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수원화성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2)

Que sais 2020. 11. 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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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건설이 최선>

정조가 이렇게 활발하게 내외적인 업적을 쌓아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에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불명예스럽게 뒤주 속에서 사망한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였다. 그래서 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아버지 사도 세자에 대한 효성과 추모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1762영조(英祖) 38521일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한여름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세자책봉되어 한때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 쟁취를 위해 대립하고 있던 노론과 소론 간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부친의 미움을 사 28세란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시 정조의 나이는 10였다.

32년 후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호장헌(莊獻)으로 고치고 어머니의 존호를 혜빈(惠嬪)에서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였다. 또 아버지의 사당을 크게 지어 경모궁(景慕宮)이라하고 창경궁 내에 경모궁이 바라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어머니가 머물 새 전각을 지어 자경전(慈慶殿)이라 명명했다.

즉위 13(1789)에는 부친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수원 화산(花山)현륭원(顯隆院)으로 옮기고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 넓은 기슭으로 이전했다.

 

융릉(사도세자 장조)

원래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에 옮기는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현지를 답사한 영의정 김익,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채제공 등이 수원을 살펴보고 최고의 길지(吉地)라고 보고했다. 정조실록137월의 일이다.

 

 “지사(地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극히 길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다. 화산(花山)이 왼쪽으로 돌아 건방(乾方)으로 떨어져서 주봉(主峰)이 되고 건방의 주산(主山)해방(亥方)으로 내려오다가 계방(癸方)으로 돌고 다시 축방(丑方)으로 뻗어오다가 간방(艮方)으로 바뀌면서 입수(入首)하였다. 앞에 쌍봉(雙峰)이 있는데 두 봉우리 사이가 ()이 되고, 안에 작은 ()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구슬 같다.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안장(安葬)하면, 그 구슬은 턱밑의 구슬이라 할 수 있고 공은 빈 곳을 안대하는 공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으로 건방에서 득수(得水)하고 왼쪽으로 을방에서 득수하며 또 신방(申方)의 물이 오방(午方)에서()하니, 수법(水法)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청룡 네 겹과 백호 네 겹이 에워싸 국세(局勢)가 만들어졌는데, ()이 맺힌 곳이 마치 자리를 깐 것처럼 펑퍼짐하니 혈 자리가 분명하다. 뻗어온 용의 기세가 7백 리를 내려왔는데 용을 보호하는 물이 모두 뒤에 모였으며, 현무(玄武)입수(入首)하였으니 천지와 함께 영원할 수 있는 더없는 대지(大地)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일찍이 효종(孝宗)의 사후(死後) 윤선도(尹善道) 등에 의하여 능묘 후부지로 지목될 만큼 반룡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을 지닌 최길지(最吉地)의 명당으로 꼽혀왔다. 정조영의정 김익천원도감(遷園都監)원소도감(園所都監)도제조로 삼아 천장을 추진하는 한편, 경기관찰사에 서유방(徐有防), 수원부사에 조심태(趙心泰)를 임명, 이읍(移邑)과 천릉작업을 관장케 하였다.

정조 13(1789) 8월에는 신원(新園)의 원호를 현륭(顯隆)이라 정하고 곧바로 공사에 들어가 107일에 관을 옮겨 넣는 천릉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현륭원구 수원읍 관청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당연히 무덤 앞에는 재실이나 전사청 등 제사와 관련한 여러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현륭원의 경우 구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결국 고을 중심부에 무덤이 들어서면서 수원은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조헌륭원을 공사할 때부터 수원부치(府治)를 팔달산 기슭 신기리(新機里)로 옮기는 대대적인 신도시 이전작업을 병행해서 진행했다.

정조가 신도시를 병행해서 진행한 것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와 신하들의 한결같은 충성으로 그려진 중국 한나라의 군주 모습을 꿈꾸었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 충성스러운 신하, 둘째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미 서울은 모든 면에서 기존 세력들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기존 관료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가 수원새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정조 시대에 서울이 급격한 도시적 발전을 이루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외 유통경제망의 중심으로서 서울은 상업의 요지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로와 청나라와 일본 무역로를 통하여 외부 세계와 연결된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서울 특유의 문화를 꽃피웠다. 이 결과 자연스럽게 서울생활권의 확대를 가져오고 서울과 교외의 범위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즉 서울에서 삼남(三南)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확대와 수도권 교통의 요지에 새로운 도시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내외부적인 발전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상향을 펼치기 위해서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자 이를 다목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구상을 한다. 정치경제의 공간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시키면 금상첨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조의 목적에 딱 알맞은 장소가 바로 수원부였다. 수원부는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데다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조는 수원부를 표면상 능침을 보호하는 도시인 동시에 자신이 은퇴하여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내려와 머물게 될 곳임을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수원을 자신의 꿈을 펼칠 새로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절차를 착착 수립했다. 우선 국왕의 친위 부대로 만든 장용영내영과 외영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장용외영현륭원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수원부에 두었다. 장용외영을 수원부에 설치했다는 것은 조선 팔도 안에서는 한양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도시보다 강력한 지위와 군사력을 갖춘 실질적인 조선 제2의 도시라는 것을 의미했다. 장병의 숫자도 5,000명이나 되었다.

