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인돌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로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한반도 전역의 고인돌은 북한지역의 황해도 은율과 평양 등 북한에 14,000기 정도가 있고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남한에 약 24,000기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수몰 지구를 발굴하면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고인돌까지 모두 계산하면 남·북한 합쳐서 50,000기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 산재한 고인돌은 약 80,000기로 추정하는데 거석유물이 많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의 경우 고인돌이 1,500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요령지방(고조선 영역)에 316기, 일본 구주(九州) 지방에 600여 기, 인도네시아에 2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남지역에서는 2,200여 곳에서 무려 20,000여 기가 발견되어 세계적으로 단일면적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특히 일본의 코모토 마사유키가 1960년대 한반도에는 고인돌이 80,000개 이상 있었다고 지적한 것을 볼 때 한국에 얼마나 많은 고인돌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 고인돌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는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고인돌의 모양새나 규모에만 호기심을 가졌을 뿐 이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인돌 속에서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이 거대한 바윗돌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인돌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치밀한 기초공사가 필요한 구조물이다.
<고인돌의 기능>
고인돌의 정확한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설들이 있으나 19세기 말까지는 대체적으로 제단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외형적으로 웅장함을 드러내는 대형 거석일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령지방의 탁자식 고인돌 중 일부는 후대에 종교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고인돌에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 잘 살기를 비는 마음과 남은 후손을 위한 기도의 마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고인돌은 처음에는 무덤으로 만들어졌지만 고대인들의 조상 숭배와 조상에 대한 종교적 제사 활동을 진행하던 성지로 활용됐다는 주장도 있다.
매장 방식을 보면 북방식 고인돌은 주검을 안치하는 곳, 즉 주검 칸이 지상에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은 주검 칸이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특히 북방식은 비교적 넓고 편평한 땅 위에 세워 네모난 상자 모양의 방을 만든 다음 바닥에 시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것이다.
남방식은 큰 굄돌로 괸 바둑판식(지하에 판석이나 할석 등을 이용하여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낮은 받침돌로 뚜껑돌을 올려놓은 것)과 개석식(蓋石式 : 받침돌 없이 뚜껑이 직접 지하 돌방을 덮고 있는 것)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강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대부분 땅 밑에 판돌을 맞춰 넣어 만들거나 깬돌이나 냇돌 등을 쌓아 돌널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었다. 무덤 위에는 큰 뚜껑돌을 얹으므로 일반적으로 뚜껑돌만 보이므로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달리 사람 뼈와 함께 부장품이 출토된다는 사실이다. 부장품으로는 여러 가지 토기와 화살촉 같은 석기들뿐만 아니라 비파형 청동검, 한국형동검, 옥, 석검 등도 발견된다. 둘째는 고인돌의 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무거운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군 운곡리 24호 고인돌로 길이 6미터, 너비 4.5미터, 높이 3.5미터로 무게가 무려 297톤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남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사적 410호, 일명 핑매바위) 고인돌은 길이가 7미터, 너비 5미터, 두께 4미터, 추정 무게가 무려 280~300톤이나 된다. 그러나 대신리 고인돌을 280~300톤으로 추정할 경우 현재까지 영남 지역에서 최대 고인돌로 인정하는 울산시 언양읍 서부리 고인돌의 경우 길이 9.3미터, 너비 6.3미터, 높이 3.75미터로 대신리 고인돌보다 무거운 400톤 이상으로 추정된다.
뚜껑돌의 길이도 언양 고인돌이 세계 최대다. 현재까지 뚜껑돌 길이로 세계 최고의 기록은 북한 은률군의 관산리1호 고인돌로 길이가 875센티미터에 달하며 중국의 최대 고인돌로 알려진 요녕성 개주 석붕산 고인들의 뚜껑돌 길이는 860센티미터다. 그런데 언양읍 서부리 고인돌의 경우 뚜껑돌의 길이가 9.3미터에 달하여 길이 부분에서 세계 최고로 추산된다. 이 길이는 북한에서 현재의 뚜껑돌 길이는 778센티미터이지만 파손되지 않은 원형은 길이 910센티미터라고 주장하는 안악군 로암리 고인돌보다 길다.
또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무리 중에서 유달리 큰 고인돌이 하나씩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우리나라 고인돌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1~2기가 독립적으로 발굴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10여 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100~200기씩 무리를 지어 있는 채로 발견된다.
