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유래 없는 공사보고서>
화성의 높이가 고작 4미터 정도로 여장을 합해도 5미터에 지나지 않아 외국의 일반적인 성들이 보통 10미터를 넘는 것을 볼 때 다소 작게 느껴지며 실제로 성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화성은 18세기의 군사 기술적 측면을 고려해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문중양 박사는 설명했다. 그의 화성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전쟁 양상은 종래와 상당히 달라졌다. 즉 18세기 이후 대형 화포와 같은 화약 병기의 파괴력이 막강해지고 성능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용되던 ’불랑기‘에 이어 영조 때 들여온 서양식 화포인 ’홍이포‘의 등장 등이다. 그에 따라 전체 전투력에서 차지하는 화약 병기의 비중은 절대적으로 커졌으며 전투의 양상과 전술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홍이포와 같은 화포를 주력 무기로 하여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반적인 성체의 구조와 규모로는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즉 양쪽을 돌로 쌓아 얇고 높게만 축조해 올린 종래의 성체는 강력한 화력을 가진 대포에는 적합지 않은 것이다. 적의 대포 공격으로 쉽게 성벽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이고 높은 성벽 위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포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성을 공격해 오는 적들을 과거와 같이 활이나 소총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성의 구조가 필요했다.
외벽은 큰 돌로 쌓아 올리지만 내벽은 내탁 방식으로 자갈과 흙을 이용해 두텁게 쌓은 것도 비록 산성이 아닌 읍성이지만 이와 같은 대형 화포의 공격에 끄떡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성벽의 높이도 4미터를 기준으로 한 것도 이와 같은 화포의 공격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이다.’
화성의 성벽은 전략적인 용도 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 지식을 도입하여 설계되었다.
성벽의 특징은 성벽과 여장(성의 담) 사이에 검은색 벽돌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생김새가 눈썹 같다고 해서 눈썹돌 또는 미석(楣石)이라고 부른다. 미석을 성벽과 여장 사이에 끼워놓은 이유는 선조들이 물질이 상태가 변화할 때 부피가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이 얼면 부피가 팽창한다는 것을 잘 안다. 만약에 성벽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든 채로 겨울을 지내다보면 물이 얼어 성벽이 쉽게 무너질 수가 있다. 그러나 미석을 끼워놓으면 비나 눈이 와도 물이 성벽으로 스며들어가지 않고 미석을 타고 바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화성의 과학성은 이뿐이 아니다. 성벽 전체를 견고한 방법으로 축조했다.
돌을 쌓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돌을 성벽과 나란한 방향으로 여러 겹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벽의 방향과 직각을 이루는 가로방향으로 깊숙이 박히도록 쌓는다. 두 가지 중에서 후자가 더욱 견고하다.
성벽의 앞부분이 무너진다고 할 때 돌을 성벽과 나란하게 여러 겹 쌓으면, 만약 성벽 앞부분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뒤에 있는 돌들이 노출돼 쉽게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돌을 성벽과 직각으로 깊숙하게 박히도록 쌓으면, 성벽 앞부분이 무너진다고 해도, 뒤 부분은 여전히 다른 돌과 맞물려 있다.
화성 성벽의 돌 쌓는 방법은 후자로 여기에 뒤 부분의 돌들이 더욱 잘 맞물리게 하기 위해서 화성의 성벽 돌에는 잘게 부순 자갈을 넣어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또한 성벽 전체의 형태가 구불구불한 특징을 갖고 있다.
성벽을 반듯하게 쌓지 못해서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아치를 만들면 더욱 견고해진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아치 효과를 내면 성벽의 돌과 돌이 더욱 견고하게 맞물려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다.
