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수원화성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1)

Que sais 2020. 11. 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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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2(1798) 8, 정조는 수원화성과 관련된 상소문을 받았다. 상소의 주인공은 임장원(任長源)이란 60세를 넘긴 언관으로 그는 정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적었다.

임장원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효도를 다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나라를 동요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임장원정조의 능묘 조성신도시 개발을 분명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도세자가 생전에 수원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고 지적하면서 수원에 능묘를 만들고 신도시를 개발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의 유언비어 중에는 정조중국의 진시황제처럼 성을 쌓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정조소인(小人)과는 이루어진 성과를 함께 즐길 수는 있어도 시작을 함께 할 수는 없다로 반대파에 대해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그는 화성 문제에 관한한 합리적 토론이나 건설적 비판의 여지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정조가 이와 같이 수원화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은 정조의 개혁의 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공간을 필요로 했던 정조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택했다. 이미 서울은 모든 면에서 기존 세력들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기존 관료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수원은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데다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현륭원이 인근에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능침을 보호하고, 자신이 은퇴하여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내려와 머물 곳으로 선언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펼칠 새로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국왕의 친위 부대 중 장용외영현륭원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수원부에 두었는데 이는 조선 팔도 안에서는 한양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도시보다 강력한 지위와 군사력을 갖춘 실질적인 조선 제2의 도시라는 것을 의미했다.

수원화성은 이처럼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귀중한 유적이다. 일부 학자들이 원래의 이름은 수원이 아니라 화성이었으므로 본이름을 찾아주자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에 부응하여 1996년에 사적3호 수원성곽은 공식적으로 사적3호 수원화성으로 지정되었고 199712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조선총독부> 명의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라는 법령으로 1943년까지 10년 동안 591건의 우리 문화재를 그들 나름대로의 잣대로 지정했다.

또한 화성은 19348수원성곽이라는 명칭으로 고적제14로 지정되었는데 고적이란 학술연구의 자료가 될 만한 것으로서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곽은 병사관방(兵事關防)에 관한 것으로 수원성곽이란 명칭은 화성을 역사적 맥락을 지닌 도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외곽을 두른 군사 시설물의 차원으로 한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화성을 수원성곽이라고 단순히 명칭만 변경한 것이 아니라 화성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성곽 내부의 도시 구조를 파괴했다는 점이다.

일제는 화성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던 행궁과 유수부 관아낙남헌이라는 건물 한 채만 남겨 놓고 경찰서, 병원, 학교 등의 용도로 바꿔 완전히 없앴다. 즉 화성의 알맹이는 모두 없애고 화성의 껍데기성곽 시설만 남긴 것이다. 학자들이 수원이라는 명칭을 화성으로 바꾸어야 한다주장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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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꿈이 담겨있는 규장각

총 길이 5.7킬로미터, 면적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의 통치 기간은 24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치세는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대였다.

우선 17세기 초부터 노골화된 당파싸움17세기말 숙종 때 상대방을 철저히 제거하는 대립 방식으로 치닫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각 정파가 서로 타협하는 탕평책을 써서 여러 정파들을 고루 기용하였다. 정조도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 탕평책을 견지하면서 오만한 서울 양반 대신에 때 묻지 않은 지방 선비들을 등용함으로써 조선시대를 피로 물들였던 당파싸움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확립했다. 경제는 농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상공업의 발달로 새로운 국가의 부가 축적되자 문화도 이에 발맞추도록 실학(實學)과 기술 혁신을 강조하는 북학(北學)을 모두 포용하여 사상적인 탕평을 추구했다.

이러한 정치 개혁이나 사회 개혁은 강력한 지도력 없이 불가능한 일이므로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친위부대를 육성하여 왕권을 다지고, 규장각이라는 국왕 직속의 정치 기구이자 학술 기관을 만들어 충성스러운 두뇌 집단을 결집시켰다.

규장각수원화성을 추진한 정조의 의지를 배경으로 탄생했으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 안에서 죽는 등 정파 간의 알력이 고조된 상태에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가 회심의 작품으로 맨 먼저 설치한 새로운 기구가 규장각(奎章閣)으로 이는 사실 수원화성을 건설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나 마찬가지이다.

창덕궁 안에 둔 규장각의 건물은 6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그 설치 목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와 인장, 책 등을 보관하는 곳임을 표방했다. 규장각최초의 왕립도서관이자 박물관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였다. 뒤이어 만들어진 조직과 기능을 보면 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친위세력을 키우는 장소였다.

 

창덕궁 규장각(주합루)

규장각의 책임자제학(提學)이다. 정조제학으로 홍국영, 채제공근신을 임명했다. 또 핵심적인 실무를 맡은 검서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참신하고 당파와 관련이 없는 인사 또는 서자 출신을 임명했다. 당대에 서자 출신을 임명한다는 것은 파격 중 파격인데다 규장각 건물과 인원수는 가장 규모가 큰 홍문관의 배가 넘었다.

