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궁에도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물소 뿔을 접착한 어교는 비가 오거나 기후가 습해지면 물을 먹어 녹아 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습할 때는 각궁을 사용할 수 없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는 활을 따뜻한 온돌방에 넣어서 보관해야 했다. 더구나 각궁은 제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각궁 하나를 완성하는 데 최소한 5년 이상이나 걸린다. 그럼에도 고구려 등 승마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기마병들이 이 같은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하고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흉노(훈) 등 경기병이 사용하는 활은 매우 작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인데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브라운 공대의 김경석 박사는 활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여 한국의 활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함을 입증했다. 김박사는 한국 활의 시위 길이(120cm), 영국의 장궁(180cm), 일본 활(2m)에 비해 훨씬 짧으면서도 사거리가 2〜3배 길어 최대 1킬로미터까지 날아가는 비밀을 실험을 통해 풀었다.
그는 한국 활은 다른 나라 활과 달리 꼭짓점이 두 번 발생하는 ‘이단 추진 로켓’과 같은 궤적을 갖고 있음을 밝혔다. 흔히 동양인들이 체격이 작아 활을 잘 당길 수 있게 활 시위를 짧게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김 교수는 활줄을 빨리 움직여 추진력을 높이기 위한 옛사람들의 지혜라고 말했다. 또한 한국의 활은 5굽이로 이뤄지는데 굽은 활의 오금과 도고지 부분에서 한 번 더 추진력이 발생하여 동시대 다른 활보다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한국의 각궁 등이 아직까지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없지만 평양에서 고국원왕 영화 9년(353)의 전축분(塼築墳)에서 실물 단편 9개가 발굴되었다. 그 중 4개의 형태는 같고 2개는 다른데 소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으며 전체 길이는 80센티미터 내외의 단궁이었다. 참고적으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제9호분에서 발견된 백제의 활, 신라에서 발견된 금관총의 유물도 만궁으로 삼국 모두 만궁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야의 양산 부부총ㆍ함안 고분ㆍ고령 지산동 주산 제39호분에서 활 유물 중 지산동 것은 특이하게 직궁이지만 양산과 함안의 활은 만궁이다. 가야의 유물만은 고대 일본의 활과 같은 곧은 활인 직궁이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각궁은 당시 한족이나 키타이 등이 사용하던 활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한식궁을 사용했는데 한식궁은 맥궁과는 달리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것으로 중국 고유의 중형 활이다. 이들은 기마부대를 활용하지 않고 궁수들이 장거리에서 화살을 날렸다. 반면에 북방기마민족들은 말을 타고 접근하여 화살을 날렸으므로 활이 크지 않아야 한다. 이 부분은 다음 항목인 동이족의 자랑인 파르티안 기사법과 연계된다.
물론 고구려 등 한민족이 맥궁만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맥궁과 한식궁(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을 함께 사용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고구려가 중국과 한군(漢軍)과의 수많은 전투 때 한식궁을 노획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활이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중국은 기마부대를 기본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활은 유럽에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Hun)의 기본 장비로서도 잘 알려져있다. 훈족의 활이 얼마나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는 로마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스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훈의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으니, 훈이 활을 겨냥하는 자를 애도하노라. 그의 활은 죽음을 가져온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에는 훈족이 추격하는 로마 기병을 안장에 앉은 채 몸을 돌려 화살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활의 그림을 보면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과 똑같다. 이 활은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동 시대 중국의 한(漢)족이나 키타이족 등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21. 파르티안 기사법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背斜騎射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법을 연습하는 그림이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말을 탄 4명의 무인과 3명의 평복 차림 인물이 있고 표적은 5개다. 그림 우측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馬射戱)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 외에도 마장(馬場) 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의 인물은 ‘사희주기인(사희 기록을 주재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말 탄 무인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사법은 말만 잘 타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활이 몸을 돌려 뒤로 쏘는데 적합해야 하고 또한 몸을 뒤로 돌릴 때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버팀대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만궁이고 후자는 등자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활을 앞으로 쏘려면 말 머리의 방해로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마구는 모두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사람이 말 등에 올라앉기 위한 안장, 발을 딛는 등자, 말 다래 그리고 그것을 장착하는 말 띠와 띠고리다. 둘째는 말을 다루기 위한 자갈․굴레․고삐 등이며 셋째로 이들 기구들의 장식으로 행엽(杏葉)․운주(雲珠)․방울 등이다.
