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상투(옥고)
홍산문화에서 학자들을 놀라게하는 것은 적석총에서 상투 옥고(상투머리를 덮었던 옥으로 만든 머리덮개)가 계속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홍산 문화에서 발견되는 상투옥고는 약간 변형된 원통형으로 하부와 상부가 뚫어져 있는데 무덤 주인의 머리에 놓여져 있다.
상투 옥고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상투 즉 머리를 틀어 올리는 관습은 한민족의 고유한 머리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상투 머리를 덮은 옥고와 같은 유물은 중국 황하문명에는 없지만 이후 고조선 시대 이래 한반도와 만주에서 널리 사용한 모자 양식이며 멀리 고구려와 백제, 신라 금관 안에 쓰는 속관 형태로 이어진다. 당대의 사람들은 머리꽂이를 사용해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하였고, 홍산문화 시기에 이미 상투 위에 옥고 등을 씌워 우아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매장 풍습을 볼 때 학자들에 따라 상투의 원래 ‘상두’에서 변형된 것으로 북두칠성을 말하기도 한다. 북두칠성과 인간이 하나로 소통하는 문화의 상징이라는 설명이다.
상투하면 동이족의 고유 두발 문화로 한자어로는 ‘추계(推髻)’ 또는 ‘수계(竪髻)’라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위만(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상투의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 각저총과 무용총의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벽화에 나오는 상투는 오늘날의 모양과 다소 다르지만 기본양식은 동일하다. 벽화에 나타나는 상투의 모양은 커다랗고 둥근 것, 작고 둥근 것, 쌍상투(雙髻)가 있는데, 큰 상투는 관모를 쓰지 않은 장사도(壯士圖)나 역사상(力士像)에 많고, 작은 상투는 관모를 쓰는 귀인층에서 볼 수 있다. 신라에 있어서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상투가 나타난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 공통의 풍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도 몽골의 지배 때를 제외하고 상투를 틀었다. 몽골의 지배 아래서는 변발(辮髮)이라 하여 관료들은 정수리 이외의 부분은 깎아 버리고 정수리털을 남겨 뒤로 땋아 내리는 방식을 택했는데 공민왕이 배원 정책을 실시하자 변발을 폐지하고 다시 상투를 틀게 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상투를 틀 때는 ‘백호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틀었다. 이는 많은 머리가 정수리에 모이게 되면 열의 발산이 어려워 견디기 힘들게 되므로, 열을 발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상투는 하나만 트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쌍상투를 하기도 하였다.
상투 꼭지의 정상에는 장식을 위하여 금·은·동 등으로 만든 동곳을 꽂았고,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 둘레에 망건(網巾)을 썼다. 망건 앞이마 부분에는 갓을 고정시키기 위한 풍잠(風簪)을 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관모를 썼다. 민(常民)의 경우는 망건 대신 수건을 동이기도 하였다.
고종 32년(1895) 을미개혁 때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에 의하여 상투머리가 금지되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 하는 유교사상을 내세우고, ‘까까중’이라고 하면서 거센 반발을 일으켰으나, 결국은 신시대의 사조에 밀려 상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전통을 고집하는 일부 사람들의 상투 틀고 갓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머리 때문에 상투를 못 튼다는 말은 없다. 우리들의 선조라고 과거에 대머리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대머리는 도대체 어떻게 상투를 트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방법은 간단하다. 현대처럼 가발을 쓰고 갓을 썼다. 한마디로 과거에 살던 대머리들도 상투를 틀었으므로 자신이 대머리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놀랍게도 조선시대에 가발이 매우 발달했다. 여자들의 경우 가발(가체)에 너무 많은 돈을 들여 가체 금지령을 남길 정도였다.
