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치(雉)를 갖춘 석성(石城)
고구려는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혈투를 벌렸다. 인구가 적고 자원이 많지 않은 고구려가 자원이 많고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이와 같이 혈투를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중국에 비견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2대 전략이자 전술은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다. 고구려는 200여개소가 넘는 산성을 요충지에 건설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남다른 산성 축조 방법 즉 산성에 치성(雉城 또는 치) 또는 마면((馬面)을 기본으로 건설했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 구조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거리를 두어 마면(馬面, 치)과 단루(團樓)라는 돌출부분을 설치했다. 송나라의 심괄(沈括)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마면이 단루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성벽 위에는 안전하게 사격하기 위해 좁은 구멍의 방벽인 여장을 만든다. 또한 적을 정찰하거나 사격을 할 수 있는 일정 간격의 적루(敵樓)라는 망루도 설치한다. 성벽의 특수한 시설로서 경우에 따라 돌문(突門)이라는 문이 있다. 이것은 성벽 외부에서는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없게끔 위장돼 있는데 포위하고 있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 성 밖으로 돌진할 때 이용한다.
사람이 출입하는 성문은 대개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 성벽 중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고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성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적군이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성문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전투 시 화공(火攻)에 견딜 수 있도록 문에 진흙을 바르기도 하며 성문 위에는 물통을 설치하여 불이 붙었을 경우 진화할 수 있도록 방화수를 준비한다.
문 위에는 방어와 정찰을 강화하는 전루(煎樓)라는 높은 망루가 있다. 또한 성문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성문 바깥쪽 둘레에 옹성(甕城)이나 월성(月城)이란 반원 모양의 성벽을 만들어 놓는다. 이런 모습은 수원화성에서도 볼 수 있다. 운하로 연결된 도시는 모두 수성문을 설치했다.
여하튼 치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한민족 특유의 석성 구조이지만 고구려에서 처음 탄생한 것이 아니다. 내몽골 홍산 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에 속하는 음하(陰河) 상류 삼좌점(三座店) 유적은 확실하게 국가 성립의 개연성을 보여준다는데 중요성이 있는데 유적의 전체 면적은 14,000제곱미터이며 건물터 수 십 곳과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우물은 물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으며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특히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벽 중에서 내성 북쪽 성벽의 ‘치’는 5미터 간격으로 13개나 발견된다. 이들 석성이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한민족 전형의 초기 형식을 보여주는 석성으로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또한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으로 쌓았는데 이들은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하가점 하층문화인들이 치가 촘촘하게 배치될 정도로 견고한 석성을 쌓았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데 년대가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마디로 치는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처음 등장하여 고구려를 이어 한민족의 정통적인 석성으로 이어지는데 치는 당나라 때 까지도 중원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성은 평지만이 아니라 지형을 이용하여 산에다 축성했다. 이를 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이중 길이가 가장 길고 규모가 큰 것이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13. 온돌
온돌(Ondol)은 개정판 옥스퍼드 사전에 김치(Kimchi)와 함께 실려 있을 정도로 국제어로 인정받고 있다. 이 사전은 온돌에 대하여 아궁이에서 방바닥 밑으로 난 통로를 통해 방을 덮히는 난방이라고 적고 있다. 네델란드의 위트센은 1690년에 발간한 『북과 동 타르타리아(북아시아)지』에서 온돌에 대하여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문 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라고 기록하였다. 온돌을 사용하는 한국의 주거가 세계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인공적인 주거는 대체로 기원 전 5000년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에는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나무로 지붕틀을 짜서 덮은 구조였지만 점차 주상 주거로 발전한다. 움집에서는 움의 내부에 화덕 자리를 두어 난방을 했지만 주상 주거로 발전하자 당연히 난방 방식이 달라졌다. 이 때 나타난 것이 온돌이다. 온돌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들 고래를 만들고 고래 위에 구들장을 놓아 아궁이를 통하여 받아들인 열을 구들장에 저장했다가 서서히 복사열을 방출하여 방바닥이 따뜻해지도록 고안된 난방구조를 말한다.
