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한민족과 중국인 차별성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2) : 동복

Que sais 2020. 11. 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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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북방 기마민족의 상징 동복

홍산 문화 초기는 기온이 농사에 적합하였지만 후대 즉 하가점 상층문화 때부터 기후가 바뀌어 돼지가 발견되지 않고 양, 염소들이 발견된다. 이는 기후변화로 농경지가 광대한 초원지대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곳에서 기마생활을 기본으로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마로 생업을 유지하던 기마민족에게는 자신들만의 특성과 생존법,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에 갖고 다니는 동복(銅鍑, cup cauldron)이다.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출현하여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소멸되는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원래 동복은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도 간주되며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동복의 원래 용도정화의식(Purification rite)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는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용기로 무리 중에서 족장으로 추대되면 동복을 받아 항상 말안장에 얹어 놓고 다닌다. 일반적으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대형 동복의 경우 높이는 50~60센티미터이고 무게는 50킬로그램이 넘는 것도 있다.

 

김해 대성동 동복

한국에서는 두 가지 형태로 발견된다. 첫째는 금관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간주되는 국보 제91호의 기마인물상 토기이다. 기마인물상 토기는 신라의 경주 근교인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되었는데 높이 23.5센티미터, 길이 21.5센티미터이다. 기마상의 주인과 하인이 말을 타고 있는데 이들의 뒤쪽에 동복을 갖고 있다. 말 엉덩이 위에처럼 생긴 것이 바로 동복이다. 둘째는 김해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에서 보이는 흉노식 동복이다.

동복은 기본적으로 스키타이식과 흉노식(훈식) 두 가지로 분류된다.

스키타이식 동복반구형 기체둥근 손잡이가 한 쌍 달려 있고 손잡이에 작은 돌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흉노식 동복심발형(深鉢形) 기체에 곧은 직사각형의 손잡이가 한 쌍 달려 있고 손잡이에는 작은 돌기가 있는 것과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것이 있다.

동복은 내몽골의 오르도스지방에서 다수 발굴되었고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북방 약 100킬로미터 노욘산 지역에 있는 노인울라(Noin Ula, 몽골어로 왕후(王侯)의 산’) 고분군(현재까지 총 212기 발견)을 비롯하여 북몽골 지대의 도르닉나르스, 알타이산맥의 데레츠고에, 볼가강 유역의 오도가와 그 지류인 가마강 유역의 페룸, 서우랄의 보로쿠타지방, 남러시아 돈강 유역의 노보체르카스크,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도 발견되었고 중국의 북부 초원지대에서 발견된다.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 동복이 발견되는 것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이 이들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기마인물상 토기 종자상

훈족들은 동복을 말 엉덩이 위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의 경주 근교[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높이 23.5센티미터, 길이 21.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국보 제91)]에서 발견된 2개의 점토상에도 기마상 주인공이 동복을 말 뒤에 싣고 있다.

한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금관과 함께 대표적 상징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기마인물상 토기는 일반적으로 술이나 물 등 액체를 담는 용도로 설명되고 있다. 가야지방의 무덤에서 술잔 등 수많은 일상용 토기가 발견되므로 기마인물형 토기도 같은 용도라는 것이다. 반면에 김원룡은 말 궁둥이에 있는 것은 솥이 아니라 등잔형 주입구라고 설명했고 김태식은 신라 지증왕 3(502) 순장제도를 금지하자 사람과 말을 순장하는 대신에 명기(明器)를 부장한 증거라고 적었다. 명기란 장사지낼 때 시신과 함께 묻기 위해 따로 만든 것으로 지증왕 대부터 순장의 예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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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존 카터 코벨은 기마인물상 토기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상류층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로 술잔과 함께 말 모양 토기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말 앞가슴에 나 있는 주둥이의 위치. 말 잔등에 있는 배구로 액체를 부어 넣은 후 말 앞가슴의 주둥이로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말의 꼬리가 부자연스런 각도로 뻗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이 손잡이로 조정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코벨은 시베리아의 무속에서 말을 제물로 바쳐 죽인 뒤 의례의 하나로 그 피를 받아 마시는 과정이 있다고 적었다.