성벽의 전체적 형태 외에도 아치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성벽의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밑에서 중간부분까지 안으로 욱여 들여 그 모양이 마치 안으로 축소시킨 것처럼 쌓고 중간부분에서 위로는 밖으로 뻗은 것 같아서 위에서 보면 안으로 구부정한 듯하게 쌓았다. 이렇게 된 결과 성벽의 허리가 잘록하게 됐다’
성벽의 허리를 잘록하게 쌓음으로써 돌과 돌 사이가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뜻인데 이런 형태는 적군이 성벽을 쉽게 타고 오를 수 없는 이점도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완전한 아치 형태가 아니다. 재래식 기법에 익숙한 석공들이 정약용이 당초 의도한 설계 의도를 모르고 위로 가면서 돌을 밖으로 내밀어 쌓는다면 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성이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성곽의 건물도 중요하지만 화성 건설의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역시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수준의 도시 건설 공사 보고서를 남긴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 생전에 10권 9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편찬되었으며 정조 사후인 1801년에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의 축조와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화성의 설계 도면과 설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설’은 물론이고 사업의 진행상황과 말단 인부들까지 빼놓지 않고 참여 인물들을 수록했다. 화성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상당히 파괴되었지만 대부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화성의 주요 건축물>
화성은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진 다양한 건축물들과 시설물들이 유효적절하게 배치되었다. 4개의 성문, 5개의 암문(비밀통로), 2개의 수문, 2개의 노대, 4개의 적대(敵臺), 3개의 공심돈(지금의 화점), 8개의 치성(성심의 돌출부), 5개의 포루(포진지), 2개의 장대(지휘소), 4개의 정자, 1개의 봉돈(봉화대), 7개의 감시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① 성문
동(창룡문)․서(화서문)․남(팔달문)․북(장안문)에 각기 하나씩 네 개의 성문이 있는데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가장 크다. 장안문은 건물 높이만 해도 32척9치로 2층으로 되었고 상․하층이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두공은 포식두공으로써 아래층은 내7포, 외5포이며 상층은 내외7포이다.
팔달문과 장안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부분은 우진각지붕이라는 점이다. 지붕은 건물의 격식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는데 제일 간단한 형식이 양 지붕면이 경사진 맞배지붕이고 이보다 격을 높이면 지붕 앞뒷면이 경사지고 양 측면은 수직으로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경사지는 팔작지붕이 된다.
그런데 우진각지붕은 지붕 사면이 모두 경사졌다. 이것은 과거에는 흔히 사용되었지만 긴 추녀목을 필요로 하므로 재료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시대 말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울의 사대문과 경복궁․창덕궁의 정문 등 몇몇 특별한 곳에만 한정적으로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화성의 성문에 우진각지붕을 채택했다는 것은 화성 성곽의 격식이 도성에 버금갈 정도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붕 용마루 끝에는 추두, 추녀마루에는 여러 가지 동물 형태들이 배치되었다. 또한 좌우에 적대가 대칭적으로 서 있는데 이것은 문의 위용을 더욱 높여주기 위해서다. 문 좌우에 높은 대를 쌓은 까닭은 유사시에 이곳에 군사를 배치해서 문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성문을 공격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팔달문은 성의 남문으로 홍예의 넓이가 장안문과 약간 차이가 날 뿐 건축적인 규모는 물론 구성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똑같다. 이는 장안문의 건축 설계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창룡문과 화서문은 석축의 규모도 작고 석축 위의 누각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격식 또한 낮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기둥 위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간단한 첨차(檐遮)가 이중으로 놓인 이익공(二翼工)이다.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이다.
이 두 문에도 바깥쪽으로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옹성의 출입문은 장안문이나 팔달문과는 달리 한쪽 구석에 나 있다. 또한 창룡문과 화서문의 경우 주변 지형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좌우에 적대를 두지 않았다. 그 대신에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문 옆에 동북공심돈, 서문 옆에 서북공심돈을 세웠다.
② 옹성과 적대
옹성은 성문을 밖으로 둘러싸고 견고하게 방어하기 위한 성벽이다. 형태는 성문이 크고 작음을 고려하여 밀폐된 반원형과 반개방적인 반원형으로 구성하였다.
화성의 옹성이 특이한 것은 출입문이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래 옹성의 출입문은 적이 성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막고 쉽게 출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한족 모퉁이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화성에서는 일부러 한가운데 출입구를 두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 중앙에 출입문을 둔 것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했다고 적었다. 그것은 설계자가 화성에서는 유사시의 방어뿐 아니라 평상시 사람이나 물자의 원활한 유통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옹성 출입문 위에는 누조(漏槽)라고 하는 큰 물통을 만들고 여기에 물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구멍 다섯 개를 내고 이름을 오성지라 했다. 오성지는 다산 정약용이 중국의 병서를 참고해 고안한 시설로 조선에서는 화성에만 설치되었다.
적대(敵臺)는 남․북문에만 좌우 하나씩 있는데 여기에 대포를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퇴치할 수 있는 방어 요새로도 활용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적대의 규모는 높이 22척, 넓이가 21척이다.
