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래?(한국불가사의)/한민족과 중국인 차별성

한국(동이)과 중국(화이)(13) : 편두

Que sais 2020. 11. 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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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편두

1976에 발견되어 모두 4차에 걸쳐 180여 기의 무덤이 발굴된 4세기경의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분묘의 규모로 보아 최상위 계층이 아닌 일반 서민 계층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 예안리는 현재 낙동강 삼각주의 북부에 해당하지만 옛날 지형으로 보면 고김해만(古金海灣)의 하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190여 평의 좁은 면적에 상하로 4겹 정도 중복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무덤 속에 1, 많게는 10여 구의 인골이 남아 있었다. 부장품인 1000여 점의 토기를 비롯해 총 2000여 점의 유물도 나왔다.

현재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예안리 인골은 수적으로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지만 더욱 학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1600여 년 전의 인골이라고 보기에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은 대체로 산성이 강하여 부장된 것이 무엇이든 잘 썩지만 예안리 유적은 유적 상부에 형성된 패총의 영향으로 토양이 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안리인들의 형질적 특징으로는 평균 신장이 남성은 164.7센티미터, 여성은 150.8센티미터이며 현대인에 비해 비교적 안면이 높고 코가 좁으며 코뿌리가 편평한 편이다. 또한 전체 사망자 중 남자보다는 여자, 그중 장년층(40)의 여성 사망률이 높고 12세 이하의 사망자가 전체의 1/3이상이나 되어 당시의 유아 사망률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예안리 편두(좌측), 정상두개골(우측)

그런데 학자들의 주목을 크게 끈 것은 모두 10례의 변형 두개골이다. KBS-TV2001년에 기획한 몽골리안 루트에서는 예안리 85호와 99호 고분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변형 두개골을 소개했다. 이들 두개골의 머리둘레는 50센티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상적인 머리둘레인 57.5센티미터보다 매우 작다. 이렇게 인공 변형된 두개골을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라고 부르며 외압에 의해서 두개골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편두에 관한 기록은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납작하게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다.”

 

기록 속의 진한(辰韓)3세기 중엽의 진한과 변한(弁韓), 김해지역의 가야인이 여기에 포함된다. 기록 속에만 존재하던 편두의 실체가 예안리 인골에서 확인된 것이다. 편두 풍습에 대해 일본인 평전구마삼(坪井九馬三)고대 인도에서 행해진 구습으로 설명했지만, 일반적으로 유목민(코카서스 북부, 터키 등)에게 많이 나타나는 풍습으로 인정한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2권에서 만주지방에는 옛날부터 편두하는 관습이 있어 어린아이 때부터 와구(臥具)를 이용해 머리통 모양을 인위적으로 편두형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인 도오랑(島五郞)도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머리의 앞뒤 최대 길이가 매우 짧은 단두개형(短頭蓋形)이라는 형질인류학상의 측정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황하 하류의 산동·강소 북부 일대에서 이른바 동이계 신석기시대 문화로 알려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유적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후두부를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편두형 모습도 발견됐다. 이것은 동이족들이 중국인과는 달리 편두 습속을 매우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대학교의 박물관에도 말갈계의 편두형 인골이 있어 이들이 고대에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준다.

 

