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정약용의 설계안>
화성의 건축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조는 실학자 다산에게 '삼남의 요충이요, 서울의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화성을 건설토록 한다.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 서적들을 섭렵하고 기존의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다산의 계획안은 5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포루도설」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다.
「옹성도설」은 옹성, 「현안도설」은 현안, 「누조도설」은 적이 성문에 불을 붙였을 때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문 위에 벽돌로 오성지(五星池)라는 다섯 구멍을 내고 그 뒤에 물을 저장한 큰 통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포루도설」은 치성을 만든 후 설치하는 각가지 시설에 대해 설명했다.
「성설」은 정약용이 구상한 새로운 성곽 계획안인데 그가 구상한 여덟 가지 축성 방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성의 둘레는 3,600보(步, 1보는 1.178미터로 4,240미터이다)로 하고 성벽 높이는 2장(丈) 5척(尺)으로 한다. 이는 현대의 치수로 약 7.75미터이다.
② 축성재료는 돌로 한다. 벽돌성의 경우 조선 사람은 벽돌 굽는 데 익숙하지 않고 토성은 겉에 회를 바른다고 하지만 흙과 회는 서로 달라붙지 않아서 겨울에는 얼어 터지며 비가 오면 물이 스며들어 무너지기 쉽다.
③ 참호(성벽 아래 못) : 성을 쌓을 때는 협축이 최선이지만 조선은 이런 방법에 능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안쪽 성은 산에 의지하고 평지에서는 흙을 높여야 하는데 이 흙은 호를 파서 해결한다.
④ 기초 다지기 : 수원부 냇가에는 흰 조약돌이 많으므로 이를 사용한다. 구덩이를 넓이 1장, 깊이 4척 정도로 하여 얼지 않도록 한다. 팻말을 세우고 사람들을 모집해서 1단씩 메워 가는데 1단에 품삯을 얼마씩 주면 인부들이 많은 수입을 위해 빨리 힘써 일할 것이다.
⑤ 석재 채취 : 돌은 산에서 다듬어 무게를 줄이면 실어 나르는 데 편리하다. 돌의 등급을 매기는데 큰 돌은 하층, 중간 돌은 중층, 작은 돌은 상층에 놓아 대소를 가려 사용한다.
⑥ 도로 닦기 : 수레가 다니도록 반드시 먼저 도로를 닦아야 한다.
⑦ 수레 만들기 : 기존의 큰 수레나 썰매는 효율적이지 못하므로 새로 유형거(遊衡車)를 고안하여 사용한다.
⑧ 성벽의 제도 : 성이 무너지는 것은 배가 부르기 때문이므로 성의 높이와 두께를 3등분 한다. 성을 쌓을 때 아래 3분의 2까지는 점점 안으로 좁혀 매 층의 차를 1촌으로 하며 비례를 좁힌다. 위는 3분의 1부터 점점 밖으로 넓히는 듯이 하되 매 층의 차를 3푼으로 한다. 이렇게 하면 성의 전체 모양이 가운데가 약간 굽은 듯이 보이는데 함경북도에 있는 경성의 성은 이 방법으로 쌓아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한 곳도 무너짐이 없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제안한 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정조가 정약용의 학식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볼 수 있다.
「성설」에선 다산이 애초 한 변이 약 1킬로미터(3,600보)로 화성 둘레를 잡았지만 공사 진행 중에 확장이 불가피해 4,600보가 됐다고 밝히고 있다. 정약용은 설계 계획과 방법론을 그의 『목민심서』에 적었다.
‘건축에서는 주관자 선정, 직책 분담, 기술자 선정, 경비 조달, 재목 구하기, 흙 구하기, 물 구하기, 돌 채취, 기와 굽기, 철물 구하기, 인부 조달, 장부 정리, 조경 등이 중요한 요소이다.
먼저 공사를 주관하는 도감을 선정하는 것이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공장(工匠)을 잘 얻으면 일을 설계하는 데 착오가 없어서 자재도 낭비하지 않고 노력도 덜고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에 반드시 국내에서 제일가는 목수로 도편수를 삼아야 한다.