온돌의 원리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복사 난방방식의 일종이다. 방고래를 통해 화기(火氣)를 보내 달궈진 구들이 방출한 열로 난방 하는 것인데 온돌은 방바닥을 고루 덥혀 주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래식 온돌의 경우 실내 기후는 비교적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으나 아궁이와 굴뚝 등을 통해 손실되는 열량이 많기 때문에 실제 열효율은 30퍼센트에 불과하여 에너지 측면에서는 매우 불리한 방식이다. 때문에 난방만 하였을 때의 비효율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하여 취사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했다.
온돌이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는 구들장의 재료로 운모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운모는 화성암과 변성암에서 흔히 발견되는 광물인데 이중에서도 백운모는 열이나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절연체인 백운모 구들장은 아래의 뜨거운 열기를 한꺼번에 방 안으로 내보내지 않으므로 과열 현상 등을 막아준다.
그 뿐이 아니다. 구들장의 두께가 아랫목과 윗목이 다르다. 아랫목의 경우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가깝기 때문에 과열될 수 있으므로 두꺼운 돌을 쓰고 여기에 진흙도 두껍게 바른다. 이 때문에 아랫목의 구들장은 많은 양의 열을 저장할 수 있다. 반면에 윗목의 구들장은 얇게 해 빨리 가열되도록 한다. 방이 식을 때는 이와 반대의 작용을 한다. 한 마디로 온돌은 한국인들의 오랜 연구로 완성된 과학 기술 성과물이다.
동이족의 터전인 홍산 지역에서 온돌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다. 기원전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흥륭와문화에서 온돌아궁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또한 영변군 세죽리,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 유적들에서 온돌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세죽리 5개의 집터 중 2개의 집터에서 온돌이 발굴되었는데 온돌은 ‘ㄱ’자형 외고래 온돌이었다. 온돌 고래는 납작하고 길쭉한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얇은 판돌을 덮어 만든 것이다. 고래의 맨 앞부분에는 고래보다 깊은 아궁이가 있었다. 온돌 고래의 길이는 3~4미터였다. 이 같은 온돌 유적은 중국 동북부의 무순시에서도 발견됐다. 이 지역 역시 고조선의 영역으로 이는 초기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보았던 기존 학설보다 앞선 것이다.
온돌이 발견되는 지역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지역인데 이들 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온돌이 발생됐으리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은 홍산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이다.
여하튼 온돌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중국의 옛 지리서인 『수경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500~513년 북위의 역도원이 저술한 것인데 ‘방바닥 밑에 여러 가닥으로 돌을 괴고, 위에 진흙을 발라서 불을 피워 여러 갈래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한다’는 온돌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온돌의 시기는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지금부터 50,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약 1백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황하 유역의 주구점 두개골 화석 유적에서 발굴된 바닥에 깔려있는 화원석 등으로 미뤄보아 구석기시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온돌이 발생됐으리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한민족의 온돌에 관한 기록은 중국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 보인다. 고구려인들의 주거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거처는 반드시 골짜기를 의지하여 지었고, 지붕은 띠나 풀로써 이엉을 지었으나 불사(佛寺)나 신묘, 왕궁, 관아만은 기와지붕을 하였다. 그 풍속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불사’라는 구절을 보아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소수림왕 2년(372년) 이후의 기록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갱은 중국 사람들이 ‘캉’이라 부르는 난방시설이다. 캉과 온돌은 기원이 같은데 온돌이 바닥 전부를 데우는 반면에 캉은 실내의 한 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분만 데우는 것이다. 중국인과 만주족은 신을 신고 다니는 입식문화인 탓에 창 쪽의 ‘쪽구들’이나 ‘반구들’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한국과 같은 통구들과는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장갱(長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 한다는 말은 상류 계층에서는 온돌이 아닌 난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상류 계층에서는 철제 화로나 부뚜막 같은 별도의 설비를 방안에 두어 난방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벽화는 주인공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고구려시대에 이미 의자에 앉는 입식문화와 책상다리로 앉는 온돌문화가 혼재하였다고 추측한다.