마구 중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 말 자갈이고 가장 늦게 출현한 것이 등자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등자가 발명되기 전에 말 등에 올라탄 기수는 자리가 불안정하므로 허벅지와 발로 말의 몸통을 꽉 조여서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련한 기병조차 한두 시간만 말을 타고 달려도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온통 멍과 물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등자가 없는 경우 혼자 말에 오르기조차 어려우므로 기수는 다른 사람의 허리를 밝고 올라가거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긴박한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쟁터에서 말 타는 것조차 어려우므로 말의 효용도는 단지 이동에만 사용되었다.
등자가 어떤 경로로 유럽까지 보급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7~8세기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을 통해 전파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 기원 8세기경까지 유럽의 장수들이 말을 탄 이유는 전투장으로 가기위한 것이다. 그들은 전장에 말을 타고 가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말에서 내려 전투에 참여했다. 8세기 전에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공격하는 영화의 장면들은 모두 허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듯이 보이는 등자가 개발되자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로 하여금 기마술에 있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케 하는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아도 중국이 자체적으로 기마무사 등을 양성하지 않고 북방기마민족을 용병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있어 돌격하더라도 등자 없이 말을 탔다고 볼 수 있다. 말 타는 기술이 수준급 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상대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중국은 이를 감안하여 기마 용병을 사용하거나 밀집보병과 궁수로 하여금 장거리 화살을 발사케하여 적과 대응했다.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족들이 승마를 생활화 했다는 것은 복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 복식의 특징은 북방기마민족이 입던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이다. 호복은 양팔을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좁은 소매통의 웃옷인 습(褶)과 양다리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좁은 바지인 고(袴)로 구성되어 있어서 말 타고 사냥하는데 편리하다. 고구려 복식은 평상시에 입으면 평상복이지만 전쟁에 나가면 그대로 전투복이 된다. 또 말 위에서 의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띠를 맸는데 그 띠에는 금구(金釦)를 달았다.
신발도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었다. 모든 것이 승마에 적합한 복장이었다. 말에 얹은 안장은 서양식처럼 안교가 낮고 평면적이며 여유 있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안교가 똑바로 세워져 있어 입체적이며 앉기에는 좁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될 수 있는 한 신체를 말의 탄성으로부터 피하게 하여 상하의 진동을 적게 하고 표적을 쏘아 맞추기 위해서다. 말 등으로부터 허리를 띄우기위해 채택한 것이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백제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마수렵인물상과 경주 사정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문양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제금동향로의 수렵인물상은 백제의 수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일본 정창원 소장의 은제선조수렵문과 연관해서 일본 문화에 미친 백제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이와 같은 기사법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는데 히도미의 한객수구록에는 1681~1684년 사이에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절단과의 수담(手談)이 적혀있다.
‘비장 정태석, 형서정 홍금의 전복을 입고 말을 달린다. 안장에서 일어나고 혹은 물구나무서며 안장을 붙들고 땅에 닿을 듯 매달리며, 혹은 누어서 말을 힘차게 몬다. 말을 몰며 서로 웨치는데 그 소리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꾸짖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말을 달리면서 웨치는 소리는 웃는 것인가, 꾸짖는 것인가?’ 물으니 ‘이것은 포효니 기(氣)를 돋구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따라간 무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材)의 시범을 보여준 것이다. 기마 습속이 한민족의 터전으로 부단히 이어져왔음을 알려준다.
참고적으로 화살의 위력을 알려주는 예가 있다. 방탄복을 총알은 뚫을 수 없지만 화살은 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이는 사실이다. 총의 내부 구조는 소라 껍데기처럼 빙빙 비틀려 있다. 총알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면서 이곳을 거쳐 가기 때문에 총알이 멀리 날라갈 수 있는 것이다. 「C.S.I 수사대」에서 범행에 사용된 총을 확인할 때 총신의 내부의 흔적을 살펴보는데 이는 각자 총의 발사흔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총알은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가기 때문에 물체를 꿰뚫을 때 엄청난 파괴력이 나온다. 그래서 방탄복은 아주 질기고 가느다란 섬유를 그물망처럼 짜서 만든다. 총알이 방탄복에 닿으면 순식간에 그물처럼 휘감겨 총알의 회전을 멎게 만드는 방식이다.
화살은 이와는 달리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방탄복의 틈새를 벌려 파고 들기 때문에 총알처럼 휘감을 수 없다. 방탄복으로 로마군이 무장했더라도 훈족의 화살에는 어림도 없다. 또한 화살은 직선으로 날아가는 총알과 달리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므로 벽 뒤에 숨은 적군을 맞힐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로마인들이 훈족의 활 솜씨에 경악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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