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철제갑주(鐵製甲冑)와 승마용마갑(乘馬用馬甲)
기마민족이 마구를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주의 천마총에서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안장틀이 4점, 안장깔개 1점, 등자 5개,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 3 점 등이 발견되었다.
안장틀에는 거북등무늬(龜甲文)로 구획된 투각 금동제 장식을 안장틀(磯) 상부에 붙이고 그 아래(海)에 띠고리(버클)을 좌우로 한 개씩 붙여놓았다. 안장틀 안쪽에는 줄무늬를 넣어서 짠 비단이 발라져 있어 왕의 안장답게 호화롭다. 안장틀 앞가리개 표면에 붙여진 금동 투각 금구 모든 면에 금제 달개를 달았다.
이들 안장들은 당시의 중국제 안장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다르다. 신라 것에는 북방기마민족 문화에 상용되는 안장틀에 부착된 끈에 띠가리개가 부착되어 있는데 반해 중국 것은 끈구멍이 뚫려 있어 가죽끈이나 꼬아서 만든 끈이 매어있다. 말타기에도 남다른 민족성이 표현된다는 뜻이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안장틀은 오색찬란한 비단벌레 장식의 호화로운 안장틀, 등자, 허리띠 등이 발견되어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다시금 새기게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학자들은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안장틀처럼 호화로운 마구는 아직 중국을 포함하여 세계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특히 금동 투각한 비단벌레 장식 허리띠 3구는 전체 길이 93센티미터로 각 띠꾸미개에는 덩굴무늬가 투각되어 있고 그 뒤에는 붉은 비단이 붙여져 금동 투각 띠꾸미개와 붉은 비단을 위에 댄 사이에는 눈부신 빛을 발하는 비단벌레의 날개가 채워져 있다.
아랍인 이븐 쿠르다드비가 845년에 편찬한 『왕국과 도로총람』에 신라의 주요 산물로 금, 인삼, 옷감, 안장, 토기, 검 등이 있다고 적었는데 그들이 안장을 거론한 것은 이러한 호화찬란한 마구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개마무사들의 전용인 철갑옷이 가야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출토된 것은 1980년부터다.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서 갑옷 한 벌이 거의 온전하게 놓여 있고 곧이어 김해 대성동 금관가야 지역에서 철제갑주류(鐵製甲冑類)가 다량 발견되었다. 대성동 고분에서는 몽고발형주(蒙古鉢形冑)로도 불리는 종세장판혁철주·괘갑·종장판판갑(縱細長版革綴冑‧挂甲‧縱長版版甲)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종세장판혁철주와 괘갑은 가야지역에 북방문화가 유입되었음을 웅변해 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한편 종장판판갑은 영남지역에서만 발견되므로 가야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형은 재지의 피갑 또는 목갑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철재로 전환하게 된 것은 중국 동북지역과 고구려 지역에서 유행하던 철갑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이들 유적은 4세기 중반기 이후의 것으로 후대로 갈수록 갑주를 부장하는 계층이 많아진다.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갑옷은 대체로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것으로 주로 보병용이지만 기병용 투구와 함께 출토되어 기병용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비늘 모양의 작은 철판조각을 꿰어 만든 갑옷은 찰갑이라고 부르는데 가죽이나 못을 사용해 판을 이었다. 판갑에 비해 유동성이 있어 기병들이 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갑옷의 경우 철판은 1밀리미터 가량으로 입고 벗기 편하도록 경첩을 달아 양쪽 판이 열리고 닫히게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만 보고 갑옷의 무게 때문에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질문하지만 생각보다는 무겁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데도 불편하지 않다. 그러므로 가야 무사들이 철투구, 목가리개, 팔뚝가리개, 다리가리개를 하면 거의 완벽한 방어가 가능하다.