편두인 이집트 투탄카옹 파라오

편두 풍습은 중국과 훈족의 이동로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행해졌다. 남아메리카의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는 물론 멕시코에서도 발견된다. 미국 서남부의 인디언에서도 발견되며 대양주의 뉴기니, 뉴칼레도니아, 뉴헤브리디스제도 등 고립된 섬에서도 보이며 소아시아, 카프카스, 아르메니아, 중앙아프리카, 인도에서도 발견된다. 중앙아프리카의 몸부투는 물론 이집트에서도 보인다. 종교의식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 조각품은 3300여 년 전의 투탕카문의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는데 복원된 예안리의 편두 얼굴과 여러 면에서 일치한다. 이마 부분이 들어가고 코 부분이 돌출했으며 턱뼈의 각도가 둔각으로 돼 얼굴 앞쪽으로 나오고 뒤통수가 올라붙은 점 등이 전형적인 편두였고 근래 미라를 근거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된 이집트의 투탕카문왕의 얼굴도 전형적인 편두. 편두는 현대인의 눈에는 다소 기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지역의 무당들이 편두라고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몽골에서부터 프랑스까지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묘를 발굴하면서 훈족의 머리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특별한 사실을 발견했다.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두개골이 변형되어 있는 편두였다. 특히 훈족의 본거지였던 판노니아의 기요르(현 헝가리)에서 많은 편두 인골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훈족의 특이한 모습은 훈족에 대해 경멸감을 숨기지 않았던 마르켈리누스의 설명이 매우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헝가리의 마르칙 박사는 뼈가 부드럽고 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린 시절에 아이의 이마 부분에 넓적한 물건을 놓고 두개골 주위를 둘러서 묶으면 이마는 완전하게 납작하게 변형되며 머리는 위쪽으로 뾰죽한 형태로 변형된다고 설명했다. 부산의과대학의 김진정 교수는 아기의 머리 앞뒤로 판자를 대고 끈으로 묶기를 10여 차례 반복하면 아기의 유연한 두개골이 앞뒤로 납작해진다고 한다. 태어난 지 1개월 이내의 아기는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는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삼국지』「위지동이전처럼 돌을 얹어 그 무게 때문에 눌린 것이다.

학자들이 편두를 주목하는 것은 훈족들이 편두를 하층계급과 상류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의 -마텡--훤트네이에서 발견된 5세기 중반(아틸라 치세)의 두 명의 귀족 여자의 무덤에서 수많은 장신구들과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두 여자 모두 편두였다. 훈족은 점령한 지역의 귀족 자식들의 머리를 강제적으로 변형시켰는데 이들 여자들은 훈족에 복속했던 알란족으로 추정된다.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을 볼 때 훈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훈족에게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서는 편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볼 때 흉노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흉노에서 갈라져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의 지배 집단편두 습속을 갖고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국보 제91호의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다. 기마인물상의 주인공이 세계적으로 특이한 변형인골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한반도 남쪽과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편두가 발견된다는 것은 이들 민족 간에 강력한 유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편두인 기마인물상 주인

한편 신라에서 머리가 뾰족한 토용들이 매우 많이 발견되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토용을 기원전 78세기 전부터 현 터키 지역에 거주했던 프리기아인들이 초원을 따라 이동해왔으며 그들이 고깔모자를 쓴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발표되었으나 학자들은 이들 토용이 진한과 변한의 풍습이었던 편두들을 형상화하여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편두는 워낙 많은 민족들이 차용했으므로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다. 당연히 만드는 방법에 따라 머리 모양도 다르게 변형된다. 첫째 유형은 식물을 꼬아 만든 새끼줄이나 가죽 끈으로 이마, 관자놀이, 침골 부위를 돌려 묶는 것이다. 이 방법은 머리 모양이 전체적으로 길고 좁아지며 뒤통수도 비교적 직선에 가깝다. 이러한 형태를 환형 편두라고 하는데 북경 산정동인, 길림성 전곽현에서 발견된 기원전 5600년 전의 신석기인에게서 발견된다. 이 형태는 북미 인디언, 페루에서도 발견된다.

둘째는 딱딱한 판자를 머리 앞뒤에 대고 끈으로 묶어두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이마와 뒤통수가 편평해지고 머리가 길어져서 옆에서 보면 이마뼈가 편평한 나무판처럼 보이며 정수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형태는 기원전 8000년경흑룡강 인근에서 발견되며 아무르강 하류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신석기인들이다.