코벨말 모양의 토기가야와 신라 두 지역에서 함께 발견되는 이유를 기마민족의 유입으로 설명하면서 토기 내부를 화학적으로 분석한다면 피의 흔적이 발견될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특이한 형태의 기마인물상 토기의 용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술병 등의 역할이 아니라 고대의 무속 의례에서 희생된 말의 피를 담는 그릇이라면 여하튼 가야 지역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흉노()와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더불어 이들 솥이 말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마상 주인공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형식이며(일부 한국 학자들은 기마상의 인물도 유목민의 모습이 아니라 단순히 기마 풍습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안장과 등자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똑같다고 주장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일반적으로 등자훈족이 발명했다고 여겨진다.

이들 기마인물형 토기가 특수하다는 것은 같은 유형인 국보 제275호의 기마인물형 토기와의 차이로서도 알 수 있다. 이 토기는 출토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5세기경 가야시대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기마인물형이지만 국보 제275는 나팔 모양의 받침대 위에 기마 인물이 올라가 있는데 이것은 받침굽이 높은 가야시대의 고배와도 모양이 유사하다. 또한 말의 엉덩이 부분에 국보 제91처럼 동복이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쌍의 각배가 올라가 있다. 국보 275가 두드러진 점은 말 탄 무사의 복식과 마구국보 제91보다 훨씬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사의 투구와 갑옷, 목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는 경갑(脛甲), 방패, 마갑 등 무구와 마구가 매우 상세한데 결정적인 차이점은 말 앞가슴에 주둥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보 제91호와 제275용도가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복은 족장만이 가질 수 있으므로 엄격하게 관리된다. 즉 족장이 평소에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항상 말에 휴대하고 다니는데 족장이 죽으면 무덤에 갖고 간다. 몽골의 도르릭나르스에서 발견된 동복 내부에는 소의 등뼈가 담겨 있었으며 부장 시 동복의 입구를 비단으로 덮어 막았다. 이는 동복으로 소 등 가축을 조리했으며 비단을 덮을 정도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려준다.

족장이 죽으면 그와 연계되는 사람들을 모두 초청하는데 장례 기간 동안 동복에 말 등 희생물을 끓여 초청자에게 대접한다. 동복이야말로 사자와 함께 하는 도구인 것이다. 초청자들에게 동복으로 끓인 음식을 준 후 장례식 때 반드시 동복의 한 곳을 훼손한 후 매장한다. 이를 훼기(毁棄)라고 하는데 이는 북방기마민족의 장례 과정에서 행해진 특별한 행위라 볼 수 있다. 매장품의 훼기는 동복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토기의 아가리·바닥·받침 등 일부를 의도적으로 떼어내거나 동검이나 청동거울 등을 깨뜨려 그 일부를 매납하는 경우도 있다. 철기를 구부려서 부장하거나 말갖춤새 등에 흠집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훼기 풍습은 생명이 없는 물건인 토기·동기·철기 등에도 영혼이 존재할 것이라는 고대인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피장자를 위해 물건에 다른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주어야하는데 북방기마민족들은 물건을 훼손하는 것이 그런 목적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죽은 영혼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다시 현세로 찾아올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유물을 의도적으로 훼손했다는 의견도 있다. 즉 유물을 훼손함으로써 유물의 본래 기능이 없어져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학자들은 이러한 훼기 행위를 통해 장례 행위에서의 부정(不淨)을 털러버리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것으로 인식한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동복도 이와 같은 절차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몽골국립박물관의 에렉젠 박사는 흉노의 족장급 무덤이 거의 모두 도굴되었음에도 동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흉노의 동복(몽골 보르한 톨고이 63호고분)에도 동복이 발견되는 이유를 훼기 풍습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동복이 흉노의 수장급만 가질 수 있는 특수 용기이기는 하지만 훼기 즉 파손하여 매장하므로 도굴꾼으로서는 가치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요인 덕분에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증거들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동복은 북방유목민족이 활동하던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데 동복에 있는 문양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문양과 유사하다는 것도 주목되는 사항이다. 흉노의 일족으로 375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Hun)이 사용한 동복의 아가리에는 도형화된 나뭇잎들이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으며 훈족의 귀족부인의 장식 머리띠와 관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발견되는 금관의 경우 나무 형상[출자형(出字形 장식)]과 녹각 형상[녹각형(鹿角形 장식)]이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녹각 형상은 스키타이문화 등 북방기마민족이 사용한 유물에서도 자주 나타나지만 직각수지형 입식신라에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형태인데 훈족의 동복에서도 같은 형태의 문양이 나타난다. 나무 형상의 입식(立飾)은 북방 초원지대의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수지형(樹枝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우주 개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존재로 순록사슴과 우주수목을 차용했다. 고대 신화에 의하면 우주 순록의 황금뿔 때문에 해가 빛난다고 하며 순록사슴은 그 존재와 함께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금관에 해신의 금빛 비상을 사슴뿔 형상으로 정교하게 옮겨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527년 새로운 불교신화가 그 자리를 대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는 평범한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우주수목이라고 불린다. 지표에서 제일 높은 우주의 한 중심에 버티고 선 구조물로서 고대인들이 상상했던 하늘 즉 ()을 향해 상징적으로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한다. 코벨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자작나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남한 지역이 북방지역과는 기후가 달라 흰자작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데도 흰자작나무를 금관의 중요 요소로 장식했다는 것은 제조자들이 북방지역에 살았던 흔적이라고 인식했다.