흙은 공사장 바로 앞에서 구하여 연못을 만들어 연회처, 방화수, 성 밖의 참호로 활용하고, 기초를 다지는 데에는 기왓장과 잔돌을 채우는 것보다 삼화토를 채우는 것이 좋다. 또한 물은 현장에서 웅덩이를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좋다.‘
정약용은 기와 굽는 가마의 형태, 굽는 시기, 운반 방법 등은 물론 철물 구입과 제련 및 제품의 근량 감찰법, 인부의 마음가짐과 감독 방법, 부역의 부과 및 대납, 출납의 세세한 기록 등 장부 처리 방식 등에 대해서도 현재의 풍속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비판하고, 새로운 제안도 하는 등 개선책을 제시했다고 양윤식 박사는 적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축성계획안을 작성할 때의 나이는 겨우 31세에 지나지 않았다.
축성에 대한 특별한 경험도 없었고 더욱이 전쟁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단지 1790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에 참배가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할 때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에 조정에는 경험이 많은 축성 전문가와 전쟁에 일가견이 있는 장군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화성과 같은 중요한 공사 계획을 젊은 학자 다산에게 맡긴 것은 정조의 원대한 뜻이 담겨 있다고 김동욱 박사는 적었다.
한 마디로 정조가 바란 것은 기존의 생각과 방식으로 짓는 성곽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정조의 뜻을 정확하게 꿰뚫고 상업 도시에 걸맞는 새로운 성곽을 구상했다. 바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성곽이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ulmoe.quesais
<첨단 과학 기자재를 사용>
수원화성의 건설 계획이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당초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았는데 단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빨리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설계 계획의 치밀함에도 있지만 첨단 건설 기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축성에 동원된 기계 장비는 모두 열 종류였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각 장비의 종류와 공사장에 투입된 숫자가 명시되어 있다.
거중기 11량, 유형거 11량, 대거 8량, 별평거 117량, 평거 76량, 동거 192량, 발거 2량, 녹로 2좌, 썰매 9좌, 구판 8좌다.
대거․평거․발거는 소가 끄는 수레로 대거는 소 40마리, 평거는 소 열 마리, 발거는 소 한 마리가 끌었다. 별평거는 평거의 바퀴를 단 것으로 보인다. 동거는 바퀴가 작은 소형 수레로 사람 넷이 끌어 사용했으며 썰매는 바닥이 활처럼 곡면을 이루어 잡아끄는 기구이고 구판은 바닥에 둥근 막대를 여럿 늘어놓고 끌어당기는 작은 기구이다.
화성건축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다.
수원화성을 건설하기 전에 정조는 정약용에게 『도서집성』과 1627년 야소회(耶蘇會) 선교사인 테렌스 슈레크(중국 이름 등옥함)와 명나라의 왕징이 저술한 『기기도설』을 내려 화성 건설에 필요한 기중법을 연구하라고 했고 정약용은 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건설 장비를 만들었다.
거중기의 유용성은 적은 힘으로 큰 물건을 들어 올림으로써 인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직접 밧줄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움직일 때 잘못하여 손에서 밧줄을 놓치는 경우 물건이 떨어져 파괴되거나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거중기는 이러한 위험을 예방할 수 있어 화성 건설에서는 작업능률을 4~5배로 높일 수 있었다.
화성 건설에는 모두 11대의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중앙 정부에서 샘플로 1대를 만들었고 수원 현지에서 이 샘플을 본 따 10대를 만들었다. 거중기의 역할은 대단하여 수원화성 건설 기간을 당초 예상한 10년에서 단 2년으로 줄여놓았다고 정조가 치사했을 정도다. 정조는 거중기의 유용성 때문에 경비 4만 궤가 절약되었다고 말했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고안할 수 있었던 것은 약 150년 전 인조 23년(1645)에 사망한 소현세자의 공이 크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볼모로 9년을 심양과 북경에서 보냈는데 이때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로부터 천주교 교리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받아 귀국했다. 소현세자 자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조와 그의 후궁 소용 조 씨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서적들은 훗날 조선 실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다.
정약용도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독일인이 지은 『기기도설』에서 서양의 기구 그림들을 보고 거중기를 고안한 것이다.