유달리 큰 고인돌은 촌락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추정은 고인돌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만한 노동력과 시일이 필요한가로 가늠할 수 있다. 영국의 호킨스는 스톤헨지(stonehenge) 건설을 운반, 돌 다듬기, 세우기 등으로 나누어 얼마의 인력이 필요한가를 직접 실험으로 연구했다.
<대형고인돌 운반>
대형 돌의 운반에는 그 무게에 따라 동원되는 인력이 달라지지만 콜스와 모헨 등 고고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1톤의 무게를 둥근 나무 위에 올려놓고 150미터 옮길 때 대략 10명 정도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설명된다.
반면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로 인정하는 스톤헨지의 경우 호킨스에 의하면 1톤의 돌을 1.6킬로미터(1마일) 옮기는 데 16명이 필요하고 50톤의 돌을 세우는 데는 200명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제시한 숫자는 70톤 덮개돌 운반에 1,120명, 50톤 받침돌 운반 800명, 받침돌 세우기 200명으로 하루에 최소한 2,120명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돌 다듬기와 부수적으로 필요한 인력(통나무의 운반이나 지렛대의 작동 등) 또 덮개돌을 완전히 받침돌 위에 올리는 작업 등에 필요한 인원을 합치면 하루 4,000명이 필요하게 되지만 일반적으로 1톤을 옮기는데 10명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설명된다.
KBS HD 역사스페셜도 약 6.8톤의 고인돌 뚜껑돌을 만들어 옮기는데 약 70명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40〜50톤 무게의 뚜껑돌을 옮기려면 400〜500명 가량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스톤헨지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는데 1994년 고고학자 줄리언 리처즈 박사는 모조 석재로 한 실험으로 운반 과정을 재현했다.
지레를 써서 돌을 나무받침에 얹은 다음 밧줄을 묶어 끌었다. 보통은 받침 아래에 롤러를 놓고 굴리지만 실험에서 토목기술자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나무 궤도에 기름을 많이 칠하고 받침을 미끄러뜨리는 것이다. 돌이 자리를 잡고 적당히 흔들리면 130명의 인원으로도 충분히 끌 수 있었다. 이는 고인돌을 축조할 때 필요한 장정은 앞에 설명한 톤 당 10명이 아니라 3〜4명 정도로도 운반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언양 서부리 고인돌의 경우 400톤으로 추정하면 당대에 4,000여 명이 동원되어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리처즈 박사의 설명에 의한다하더라도 1,200명에서 1,600여 명이 필요하다.
당대의 주거 여건을 감안하면 한 거주 공간에 1,200~1,600명이 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청동기 시대의 한 부락 거주 인원을 100~150명으로 계산한다면 한마을에 장정을 절반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인돌을 제작할 수 있는 장정을 동원하기 위해서 적어도 약 20~30개 마을이 동원되어 고인돌을 건설했다는 추정이 나온다.
이영문은 300여톤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신리 고인돌의 경우, 입지적 여건을 고려하면 그 장소에서 1,000여 명이 들어설 수 없으므로 원천적으로 고인돌을 옮길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한국 고인돌이 갖고 있는 대형고인돌 운반의 문제점을 구조역학적 측면을 고려하여 계상했다.
보통 사람이 땅위에서 짐을 끌 수 있는 견인력은 자기 몸무게만한 크기다. 60킬로그램의 사람의 경우 한 사람의 견인력은 600 뉴톤이다. 이에 기초하면 대형 고인돌 부재의 운반에 투여된 사람이 몇 명인가를 대체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50톤 규모의 고인돌 부재를 통나무 고임목을 깔아 운반하였다고 가정하면 판돌의 무게는 약 3 x 10^6뉴톤이 된다.