규장각에 근무하는 신하들에 대한 편애는 임금이 새벽이나 밤에 대신을 만나 정사를 논의하는 장소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승지가 입시할 적에도 배석해 의견을 낼 수 있었으며 벼슬아치의 부정이나 과실을 적발해 탄핵하는 권한도 주었다.

더욱이 규장각각신과 검서는 임금이 외부로 행차할 때마다 수행했으며 밤늦도록 임금과 함께 학문과 국사를 토론했다. 또 밤에 근무를 하거나 독서를 할 때 음식을 내려 보살펴 주었다. 이들이 바깥 출입을 할 적에는 궁중의 말을 내주었으며 녹봉의 지급도 넉넉했다. 소위 규장각의 요원으로 발탁되는 것 자체가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출세를 보장받은 벼슬아치라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가 규장각설치한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장치다. 역대 왕조는 늘 외척들의 발호에 시달렸다. 그는 규장각외척을 배제하고 측근의 신하를 등용하는 기구로 활용했다. 둘째, 문풍의 진작에 두었다. 정조는 당시 선비와 문사들은 퇴폐풍조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셋째, 당파에 따라 인재를 등용치 않고 탕평(蕩平) 정책의 일환으로 당파의 인사를 고루 등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재의 고른 등용으로 친위세력을 키워 이들을 활용해 개혁정책을 펴겠다는 의도를 지녔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규장각의 명분도서관과 학술기구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반대자들의 비난을 무력화시키면서 친위세력을 키우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규장각의 혁신도 꾀했다.

규장각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생각되자 1781초계(抄啓) 문신을 두었다. 그동안 한번 과거에 합격하면 거의 학문이나 문자를 접하지 않은 폐단이 있었다. 그런데 정조의 초계 문신37세 이하의 중간 벼슬아치를 뽑아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키는 제도였다. 처음 당파를 망라하여 20여명을 뽑았다. 이들에게 실직을 떠나 잡무에서 해방시켜주고 명예직을 주어 승진에 지장을 받지 않게 했다.

이들에게 경서를 다시 익히고 시사를 공부케 하고 문체 작법을 배우게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경서를 시험하는 시강(試講), 글을 짓는 시제(試製)를 보였다. 성적이 좋은 자에게는 승진, 성적이 나쁜 자에게는 승진에서 제외시키고 벌을 내렸다.

19년 동안 초계 문신 138명이 선발되었다. 그 가운데 정약용도 포함되었다. 이들을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었는지 정약용어린애같이 때리고 학생같이 단속했다경세유표에 기록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담금질을 통해 그들은 정조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으며 개혁의 추진세력이 되었다.

규장각도서관 기능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많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관했는데 규장총목에 따르면 정조 당시 3만여 권을 수집해 중국과 한국 책으로 분류했다. 규장외각을 강화도에 두어 의궤(儀軌)와 도화 등 여러 궁중 관련의 책을 보관케 했다. 내각일력(內閣日曆) 등 많은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규장각 요원으로 발탁된 신하들은 각자의 실력으로만 선발된 탓에 많은 신하들이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다. 규장각 건물 안에는 아무리 높은 인사가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고 근무하라는 객래불기(客來不起)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런 탓으로 벼슬아치가 죽어 신주를 만들 때, 아무리 높은 관직을 지냈을지라도 쓰지 않고 규장각의 하위 벼슬의 이름을 올렸다 한다. 이와 같은 특혜에 다른 신하들이 고깝게 보지 않을리 없다. 그것은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규장각이 변질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우선 당대의 세도가로 볼 수 있는 안동 김씨와 노론들이 곧바로 모든 자리를 독차지했다. 그야말로 무식쟁이도 규장각의 각신이 되자 규장각은 문벌과 당파의 소굴로 변질되었다. 오히려 양식 있는 선비 출신의 벼슬아치들은 정조 사후 규장각의 일원으로 임명되는 것을 수치로 여길 지경이었다.

1894개화파에 의해 여러 개혁조치가 이루어졌을 때 규장각 폐지 조항이 들어있을 정도로 그 폐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뒤에 많은 논란을 빚다가 마침내 1910년 국권이 사라졌을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한편 규장각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쓰라린 아픔을 준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 외규장각

1866 프랑스 함대강화도를 침입했을 때 강화유수 관아 안에 있던 외규장각의 의궤 등 많은 도서와 보물들이 약탈되었으며 건물과 많은 도서들은 불태워졌다. 이때 프랑스인들이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들의 반환문제프랑스와 한국 사이에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여하튼 규장각 도서1911년 도서 10만여 책, 각종 기록 11,000여 책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오늘날 서울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