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수원화성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3)

Que sais 2020. 11. 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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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설계도면에 의한 다양한 건축

화성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되자 조선 역사상 한양 건설 이후 가장 큰 도시의 건설을 명령한다.

성역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정조17(1793) 1수원유수부로 승격시킨 전후의 일이었지만 정조146월에 수원화성에 견고한 성곽을 갖춘 대도시를 건설하는 구상은 부사직(副司直) 강유(姜遊)의 제안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현륭원 천봉 직후 강유는 수원에 축성설참(築城設塹)할 것을 제안하였다.

 

수원(水原)은 곧 총융청(摠戎廳)의 바깥 군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이고 더구나 또 막중한 능침을 받드는 곳이니, 의당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새 읍을 옮겨 설치하였으나 성지(城池)의 방어설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번에 옮겨 설치한 것을 계기로 성지도 아울러 경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옛 사람의 말에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한 것은 곧 참호를 설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어느 곳에나 산을 의지하여 쌓게 되어 참호를 설치할 수 없으니, 이는 옛 제도가 아닙니다. 새 읍은 이미 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므로 과연 성을 쌓고 참호를 설치한다면 실로 성을 설치하는 조건에 맞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여기에 성을 쌓아 독산성(禿山城)과 서로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고, 유사시에 협공의 형세를 이루게 한다면 설사 난폭하고 교활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병법(兵法)에서 꺼리는 것임을 알고 감히 두 성 사이를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만약 석성(石城)을 쌓자면 비용이 많이 든다 하여 어렵게 여긴다면, 토성(土城)을 견고히 쌓는 것이 주먹같은 돌을 포개어 쌓는 것보다 도리어 낫습니다. 만약 토성에다가 성가퀴를 설치하고 군데군데 치성(稚城)을 설치하면 방어하는 방도로는 석성이나 토성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새 읍에 집을 짓는 자는 절반이 유생(儒生)이라 합니다.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 그들과 더불어 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역시 군사들을 불러들여 집을 짓게 하고 복호(復戶) 5백 결을 내어서 그 절반을 군병에게 떼주어 살아갈 길을 삼게 하며, 또 각 군문으로 하여금 새 읍 부근에 둔전을 설치하게 하여 군병들이 농사를 짓게 하고 군문에서 그 세를 징수하게 한다면 토지 없는 군사들이 반드시 앞을 다투어 모집에 응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제안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우선 그는 수원총융청(摠戎廳)의 외영으로서 국가의 중진(重鎭)이요 현륭원이 위치한 곳이므로 성지(城池)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수원신읍(水原新邑)은 들 가운데 있으니 축성과 설참을 함께 하여야 하고, 여기에 축성하여 수원 남쪽의 독산성(禿山城)과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어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축성의 기본 방략으로 그는 비용이 많이 드는 석성(石城)이 아니라 토성(土城)을 쌓자고 하면서, 여기에 여장(女堞)을 설치하고 곳곳에 치성(稚城)도 설치하면 토성도 석성과 다름없이 방수(防守)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읍에 집지은 자 태반이 유생이니 유사시에 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하고, 군병이 될 수 있는 일반 백성의 확보방안까지도 제안하였다. 군병을 모입(募入)하여 집을 짓게하고 복호(復戶) 500() 중 절반을 군병에 주어서 생활방도를 마련해주며,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을 신읍 가까이 두도록 해서 군병으로 하여금 농사짓게 하여 군문이 수세하게 하면, 군병 가운데 토지 없는 자들이 다투어 응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미 조정에서 논의되었던 수원의 대도회로의 발전 구상과 모민(募民) 논의를 보완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조비변사에 의논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정조의 명은 곧바로 진행되어 정조 17(1793) 112수원부화성(華城)이라 개칭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유수 제도의 기원은 중국에서 황제가 수도를 비울 때 유수를 두어 수도를 지키게 하거나 옛 도읍지에 유수를 두어 행정을 맡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이 제도를 도입하여 남경(경주)과 서경(평양)유수를 두었다.

조선에서 유수부는 여러 곳으로 경기도에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인조가 피신한 적이 있는 강화,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가 있었는데 화성새로 유수부로 승격된 것이다.

