가 적어도 기원전 14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세형동검 역시 기원전 14세기에 제작됐음을 의미한다.

세형동검이란 동창(銅槍), 동과(銅戈)와 함께 주로 한반도에 나타났다고 하여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부르는데 비파형동검을 조상으로 한다. 몸체 길이40센티미터 정도이고, 폭은 34센티미터 정도로 좁고 날이 잘 서 있다. 칼의 몸체가 날씬하고 우아하며, 그 선이 매우 아름답다. 또한 칼의 몸체 가운데를 관통하는 굵은 척추뼈와 같은 줄기가 붙어 있는데, 날과 이 줄기 사이에 약간 도려낸 부분이 있다. 칼의 몸체 이외에 칼자루와 칼자루 장식을 별도로 제작하여 조합했으며 비파형동검보다는 두께가 다소 두껍다.

그러나 북한 발표는 관련 학자들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고대문화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로부터 전달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황하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대략 기원전 2200경이고(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청동기는 감숙성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의 주석이 610% 포함된 청동칼로 기원전 18001900년에 제작되었음), 고조선 지역과 문화적으로 관련 있다는 시베리아의 카라수크 문화는 기원전 1200년경에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2세기가 상한선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들 문화에서 영향 받았음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면 한국의 고대사는 기원전 12세기를 넘어갈 수 없다. 이것이 기원전 3000으로 인식되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에 문제점이 있으며 한국의 고대사는 기원전 1000년이 상한선이라고 일부 학자들이 부단히 지적하던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런데 세형동검의 상한선이 기존 학자들이 생각하던 연대보다 10세기나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이 발견되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세형동검의 전신인 비파형 단검문화를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천군 백원리 9호 고인돌 유물의 측정치를 인정한다면 우리나라의 세형동검이 비파형동검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모순점이 생기는 데다 기원전 12세기를 상한선으로 잡고 있는 시베리아의 카라크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역설까지 성립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정설이 엉망이 된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하는 사태의 1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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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모순은 당연히 세형동검의 전신인 비파형동검의 연한을 얼마까지 올려야 하느냐는 문제와 우리나라에서 청동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느냐로 귀착한다. 세형동검의 제조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14세기로 올라간다면, 비파형동검이 이보다 훨씬 오래 전에 출현했다는 예측은 당연한 것이다. 한편 북한 측은 세형동검기원전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한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청동기가 등장한 시기는 이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추정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증거였다. 정황상 당연한 추론이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보다 오랜 연대를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파형동검의 연대>

예기치 못한 문제에 봉착해 있을 때 북한학자들은 또다시 학자들의 우려를 말끔하게 씻을 수 있는 증거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북한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선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연대의 청동기 유적평양남도 덕천시 남양 유적 16 팽이그릇 집자리에서 나온 것으로 측정 연대는 무려 기원전 3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팽이그릇문화는 평양을 중심으로 청천강이남 한강 이북 북대봉 산줄기 이서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우리나라 고유한 청동기 시대 문화로 이들은 보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발견된 평양시 부근의 상원군 장리 1호 고인돌 무덤은 뚜껑돌의 길이가 630센티미터, 너비 405센티미터, 두께가 72센티미터나 되는 오덕형 대형 고인돌 무덤인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됐다. 무덤칸에서 청동방울 2, 청동 2인 교예 장식품 1, 청동끌 1를 비롯한 청동 제품과 활촉 70여 개가 나왔고 군사 지휘봉별도끼3개가 나왔는데 국왕급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절대 연도는 기원전 3천 년 전반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비파형동검세형동검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도 발견된 것이다.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 16호 집터와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의 4, 5호 고분에서 비파형 창끝이 발견되었고 룡곡리 유적에서는 청동 단추도 나왔다. 비파형창끝은 청동무기의 하나로 형태가 고대악기인 비파와 유사하다고 하여 비파형창끝이라고 부른다. 룡곡리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사람의 뼈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했더니 4539±197 전으로 나타나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것은 청동 유물의 연대가 기원전 2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 10호터에서 출토된 비파형창끝은 끝이 뾰족하지 않고 너비가 넓으며 크기도 작아 남양리나 룡곡리 것보다 덜 세련된 모습을 갖고 있다. 이것은 표대유적 비파형창끝이 이들 두 장소의 창끝보다 오래전에 만들어 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북한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의 비파형동검문화기원전 30세기, 5천 년 이전에 발생하였다고 추정했다.