통나무고임목의 직경을 20센티미터라고 가정하면 굴림계수는 0.05가 되므로 약 240여 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밧줄로 전면에서만 끄는 것이 아니라 좌우 약 15〜30도로 양쪽으로 나누어 끈다면 cos15〜cos30도가 되므로 적어도 10% 정도는 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비계수를 30% 정도 고려하면 약 300명의 인원으로 충분하다. 100톤의 경우 이에 비례하여 100명 정도면 충분하며 200톤의 경우 200명으로 충분하다는 계산이 된다. 통상적으로 그동안 설명되던 1톤 당 10명으로 설명했지만 그의 1/10으로도 충분히 견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인원이라면 화순, 고창, 울산 등지의 거대한 고인돌을 당대에 옮기기 위해 필요충분한 장정을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한국에서 고인돌이 중요시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고인돌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구성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고인돌은 비록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인돌 자체만을 갖고도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즉 고인돌의 연대가 올라갈수록 바로 그 시기부터 국가가 성립될 개연성이 있다고 설명된다. 중국 요령성 소재 고인돌은 기원전 20세기에서 15세기에 축조되었다고 측정되는데 홍산 문화권으로 인식되는 한반도로 들어오면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북한은 평양 일대의 고인돌 무덤을 침촌형, 오덕형, 묵방형 등 3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이 중에서 침촌형은 그 연대가 무려 기원전 4천 년 후반에 해당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스톤헨지나 프랑스의 카르나크 열석과 비슷한 시기이다.
또한 고인돌에서 나타난 인골의 특징은 대체로 뼈가 튼튼하다는 것이다. 체질인류학의 해석에 의하면 이들이 생전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살았으며 사회를 지배한 상층계급이었음을 알려준다. 고인돌에 묻힌 어린아이의 인골의 상태도 매우 좋은데 비록 어린아이였을지라도 보호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만한 혜택을 누렸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인돌이 한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중국 동북 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령 지역 고인돌 분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비파형동검 분포권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요동반도의 신금현 쌍방, 한반도의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천 적량동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이는 비파형동검 문화가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요동반도의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북방식 고인돌과 상통한다. 이것은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 집단이 동일한 문화단계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 영구광역시(營口廣域市) 개주시(蓋州市) 이대진(二臺鎭) 석붕산(石棚山) 인근에 있는 석붕고인돌은 중국 최대 크기의 고인돌로 대련에서 심양으로 가는 길목 중앙 지점 정도에 위치한다. ‘허가둔석붕(許家屯石棚)’ 또는 ‘구새석붕(九塞石棚)’이라고도 불리는데 덮개돌의 길이는 8.6미터로 중국 최대 북방식 고인돌로 폭은 5.7미터, 두께는 0.3〜0.5미터로 재료는 화강암이다. 동ㆍ서ㆍ북 삼면은 마면 석판으로 둘러쳐 있는데 석판(굄돌)의 동서 길이는 2.6미터, 남북의 길이는 2.66미터이며 두께는 0.17〜0.20미터이다. 석판 밖으로 덮개돌이 처마를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이 고인돌은 3,000여 년 전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물’ 즉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안내판에는 중국 최초의 지상축조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석교(大石橋) 석붕욕(石棚峪) 고인돌도 석붕산 고인돌과 유사한데 이런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이 후반기 고조선 영역으로 추정하는 이곳에 많이 산재되어 있다. 이들 요동반도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로 돌도끼, 붉은간토기, 돌화살촉, 가락바퀴 등이 있는데 이들 청동기 유물도 한반도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유사하다. 구조 형식으로 보아 거의 동일한 시기 즉 동일 계통의 유적임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이 요동지역 고인돌과 한반도의 고인돌과 유사한 점을 감안하여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을 이루면서 단일한 정치 체제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즉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을 조영하던 예맥 계통의 주민 집단이 황해 이북 연안 지역을 끼고 환상적인 배열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일정한 국가나 정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전라도에서 고인돌의 특별히 많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해석은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자료로도 이용된다. 이영문 박사의 설명을 인용한다.
‘고인돌을 축조한 사람들이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기존의 무덤 방식을 고집했다. 외부 문화가 토착문화인 고인돌에 흡수되는 양상을 띠고 있는 데 이런 현상은 전남 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과의 연계에 있어 고인돌은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 중국 중원지역에서 몇몇 고인돌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들은 과거 동이족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곳이다. 한마디로 고인돌은 한민족 고유의 유산이라 볼 수 있다.
한편 홍산 지역에서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의 출토지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요하유역의 요동지역에서는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이 발견되지만 요서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은 발견되는데도 고인돌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에 대해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을 만드는 큰 틀에서 동이족임은 같지만 서로 다른 풍습을 갖고 있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서로 융합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S.M. 넬슨은 고인돌 사회를 계층사회의 물적 증거로 간주했다. 그녀는 고인돌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며 고인돌이 넓은 분포도를 보이는 것은 인구가 계속해서 증가했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특히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무문토기시대나 청동기시대로 부르는 것보다 ‘거석문화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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