그러나 개성, 강화, 광주, 화성 유수의 직위는 조금씩 달랐다. 특히 개성부와 강화부의 유수2인데 비해 화성부와 광주부의 유수는 수도 한성부의 장관한성판윤 즉 현 서울시장과 같은 2이었다. 당시 전국 8도의 관찰사2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화성의 지위를 얼마나 높여 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하튼 초대 유수에는 채제공이 임명되고 장용영 외사와 행궁 정리사를 겸임하였다.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이처럼 장용외영(壯勇外營)을 출범시키고 수원을 화성(華城)이라 명명하여 수원의 새이름에서부터 축성(築城)의 의지를 공고히 했다. 이에 따라 채제공은 그해 5월 영의정으로 임명되기 직전 ‘축성방략(築城方略)’을 올려서 화성성역의 구체안을 제출하였고 이를 검토한 정조가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금구(金甌)에 점쳐진 사람은 모두 303인이었으나. 영의정에 오른 사람은 경까지 합해서 대략 100여 인이다. 대체로 재상이란 막중한 직임인데, 그중에도 영의정은 더욱 막중하다. 그 적임자를 중난하게 여겨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 때가 있음은 예전부터 이미 그러했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인재 얻기 어려움이 예전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내가 어떻게 자세히 살피고 또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경에게 뜻을 기울여온 지 여러 해이다. 그러면서도 화성(華城)은 바로 선침(仙寢)을 받들어 모신 지방이며 부(府)로 승격된 초기이기에 원로를 얻어 그의 성망(聲望)을 빌어 그곳을 격상시키려는 생각에서 부득불 번거롭게 경을 한번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경이 직임을 맡은 이후로 큰 강령을 정돈하고 곁으로 자잘한 일들에까지도 밤낮으로 힘을 다하니, 도리어 경을 위해 염려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던 차에 경에 올린 축성방략(築城方略)을 보니 늙은 재상의 정신을 쓴 것이 더욱 마음에 감동되었다. 백리를 갈 때에는 90리가 반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것은 바로 시작이 반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같이 경영하여 시작하였으니, 이루어내는 공은 오직 감독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어찌 몸으로 노력하는 일에까지 거듭 수고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에게 영의정을 제수하고 이에 사관을 보내어 속히 돌아오기를 권면하노니 경은 모름지기 당일로 길을 나서도록 하라.‘

 

당시 정부는 10년치 정번전(停番錢) 25만 냥 등 4050만 냥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정조는 총찰(摠察)의 책임자채제공을 임명했고 채제공조심태(趙心泰)감동(監董)으로 추천했다.

 

채제공

화성성역은 정조 17(1793) 124일 수원에 축성을 하기로 결정했음에도 이미 구체적 방략이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정조는 그 이전부터 생각했던 대로 수원 공석면(空石面)에서 나는 돌로 석성(石城)을 쌓기로 하고, 이 성이 산과 들에 걸치게 되므로 곡성(曲城)으로 쌓아 여기에 ()와 치첩(稚堞)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화성 축성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팔도의 축성 경험이 동원되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팔도(八道)에 명하여 화성축조에 참고될 수 있는 설계도를 그려 바치라고 명령했다.

당시 정조가 얼마나 수원화성 건설에 몰두했는가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윤범행(尹範行)이 그려 바친 그림이 매우 조잡하자 곧바로 그의 관직을 삭탈한 후 체포하여 추문케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화성(華城)이란 명호(名號)는 현륭원을 천봉(遷奉)화산(花山)에서 비롯되고, 그 이름에는 장수(長壽)부귀(富貴)다남(多男) 등 도시번영을 위한 송축(頌祝)의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성을 자연지형에 따라 버들잎 모양으로 남북이 조금 길게 축성한다면, 신읍터의 지형과 본래의 이름인 유천(柳川 ; 버드내)에도 잘 부합된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화성이란 이름이 단순히 추복받은 명호라는 데 그치지 않고, 수원 신도시 건설과 성곽 축조에 있어서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계획도시로서의 조형미(造型美)를 살리려는 정도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수원화성 건설은 정조 18(1794) 228일 공식적으로 착공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건축 설계할 때 현지 상황을 철저히 조사하여 반영하도록 했다.

당시 수원화성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적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있을 정도다.

 

내일 곧 수원으로 내려가 성 쌓을 기지를 고루 살펴보겠다고 하니 화공도 데리고 내려가서 지형을 그리되 성자리만 그릴 것이 아니라 읍내와 동에, 시가의 도로며 눈에 띄는 산과 들까지 다 그려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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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화공수원성 설계를 담당하는 건축가를 의미한다. 화성성역의궤에는 () 제도함경도 경성의 성 제도를 참조했으며 초루(譙樓)경상도 진주성을 참작하여 설계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화성 건설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어 진 문제치수(治水)와 수리(水利)의 문제.