비파형동검북한에서 2, 남한에서 1이 분석되었는데 그 조성은 아래와 같다. 북한의 것은 그 후에 나타나는 세형동검과 같이 Cu-Sn-Pb계이지만 남한의 것은 Cu-Sn계 합금이다. 남한에도 납이 0.48 % 들어있으나 1 % 미만은 구리 제련시 불순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Pb를 첨가하면 금속구조가 치밀해지고 표면이 견실해지며 쇳물의 유동성이 좋아져 주조하기 쉽다.

특히 남한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가운데 칼자루를 경부에 묶기 위하여 경부에 홈이 파여 있는 동검을 납동위원소비(同位元素比)광석의 산지를 추정했는데 여기에 쓰인 광석은 다 남한산이라고 최주 박사는 설명했다.

대전시 비래동 출토 비파형동검의 검신도 잘 주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신천(傳信川) 출토의 칼손잡이는 청동으로 주조되어 있고 뇌문(雷文)이라 하여 굴곡진 극히 섬세한 선이 나란히 주출(鑄出)되어 있는데 이를 보아 당시의 정밀 주조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평양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은 두 가지 면에서 세계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첫째는 중국이 내세우는 기원전 22세기보다 훨씬 빠르다는 점이고 둘째는 청동제품의 연대가 단군시대로 인식되는 기원전 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기원전 3000경에 청동기로 여겨지는 고인돌과 청동제품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청동기라야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는 실증사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실증사학자들은 한국의 청동기를 1000여 년 전으로 간주했고 이것을 근거로 단군 등은 거론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이 기원전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남한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함께 국사교과서의 연대를 올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초기의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청동기술이 계속 발전되어갔다는 점이다.

중국 요령성 심양시 우홍구 정가와자 6512호 무덤에서 발견된 비파형 단검과 청동 활촉주석 함유량은 많이 달랐다. 이 무덤에서는 797점의 부장품이 발견되었는데 대다수가 청동 제품이었다. 그 가운데는 방패와 활촉, 도끼와 끌, 손칼, 마구류, 수레 부속품, 단추, 구슬, 거울 등이 발견되었다. 비파형 단검의 경우 동이 72.43퍼센트, 납이 6.84퍼센트, 주석이 13.52퍼센트였고 청동 활촉의 경우 각각 66.39, 11.62, 9.93퍼센트였다.

김정배 박사가 측정한 중국 내몽고의 남산근 청동기(서주및 춘추시기)의 경우에도 주석 함량은 1215퍼센트, 납 함량은 45퍼센트, 동은 8084퍼센트였다. 이는 강도가 중요한 단검에는 다른 물건보다 주석의 비율을 높게 했고 대량으로 소모되는 활촉에는 주석의 함량을 대폭 낮춤으로써 값비싼 주석을 절약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강상무덤의 청동 그물 장식품0.25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가는 구리실로 천을 짜듯 엮었다. 이렇게 가는 구리실을 뽑아내어 그물을 엮었다는 것고도의 섬세한 제련 가공기술이 아니면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일이다.

청동거울은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북방(또는 서방)전래설즉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간주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34년 중국 하남성 안양현의 은나라 수도였던 은허의 고분에서 처음으로 기하학적 무늬 거울이 발견되었고 1976년에는 역시 은허에서 은나라 무정왕(武丁王)의 왕비인 부호(婦好)의 묘에서 4면의 기하무늬 거울이 발견됨으로써 시베리아 지방 청동거울의 기원설은 자리를 감추었다고 이형구 박사는 적었다. 이들 유물의 제조 시기가 시베리아의 청동기시대보다 연대가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비파형 창끝

고조선은 후기에 이르러 철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울만큼은 청동으로 제작해 사용했다. 청동거울90여 개가 한반도 전역과 만주 일대, 특히 요동과 요서 지방 그리고 소량이지만 일본 열도에서도 발견됐는데, 이 지역들은 고조선의 영토, 생활권 또는 무역권의 범주에 해당한다. 고대 사회에서 청동거울은 오늘날과 같이 화장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초기 국가사회의 통치자 내지 지배계급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청동거울을 만들 때는 무기 제작 때보다 구리에다 주석을 많이 넣고, 아연과 납의 비율을 올렸다. 그래야만 주조성과 반사효과를 높이고, 색깔도 변화시켜 장식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용도에 따라 주조를 달리하는 현대의 화학공식을 알았던 것 같다. 불의 온도를 높이는 데 효율적인 청동야금로를 제작하고, 풍구(풀무)를 만들어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