또한 적대에는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현안(懸眼)이 설치되었다. 현안은 중국의 병서에는 자주 언급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경기대학교의 김동욱 박사는 적었다. 현안은 각 적대 외벽에 세 개씩 만들어졌는데 세로로 된 긴 홈 셋이 나란히 장식되어 독특한 외관을 이룬다.
③ 암문
암문은 일종의 성내 비밀 통로로 모두 다섯 군데에 설치되어 있다. 이른바 본성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후방에서 군량을 운반하거나 연락을 취하는 사잇문으로 치성과 적대, 옹성과 함께 고구려 산성부터 도입된 시설물이다. 대부분 성의 구석진 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평상시에는 막아두었다가 필요한 때만 열어 외부와 통할 수 있게 했다.
④ 장대(將臺)와 노대(弩臺)
장대는 일종의 전쟁 지휘소로 장수가 장졸들을 모아 놓고 훈련을 하거나 지휘하는 곳으로 성곽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건물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전반 지형을 볼 수 있는 장소에 배치했는데 화성의 서장대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으며 동장대는 동북쪽 구릉지에 있으므로 신호를 통해 쉽게 교신할 수 있다.
서장대는 돌로 쌓은 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으며 1층은 9칸이며 한 칸 너비는 13.2척이다. 장대의 후면에 8각 노대가 있고 장대와 노대 사이의 측면에 3칸으로 된 후당이 있는데 여기에서 사령관이 위치하며 군사적 사무를 처리했다.
서장대 앞 좌우에 외간(桅杆)이란 높은 깃대를 세웠다.
성안 사람들은 외간 끝에 걸린 깃발을 보고 군사 조련이나 특별한 행사 등 서장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동장대 주변의 탁 트인 넓은 공터에서 성안에서 벌어지는 큰 행사를 자주 치렀다. 대표적인 것이 호궤(犒饋) 행사로 주로 군인들을 대상으로 음식물을 베푸는 것이다. 화성에서는 축성 공사를 하면서 열한 차례나 감독관이나 장인 및 노동자들에게 크게 호궤를 베풀었는데 그 중 여섯 번을 동장대에서 치렀다.
두 지휘소 근처에는 각각 노대가 있다. 노대는 원래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높은 위치에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구축한 진지였는데, 화성의 노대는 이곳에 올라 적들의 공격 상황을 측후하면서 지휘소와 성 전체에 오방색의 깃발 등을 이용해 신호를 보내는 기능도 겸비했다. 그야말로 사령부 바로 옆에 정찰대와 통신소를 함께 둔 것이다.
⑤ 치성과 공심돈
고대 성곽에는 ‘치성’을 기본적으로 설치했다. 치성이란 성벽에서 일정 정도 돌출된 진지를 말하는데 성벽을 타고 오는 적들을 좌우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방어 진지이다. 화성에서는 순수한 치성이 모두 8개소인데 과거와 같이 치성에서 활과 소총으로 공격해오는 적들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화포로 공격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당연히 포대(포루(砲壘))와 포루(鋪樓)의 형태도 달라졌다.
포루(鋪樓)는 약 7미터 정도 돌출된 치성의 위에 벽돌로 여장을 구축하고 누각을 지은 것인데 기상 여건에 상관없이 화포를 발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포대는 포루(鋪樓)와는 달리 성벽에서 약 8.8미터 정도 돌출된 지지 전체를 벽돌로 쌓았으며 그 내부는 비워 3층으로 만들었다. 각 층마다 화포를 설치해 성벽 위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서 공격해 오는 적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격파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화성에는 3개의 벽돌로 건설된 공심돈이 있는데 동북공심돈은 원형이며 나머지는 정방형 단면을 갖고 있다. 특히 원형 평면인 동북공심돈은 나사못과 같은 단면 구조를 갖고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으며 장병들이 머물고 무기를 둘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동북공심돈과 포대는 그 구조 형태가 종래의 성곽 건축 설계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다.
공심돈의 유래는 돈대인데 성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해 적의 공격을 미리 알리고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포의 성능이 우수해지자 본성에서 외로이 떨어진 돈대는 오히려 각개 격파될 위험성이 있으므로 화성에서는 공심돈을 아예 본성에 붙여 치성 위에 구축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성의 공심돈은 치성 위에 구축했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멀리 떨어진 적들을 공략할 수 있다.
이러한 공심돈의 구조는 1621년에 편찬된 명나라의 병서 『무비지』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중양 박사는 중국의 공심돈은 본성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설치하도록 한 것이므로 성벽에 붙여 구축한 것은 화성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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