화성을 건설하는 기간 중 수원의 하천 상황에 유의하여 성곽 내의 도심을 통과하는 유천(柳川, 수원천)과 기타 팔달산에서 흘러나온 지천(支川)을 관리하는 여러 조치와 성밖 진목천영화천 등 물줄기를 저수하여 농업용수로 이용하는 등 방안 등을 마련했다. 특히 하천을 준설하여 제방을 쌓고 연못수로제언교량과 수문수갑(水閘)을 설치하였으며 수차를 제작하고 측우기를 상시 활용토록 했다.

 

수원화성 저수지유적

이때 건설되었던 만석거 저수지와 대유둔(大有屯, 일명 北屯)은 조선 후기 수리와 영농 기술의 발달에 부응하면서 화성의 선진적 생산기반시설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이 성공으로 만년제(萬年堤), 축만제(祝萬堤), 축만제둔(祝萬堤屯, 西屯)과 남제(南堤)의 건설로 확대된다. 이들의 성공은 수원에만 그치지 않고 적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며 우리나라 농업발달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당초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179610월 단 34개월에 완성되었는데 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감안하면 실제 공사기간 28개월 만에 낙성연을 치른 것이다. 공사에 투입된 인원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목수 3,035, 미장이 295, 석수 642명을 비롯해 기술자만 11820명이 동원됐으며 석재 1876백 개에 벽돌만 695천 장이 들었다.

 

<성곽의 기초>

성곽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보아 성벽, 성문, 성벽에 부가되는 방어시설이다.

성벽은 흙으로 쌓는 토성과 돌로 쌓는 석성이 대부분이고 특수하게 벽돌로 쌓는 경우도 있다. 토성은 쌓는데 다소 편리하지만 폭우 등이 내리면 무너져 내리기 쉽고 자주 보수를 해주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석성은 우리나라 산성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고구려의 경우 산성200여 곳 이상으로 축성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이다. 반면에 벽돌성은 조선 초기에 의주나 함흥 읍성에 쌓은 적이 있고 숙종강화 외성정조화성의 일부 구간에서 축조했다.

성벽의 축조 방식에는 협축(夾築)은 성벽의 안과 밖에 모두 석축을 쌓는 것이고 내탁(內托)은 바깥 쪽에만 석축을 쌓고 안에는 성벽 높이까지 흙을 돋우는 방식인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내탁 방식을 사용하여 성벽을 건설했다.

성벽 위에는 여장 또는 성가퀴라는 낮은 담을 다시 쌓고 여기에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여장의 높이는 보통 1.8미터, 길이는 3미터 정도이며 여장과 여장 사이에 약간의 틈을 두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여장 하나를 1()로 표기하는데 여장과 여장 사이의 틈을 타구(垜口)라고 한다. 또한 여장에 밖을 보면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총안(銃眼)이라고 한다. 총안과는 달리 성벽에 현안(懸眼)이란 것도 두는데 현안은 성벽에 수직으로 길게 구멍을 내서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성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문이다.

공격군이 가장 먼저 공격하는 곳이 성문이며 가장 많은 수비병을 배치하는 곳도 성문이다. 성문이 뚫리면 성이 점령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성문이다.

그러므로 성문을 설치하는 곳에는 따로 성벽을 두텁게 쌓아 올리고 석재도 특별히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을 사용했다. 또한 석축 한가운데 아치형의 출입구(홍예문)을 내고 석축 위에 누각을 세워 문의 위용을 높였다.

그러나 성문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므로 문 앞에 성벽을 한 겹 더 쌓았다.

이것을 옹성(甕城)이라고 부르는데 한자로 ()은 항아리를 뜻하므로 그 모양이 항아리 같이 둥글게 만든 것이다. 물론 때때로 네모 난 옹성을 쌓기도 했다.

 

옹성

성벽에는 성벽과 성문 사이에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키려는 방어시설인 ()를 두었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쉽게 관측하는 등 전투력을 배양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치성이라고도 한다.

고구려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유명한 백암성의 경우 5개의 치가 남아있는데 그 크기가 6제곱미터로 56미터 사이를 두었다. 석대자산성에서는 10개나 된다.

화성에서도 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여기에 군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포루(鋪樓)나 적루(敵樓)를 두었다.

성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설이 외부와의 통신시설봉돈이다.

봉화대의 기본 역할은 변방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긴급 사태를 중앙에 급히 알리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 횃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던 통신 제도로 이를 봉수제라고 부른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조선의 봉수제는 세종 때에 정비되었는데, 평시에는 횃불을 1, 적이 나타나면 2, 국경에 접근하면 3, 국경을 넘어오면 4,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봉수간선은 직봉이라 하여 경흥, 동래, 강계, 의주, 순천5개처를 기점으로 하여 한양의 목멱산(현재의 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직봉 외에도 간봉이라는 보조선이 있어 본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