 

백두산 자작나무 

추운 기후에 잘 자라는 자작나무는 높이 20미터에 달하고 나무껍질은 흰색이며 옆으로 얇게 벗겨지고 작은가지는 자줏빛을 띤 갈색이며 지점(脂點)이 있다. 은 어긋나고 삼각형 달걀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뒷면에는 지점과 더불어 맥액(脈腋)에 털이 있다. 나무껍질이 아름다워 정원수·가로수·조림수로 심는다. 목재는 가구를 만드는 데 쓰며, 한방에서는 나무껍질백화피(白樺皮)라고 하여 이뇨·진통·해열에 쓰는데 고대인들은 눈처럼 생긴 모양에 신통력이 깃들어 있다고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작나무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작나무는 매우 중요한 곳에 고의적으로 심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돈황 주위에 있는 자작나무이다. 그들은 자작나무돈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한 마디로 자작나무가 있는데서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도둑질 등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것으로 돈황에 있는 많은 석굴들이 지금까지도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는 것을 자작나무의 효력 때문이라고 믿기도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동복의 숫자도 적지 않다. 평양 동대원리정오동 1호 무덤소라리 토성 등 낙랑 고지에서 발견되며 경주 김해의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 29호분과 47호분, 양동리 235호분에서 동복이 각 1개씩 출토되었다. 그런데 동복은 남한의 백제·신라에서는 발굴되지 않았고 김해에서만 발견되었다. 또한 같은 형태의 철제품, 즉 동이 아니라 철복(鐵鍑)김해 양동 유적과 경주 사라리 유적에서 출토되었고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로 알려진 오녀산성에서도 쇠솥이 발굴되었다. 대성동 29호분과 양동리 235호분동복은 3세기말의 것이며 대성동 47호분의 것은 후세로 추정하는데 귀의 단면이 편볼록렌즈 형태.

이런 형태의 동복중국 길림성 북부의 노하심(老河深)과 흑룡강성 남부 일대, 한국인과 강력한 연계가 있다고 추정되는 시라무렌강 연변의 오르도스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근래 가야·신라의 지배족북방에서 내려왔다고 강력하게 주장되는 이유 중 하나도 우리나라의 남부 지역에서 발견된 이들 동복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