셋째는 중국의 대문구유적지에서 발견된 편두로 바닥에 딱딱한 물건을 깔고 유아기의 아이를 장시간 눕혀두는 것으로 머리 뒤쪽이 편평하게 된다. 이를 '첨형 편두'라고 하는데 왼쪽 뒤통수가 더 기울게 했다. 지금도 산동성과 강소성 북부에서는 아이머리 밑에 책 같은 딱딱한 물건을 받쳐놓아 뒤통수를 납작하게 한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머리 모양이 사방형으로 되면 아이가 똑똑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작은 편두 인골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크기에 대한 의문점도 해결해 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중 천마총 금관의 직경이 20센티미터, 금관총 금관이 19센티미터, 서봉총 금관 18.4센티미터, 황남대총 금관 17센티미터, 금령총 금관 16.4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 16.1센티미터, 복천동 금관 15.9센티미터로 중간 값은 황남대총 금관의 17센티미터로 둘레는 53.4센티미터다.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금관의 크기작은 이유로 우선 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경우를 추측할 수 있는데 5~6세기의 신라왕 가운데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 왕은 없다. 특히 황남대총의 경우 남성의 무덤인 남분이 아니라 여성의 무덤인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으므로 왕의 금관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들 작은 금관은 요절한 왕족이 사용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즉 신라에서 금관은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왕의 일족이면 어린아이도 착용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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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금관이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한데다가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버팀력이 약하고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어른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금관은 생존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 즉 죽은 자를 위한 일종의 데스마스크 용도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 이집트 무덤에서 나온 황금마스크와 비슷한 용도라는 것이다. 특히 피장자의 발치에 묻혀 있는 금동신발의 바닥스파이크 같은 장식이 있어 실용성이 없으며 또 다른 부장품인 금제 허리띠도 무게가 4kg이나 되는 것으로 볼 때 금관도 장례용 부장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물론 특수한 걸이나 끈을 사용할 경우 머리에 쓰고 활동하거나 무속의 한 형태로 춤을 출 수도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금관을 어떻게 머리에 썼을까하는 연구에서 세움장식을 실로 고정시키고 그 안에 모자를 쓴다면 머리에 쓸 수 있다는 해석도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당나라 장회태자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 중에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도가 있는데 이 그림에 의하면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이 쓴 관모는 머리의 정수리 부분에 얹혀 있다. 이러한 관모는 또 테두리 양쪽에 길쭉한 끈을 드리워 턱밑에서 묶고 있다. 신라 왕의 금관 또한 착용법이 이와 비슷할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가설 모두 금관의 크기가 작다는 것을 매끄럽게 해석할 수 없으므로 고고학자들이 풀 수 없는 큰 숙제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포착되었다. 헌강왕 11(885), 왕은 최치원에게 882년에 입적한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 건립을 위해 비문을 짓게 했다. 지증대사824년에 출생하여 9세인 832년에 부석사로 출가했다. 17세 때 구족계를 받고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을 계승했으며 신라 경문왕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초청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교화활동에 힘썼다. 헌강왕 7(881)에 국가에서 사역(寺域)을 정해주고 봉암(鳳巖)’을 사호했다.

 

지증대사비

지증대사탑비는 진성여왕 7(893) 무렵 찬술되었으며 경애왕 1(924)에 건립되었는데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귀부와 이수 및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 20101보물 제138에서 국보 제315재지정되었다. 비신청석으로 높이 273센티미터, 너비 164센티미터, 두께 23센티미터이며 글자 지름 2센티미터로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은 행서체. 최치원의 비문은 주인공인 지증대사 이외에도 당시 활약한 상당수의 선종 승려 이름, 지명, 관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가 적혀있는데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들을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있어 신라시대 선종사 이해에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비문 서두에 편두거매금지존(偏頭居寐錦至尊)이라는 글은 신라 왕의 두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편두인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했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이는 신라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다. 거매금, 거서간, 마립간, 이사금은 통칭으로 신라의 지배자를 의미하므로 최치원이 적은 편두란 존귀한 신라 임금이 편두였음을 뜻한다. 금관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편두라면, 즉 신라의 임금을 비롯한 지배자들이 편두였다면 금관이 작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 유골만 놓고 본다면 새로운 문제점이 제기된다.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는 남자는 없으며 여성에게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편두가 진한(변한 포함)의 특징적인 습속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 전체가 편두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야지역에서 편두는 4세기경 일정한 시기에 한해서 시행되었다고 추정하는데 부산대학교 정징원 교수는 하층민에게서 편두가 보이는 것은 당시 미인의 기준이거나 특별한 습속일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언론인 안태용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은 편두가 일부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에 무당과 같은 일종의 특수 신분의 여성들에게 행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지증대사비가 있는 봉암사4월 초파일 단 하루만 봉암사를 외부인에게 공개한다. 봉암사가 선원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크기가 매우 작은 금관은 한국이 대표하는 유산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신라 법흥왕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신라의 지배자들이 편두라면 이런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 여하튼 사서에 의하면 편두는 진한변한에서 일정기간 동안 적용된 습속이라 볼 수 있지만 이들 습속이 신라 지배자 계급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도입되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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