김해 퇴래리 판갑옷의 경우 27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으며 연결했을 때 곡면처리가 되도록 입체적으로 재단되어 있으며 오늘날 리베팅(rivetting)과 같은 방법으로 연결했다. 갑옷에 사용된 못은 80개가 넘으며 일일이 리베팅했다. 종장판판갑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긴 철판을 세로로 리베팅했지만 작은 비늘 모양의 철판 조각을 연결하는 등 가죽갑옷이 대부분이던 시기에 이런 철갑옷을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의 철기 제작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가야의 기병도 사람만이 아니라 말까지 갑옷을 입힌 개마무사였다. 함안 마갑총에서 말의 몸통과 가슴, 목까지 덮을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철조각으로 이어 만들었다.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가야지역의 개마무사 집단은 동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전반까지도 신라에선 이런 기마집단을 입증하는 마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4세기를 기준으로 하면 가야가 신라보다 우위였다고 추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라에서 말을 극진하게 매장한 마갑총이 발견되었고 말모양으로 장식한 각배가 보이며 금은석으로 치장한 안장과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안장 등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말에 대한 신라인들의 애정을 볼 수 있다. 이는 흉노(훈족)가 말에 강한 신뢰와 애정을 쏟았던 것과 비교할 만하다. 요시미츠 츠네오는 말의 빗이나 채찍과 더불어 젊은 남녀를 공물로 바친다는 생각은 북방 기마민족에게 적용되는 풍습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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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각배와 호형대구
신라와 가야의 4〜6세기 고분에서는 각배 등 토기가 엄청나게 많이 출토되는 것도 특징이다. 각배는 원래 소나 물소와 같은 짐승의 뿔을 이용해 만든 잔을 뜻하나 흙이나 금속을 이용해서 만든 같은 형태의 그릇도 뿔잔 또는 각배라고 한다. 각배는 왕-지혜-초(超)자연성과 연관되어 지배자인 왕이 주변 세력들의 부정한 일을 알아내는 힘,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으로 간주되었고 금관이 사용되던 시기에 매장의식의 음주가무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배는 우리나라의 경우 기원전 약 5000〜4000년경에 해당하는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흙으로 구운 뿔잔이 처음으로 나타난 후 보이지 않다가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주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갑자기 나타난다.
각배는 세계적으로 지중해, 근동, 중앙아시아, 북중국, 신라, 가야, 일본에 분포되어 있다. 각배는 그리스로마세계에서 유달리 유행했는데 각배에 얽힌 다음과 같은 신화가 있다.
‘제우스신이 젖먹이 시절에 아말테이아 산양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 인연으로 아말테이아의 불을 가진 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꽃이든 과일이든 마실 것이든, 그 뿔 안에 가득차게 되어 풍요의 뿔이 되었다.’
라틴어로 ‘코르투코피아(cornucopia)’는 풍요로운 뿔이라는 뜻이다. 또한 강의 신 아켈로가 소 형상을 변신하여 헤라클레스와 싸우다가 부러진 뿔이 코르누코피아라 불려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뿔에서 넘쳐났다는 신화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각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풍요의 잔’ 즉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용기로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에서 각배는 토기뿐만 아니라 유리나 귀금속, 금은, 뿔, 목제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각배 끝에 여성상이나 말, 소, 산양, 사자머리 형상 등의 상반신과 머리 형상이 장식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각배가 세계 각지에 분포될 수 있었던 요인은 스키타이와 흉노 등 기마민족들의 활동 반경이 매우 넓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데 특이하게도 신라·가야와는 달리 고구려·백제 지역에선 각배를 사용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고구려·백제와 신라·가야가 동이족에 속하면서도 서로 다른 부족이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살던 부여계(夫餘系)이고, 신라와 가야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서쪽에서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북방기마민족 출신으로 보는 증거로도 인용된다.
김병모 박사는 각배가 유목민족이 ‘폭탄주’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몽골에서 마유주(馬乳酒)를 담은 양푼에다 알코올 도수 100%의 독한 증류주(蒸溜酒)인 ‘사밍’을 채운 작은 은잔을 던져 넣어 돌려가며 마시는 풍속이 있다. 과거에는 은잔 대신 각배에 ‘사밍’을 담아 마유주가 든 가죽 포대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한편 청동제 호형이나 마형대구는 초원지대의 스키타이 기마민족 등이 애용한 혁대(革帶) 금구로서 북방문화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로 세형동검문화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중국에서 금구를 사르마트식이라고 부르는데 금구는 단순한 혁대걸쇠 자체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당시의 조각솜씨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유물로 평가한다. 이러한 동물형대구의 사용이 기마민족들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시기가 대체로 3세기 전후임을 감안하면 영남지역에서 발견되는 동물형 대구도 이 시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20. 맥궁(각궁)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활의 그림이 무용총의 벽화다.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이 보이는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
활은 일반적으로 단순궁, 강화궁, 합성궁으로 나뉜다. 나무 등, 단일 소재로 만든 활을 단순궁이라고 하며 활채를 나무껍질이나 힘줄 등으로 감아 보강한 것을 강화궁,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활채의 탄력을 극대화시킨 것을 합성궁이라고 한다. 한편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한국의 활은 합성궁에 해당되는데 특히 활채가 활시위를 묶는 고자 부분에서 한 번 더 휘는 이중만곡궁의 일종이다.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활줄을 풀었을 때 만궁이 뒤집어져 휘는 각도가 활에 따라 다른데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도 가장 심하여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이들은 동시대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 분명히 구분된다.