상투는 결혼한 기혼 남성의 상징물로 일단 상투를 틀면 어른으로 대접받았으며 나이가 많아도 상투를 하지 못한 사람에게 반말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은 노총각 중 결혼과 상관없이 상투를 틀고 다니는 ‘건상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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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개마무사(鎧馬武士)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이 있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탁월한 지도자와 우수한 장병들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많은 부하와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하지 못하면 패배한다. 반대로 병력의 수에서는 비록 열세이지만 장병들의 사기가 드높고 지도자가 유효적절한 작전을 구사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
직접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장병들에게 아무리 어려운 전투라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신이 벌인 전투는 반드시 이기며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장병들의 사기는 올라간다. 이러한 믿음을 장병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보다 더 좋은 무기를 지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전투에서는 장병들에게 질 좋은 갑옷, 방패, 칼, 창, 활 등 첨단무기를 지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구려가 중국을 호령하면서 사상 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고구려 인들의 강인한 개척 정신에도 있지만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추어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오늘날 개마무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지만,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곳이라는 점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단어가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단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철갑옷으로 무장시켰다. 개마무사가 5.4m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70여 킬로그램)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철투구와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에게까지 철갑옷을 입힌 고구려의 중무장 기병들은 적에게 공포와 위협의 상징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전투 제일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전에서는 전면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이었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개마무사들은 적의 활 공격은 물론 웬만한 창으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은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242년 고구려의 동천왕은 철기병 즉 개마무사 5천 명을 동원하여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서양에서 개마는 13세기에야 나타난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골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다량의 개마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개마가 얼마나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제력과 말 갑옷과 같은 우수한 장비의 대량 생산이 고구려의 국방력을 급속히 강화하고 그 영향력을 세계적으로 펼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개마무사의 철갑옷은 찰갑과 판갑으로 나뉘는데 고구려의 철갑옷과 철모는 대부분 물고기비늘처럼 얇은 철판을 네모나고 잘게 잘라 가죽으로 이어 제작한 찰갑(札甲) 형태다. 반면에 경주와 가야의 땅에서 발견되는 철갑옷은 대체로 너른 철판을 이용한 상체 보호용 판갑(板甲)형태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철투구와 철갑옷을 입은 무사를 태우는 고구려 개마는 크게 세 부분, 즉 말의 머리에 씌우는 말투구, 말갑옷, 말장구로 나뉜다. 말투구는 말머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철판을 말머리 모양으로 오려서 둥그렇게 감싸 덮었다. 콧구멍 부분은 드러내거나 숨을 쉴 수 있도록 주름을 잡았고 타격을 받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 개마를 만들 수 있는 철 기술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철기가 발달한 것은 고구려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데다가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을 이어받은 뒤에 그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기원전 25세기경 현재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달했던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이란,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기원전 1200~1000년경에 연철을 열처리하여 강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유럽에서 생산된 철기는 전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이고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은 그보다 늦어 14세기경 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처음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강철(탄소 함량 0.035~1.7%)은 선철의 경우 보다 높은 온도 즉 보통 1,500도 이상에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철을 만드는 비법은 철의 용융점이 1,539도 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려야 한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로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 덕분이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으로 고구려는 다양한 제강법을 사용하여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다. 한마디로 고구려 독자의 철강 기법으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다. 고구려의 저력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고구려 동천왕이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런 식으로 5,000명을 무장시키려면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 500여 톤이 있어야 한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개마무사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음에도 중국이 고구려와 같이 개마무사를 도입하지 않았다.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중국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병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이 도입한 기병제도는 중국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에 복속한 이민족이나 용병을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정규군이 아니므로 고구려 군과 같은 결집력이 부족하여 전투력이 떨어졌다.
한편 중국이 고구려와 같은 개마무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하는 학자들이 많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는데 반하여 다른 국가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현대판 탱크인 개마무사 등 기마술은 큰 틀에서 중국으로 내려가지 않고 동이의 터전인 북방 초원지대와 한반도 등에서 꽃을 피운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자존심인 개마무사와 기마병들은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한민족의 터전으로 계속 이어진다. 개마무사 등의 본향을 고구려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가야와 신라에서도 개마무사와 기마부대를 활용했다. 고구려는 개마무사가 고분벽화(안악3호분, 쌍영총, 삼실총, 개마총 등)에서 나타날 정도로 주력군으로 육성했는데 신라와 가야의 영역인 경북과 경남 일대에서 개마무사 등 기마무사의 본격적인 증거물이 발견된다.
개마무사의 철갑옷인 찰갑옷과 판갑옷이 남한에서 두 종류 모두 발견되는 것도 이를 증빙한다. 말갑옷도 경남 함안 도항리 마갑총과 경북 경주시 황오동고분군에서 발견되었다. 신라지역인 황오동에서 고구려 개마무사를 상징하는 찰갑옷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개마무사 등 기마부대 전술을 활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 황오동 유물처럼 중장기병의 무장상태를 보여주는 완벽한 세트가 갖춰진 사례가 보고된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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