거중기의 구조도와 원리는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나와 있음으로 이를 복원하는데도 큰 문제가 없었다. 거중기는 네 개의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횡량(橫樑)을 얹었는데, 여기에 도르래가 달린 중간횡량을 연결했다. 밑에 있는 횡량은 중간횡량과 도르래에 감긴 밧줄로 연결되고, 밑 부분에는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쇠사슬을 걸게끔 되어있다. 이 횡량은 밧줄이 당겨지고 풀려짐에 따라 아래위로 이동하게 됨으로 여기에 달린 도르래는 움직도르래 작용을 한다. 다리의 옆에는 두 개의 소거를 붙였는데 여기에는 밧줄을 풀고 조이는 얼레축과 큰 도르래를 달았다. 소거는 밧줄을 푸는 것이 마치 누에고치를 켜는 것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중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고정 도르래만 사용하지 않고 움직도르래를 도입하여 복합 도르래를 구성한 것이다. 고정 도르래의 경우 물건의 중량에 해당하는 힘을 주어야만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지만 움직도르래가 1개 있으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다. 따라서 움직도르래가 여러 개 일수록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이 배가되는 것을 정약용이 이용한 것이다.
얼레축의 직경이 큰 도르래의 직경보다 작기 때문에 얼레를 거쳐서 큰 도르래를 휘감고 지나가는 밧줄을 원래보다 더 강해진 힘을 상부의 횡량에 달린 도르래에 전달해 준다. 이런 복합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주 무거운 석재도 손쉽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사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규모가 매우 큰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화성 공사에서 규모가 매우 큰 돌이나 자재들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맞도록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거중기를 만들었다. 화성 건축에 사용된 거중기의 경우 7.2톤에 달하는 돌을 30명의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었음으로 장정 1명이 40킬로그램의 무게를 들어 올린 셈이 된다. 이 자체로만 보면 거중기의 효과가 매우 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중기와 같은 기계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당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더불어 정약용은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중기를 제작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화성 건설에 사용된 것보다 규모가 큰 수십 톤에 이르는 물건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말했지만 보다 큰 거중기는 제작되지 않았다.
화성 축성 과정에서 각종 기계 장비가 적극 활용된 이유는 다산과 같은 실학자가 공사에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공사 인원에 대해 노임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화성 축성은 수많은 석재가 사용된 큰 공사인데다 특히 석재를 채취하고 운반하는 작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과거에는 부역 노동을 통해 돈을 들이지 않고 백성들을 강제로 사역시킬 수 있었다. 국가 주도의 큰 공사가 있으면 일반 백성들은 부역의 의무를 져야 했으므로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지참하고 성 쌓는 작업 등에 투입됐다. 한마디로 무료 노동이다. 특히 신분상 관청에 속해 있는 장인들은 1년 중 일정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관청의 공사장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이런 부역 노동의 관습이 17세기경부터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순부터 부역 대신에 모군 제도가 시행되었다. 조세 제도도 바뀌어 실물 대신 돈이나 포목 등으로 대납이 가능했다. 더불어 부역 노동으로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면 효율이 떨어지므로 돈을 주고 일꾼을 고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노임제가 정착된 것은 정조 때부터이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여러 제도를 개선했는데 정조의 장자로 어려서 일찍 죽은 문효세자의 사당을 지으면서 작업 일수를 기준으로 한 노임제를 실시했다.
부역 노동이 사라지고 하루 일당을 기준으로 한 노임제가 정착되자 장인 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장인들이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여 유능한 기술자로 인정받으면 다른 기술자보다 더 많은 노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인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한층 증진시키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에 지급된 노임을 보면 기술의 차이를 정확하게 계산했음을 알 수 있다.
‘석공은 2인이 한패가 되고 하루 쌀 6되에 돈 4전 5푼을 받았고 대장장이는 조역 3인으로 한패가 되어 8전 9푼, 목수 등은 4전 2푼을 받았다. 이보다 일의 비중이 작다고 평가된 톱장이나 선장은 하루 3전, 벽돌굽는 장인과 잡상장은 쌀 3되와 돈 2 전, 기와장이는 날짜로 산정하지 않고 5량각을 지을 경우 한 칸에 6전, 규모가 작은 행각은 한 칸에 4전을 받았다. 짐을 짊어지고 나르는 짐꾼은 하루 3전을 받았으며 이들은 12명이 한패가 되었고 단순 잡역부인 모군은 하루 2전 5푼을 받고 이들은 30명이 한 패가 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작업에 반드시 노임이 지급되었는데 석재 운반은 공사비를 상승시키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때문에 공사 감독관들은 석재의 운반을 용이하게 하고 노임을 줄이기 위해 첨단 이동 기계를 적극적으로 채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유네스코(한국유산) > 수원화성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6) (0) | 2020.11.10 |
---|---|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5) (0) | 2020.11.10 |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3) (0) | 2020.11.09 |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2) (0) | 2020.11.09 |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1) (0) | 2020.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