현재 중국은 온돌도 중국의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온돌이 중국의 동북아에서 태어났고 이지역이 현재 중국 영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일부지역에서 캉(실내의 한 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분만 데움)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온돌은 캉이 통구들로 변하여 보다 넓은 면적을 난방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돌의 원전은 중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북아 즉 홍산, 고조선에서 창안된 난방구조인 온돌은 중국의 중원에서 활용되지 않고 오로지 동이족의 터전에서만 정착된다. 현재까지 온돌의 틀을 갖고 이를 전수한 민족은 한민족이다.
한국이 온돌을 자랑하지만 굴뚝이 온돌의 발명품이다.
사람들은 굴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아파트가 아닌한 일반 건물의 난방이라면 당연히 굴뚝을 생각하지만 이는 한국의 경우고 서양의 경우는 굴뚝이 시작된 것은 르네상스이후이며 근대의 굴뚝은 18세기 이후다. 사실 이것은 현지의 기후 때문으로 볼 수 있는데 아열대 기후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굴뚝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추위에 불가항력적으로 모닥불 등을 땔 때를 대비하여 천장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몽골 유목민들의 천막(Yurt)과 동일한 개념이다. 즉 세계를 제패했다고 자랑하는 자존심의 로마인이지만 추위에 못이기면 지금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천막처럼 천장에 뻥 뚫린 구멍으로 연기를 빼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에 한국은 선대부터 온돌을 사용했는데 온돌과 부뚜막에 굴뚝이 필수적임은 사실이다. 그런데 부뚜막은 동이족의 취사 방법에 의한 것이다. 유럽의 경우 부뚜막이 없는 것은 야영 생활할 때 물을 끓이려면 쇠막대기로 만든 삼각대에 코를 꿰듯 냄비를 매달아 놓고 음식을 끓인다. 그런데 한국인이 야영할 때는 어김없이 어디에서든 호박돌을 구해 부뚜막을 만들어 반합을 올려놓는다.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은 한국적 문화의 모형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다른 것은 중국인은 주로 음식을 튀겨 만드는데 반해 한국인은 끓이고 볶고 삶고 찌고 썩힌다. 즉 한국의 음식 문화 기반은 고도로 발달한 탕반류다. 북방계열의 탕반 문화는 동복으로도 알 수 있다. 즉 전쟁터에서조차 뜨거운 국을 담은 통을 날라야 싸움이 되었다. 가마솥이 더운 음식 문화의 터전을 만들어 일본으로 전해져 가마쿠라라는 지명까지 있을 정도다.
가마는 한국 특유의 주방시설로 한국인은 이것으로 밥을 짓고 찜을 만들었고 떡을 해 먹었다. 가마솥의 뚜껑을 뒤집어 커다란 프라이팬으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집안이 아니면 밖에도 임시 부뚜막을 만들었다. 가마솥 문화의 부뚜막은 온돌의 전형이다.
그런데 초기 온돌은 부엌의 일부였다. 이것은 온돌과 부뚜막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국 북부에 가면 현재도 이런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뒤 온돌방이 바로 안방이 되고 그 중 가장 따스한 곳을 아랫목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온돌은 민초들의 문화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양반들은 마루방에서 입식 생활을 중국식의 생활 즉 품위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온돌방은 99칸 집이라 할지라도 한두 개의 방만 온돌로 만들었는데 이는 노약자나 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즉 온돌은 조선 후기에 가서야 보편화되었다.
또한 굴뚝 중간 정도에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을 설치해 아궁이에서 불을 지필 때에는 열어 두었다가 가열이 끝난 후에는 닫아서 뜨거운 공기가 쉽게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크기는 작지만 이 문의 역할을 상당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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