기본적으로 조선 각궁의 재료는 물소 뿔, 산뽕나무, 대나무, 소 힘줄, 벚나무 껍질 등이며 이들 재료를 민어 부레풀을 이용하여 접합한 후 활을 만든다. 이런 활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궁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길이가 매우 짧아 말 위에서 사격하는 데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들어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하여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활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들의 기술은 대단했다는 것은 중국 측의 사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후한서 : 고구려의 별종이 소수(小水)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다.
진서(晉書) : 돌로 만든 살촉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석자 다섯 치의 단궁과 한 자 몇 치쯤 되는 길이의 고시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 주(周) 무왕 때 그 고시와 석노를 바쳤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도 다음과 같다.
〇 부여(夫餘) : 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
〇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의 다른 성이 작은 물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소수맥은 좋은 활을 생산했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란 것이 그것이다.
〇 읍루(挹婁) : 그곳 사람들은 활쏘기에 뛰어나 사람을 쏠 때에는 모두 눈을 적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맞으면 모두 죽는다.
〇 예(濊) : 낙랑의 단궁(檀弓)이라 불리는 활은 이 땅에서 생산 된다.
〇 진한(辰韓) : 진한은 국명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狐)라 부른다.
진서(秦書)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견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단궁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낙랑단궁은 맥궁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인들이 낙랑이라고 할 때의 낙랑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있던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참고적으로 우리나라의 활을 지칭할 때 맥궁(貊弓)ㆍ단궁(檀弓)ㆍ경궁(勁弓)ㆍ각궁(角弓) 등으로 불렸는데 명칭은 다르지만 그 형식은 만궁(彎弓)으로 인식한다. 한편 박달나무로 만드는 단궁(檀弓)을 각궁(角弓)의 원시형태로 설명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제2> 「모본왕4년(5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년,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이 기록에 나오는 활도 만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각궁은 일반적으로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의 활은 그 용도에 따라서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군궁(軍弓), 활쏘기 연습에 사용하는 평궁(平弓, 현재의 국궁), 의례에 사용하는 예궁(禮弓, 군궁과 동일한 재료로 활의 길이는 6척), 무과시험에 사용하는 육량궁(六兩弓, 무거운 화살인 육량시(六兩矢)를 쏘는 활로 무과시험에 사용)로 나뉘는데 이중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군궁은 이중만곡궁인 각궁으로 이는 고대와 다름이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궁은 흑각(黑角), 수우각(水牛角) 등으로 불리는 물소 뿔로 만든다는데 특징이 있으며 이를 흑각궁(黑角弓)이라고도 부른다. 물소 뿔 중에는 흰색이나 황색도 있으므로 이를 백각궁(白角弓), 황각궁(黃角弓)이라 불렀다. 각궁을 만들 때 물소 뿔의 바깥쪽 한 면만 쓸 수 있고 뿔 2개로 활 한 자루를 만들기 때문에 각궁 제조에는 물소 뿔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조선에는 물소가 없어 수입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몇 차례 물소를 수입해서 남부 지방에서 키워보려고 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다.
구하기 힘든 물소 뿔을 활의 기본 재료로 사용한 것은 물소 뿔을 활채의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겼을 때 당시의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소 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물소 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승기에 따르면 각궁은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
활채를 접합시키는 접착제로 원래 소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아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세종 전후로 민어의 부레로 만든 어교(魚膠)를 사용했다. 민어 부레풀은 접착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다 마른 후에도 실리콘처럼 상당한 유연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연신율(延伸率)을 가진 여러 종류의 재료를 접합시켰을 때에도 재료간의 연신율 차이로 인한 힘의 손실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복합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각궁이 활시위를 풀었을 때 재료 간에 풀림이 없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휠 수 있는 것은 어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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