수원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추자 정조 17(1793)에 수원부의 명칭을 화성으로 고치고 유수의 관직을 정2으로 정했다. 이것은 수원부광주부와 함께 서울 다음의 대 도시라는 서열에 공식적으로 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다목적 기능의 신도시 건설

한국 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화성수원이 다른 성곽과 차별되는 것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산성(平山城) 형태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17세기를 전후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기존 성곽 제도의 문제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전도

임진왜란 때 조선이 우여곡절을 겪은 후 일본을 격퇴시켰지만 전란 초기에 관군은 무력하게 패퇴했고 왜군의 진격로에 있던 읍성들의 방어벽은 쉽게 무너졌다. 그러므로 선조의주로 피난 갔다 서울로 돌아온 후 전국적으로 산성 정비 명령을 내렸다. 현재 각 지방에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산성들은 바로 이때 손질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맹활약을 한 당시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사회의 안정을 되찾는 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국토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그 주요 내용은 산성의 보수와 읍성의 방어시설 강화였다.

유성룡읍성치성을 쌓고 옹성과 현안(懸眼), 양마장(羊馬墻)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양마장이란 성 밖의 호 안쪽에 성벽을 한 겹 더 쌓아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안팎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군 시설물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벌인 조헌(趙憲, 15441592)과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귀환한 강항(姜沆, 15671618)도 각기 중국과 일본 성곽의 장점을 들어 우리나라 성곽의 개선안을 내놓았다.

이들 개선안의 공통점은 기존의 읍성이 너무 넓고 큰 데다 방어할 만한 시설이나 지리적 이점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유성룡은 읍성 강화책으로 치성이나 포루 등 새로운 시설을 갖출 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이때 17세기의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柳馨遠)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기존의 국방 개념인 산성 의존에서 벗어나 읍성의 적극적인 강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조선의 산성이 평상시 거주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므로 백성들이 위급한 때를 당해도 산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결론은 산성이 전투하는 데나 방어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읍성을 튼튼히 만들어 이를 지키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주하는 주민의 수를 늘리고 그들의 경제 활동을 장려해 읍을 부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형원의 주장18세기에 들어와 채택되어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주요 도시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황주읍성, 전주읍성, 대구읍성, 동래읍성, 해주읍성, 청주읍성이 개축되었다.

물론 이 당시 읍성의 개축은 유형원의 주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재화가 쌓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는 단순한 행정 명령을 수행하는 장소에서 경제활동의 거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산성보다는 일상의 경제 생활이 영위되는 도시의 안전이 보다 현실적인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루어진 읍성의 개축은 기존 읍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무너진 부분을 다시 보수하는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수원화성은 기존의 성곽과 읍성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혁파하는 신 도시였다.

 

<생업을 고려한 도시 건설>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어려운 많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어 망루는 물론 총안(銃眼), 총구멍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다목적 용도로 건설되었다. 특히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서 축성되었으며, 한국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책으로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화성 남북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류천에는 수문이자 교량 역할을 하되 비상시에는 군사시설이 되는 북수문과 남수문을 건설했다

 

북수문과 화홍문

 

화성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로서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팔달산 기슭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로 된 도로가 건설되었다. 이 십자로 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의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부상시키는 데 혼심의 힘을 쏟았다. 수원의 개발을 위해 사전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은 정조실록142월 채제공의 말에도 나타난다.

 

 “일전에 수원(水原)의 새 고을에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일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방안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본부(本府)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원래 가난하게 살아오던 터이어서, 옛 고을의 1천여 호에 가까운 집들이 달팽이처럼 생긴 오두막뿐입니다. 이번에 고을을 옮기고 나서도 만약 또 예전과 같다면, 거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을 강제로 내몰아 큰 집을 억지로 지으라고 한다면, 비록 을러대고 권고해도 결코 해내지 못할 것으로 압니다.

길거리를 정연하고 빽빽하게 만드는 방법은, 전방들을 따로 짓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선 서울의 부자 20여 호를 모집하여 무이자로 1천 냥을 주어서, 새 고을에다가 집을 마주보도록 지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는 재미가 있게 한 다음, 몇 해를 기한으로 차차 나누어 갚게 한다면, 조정에서도 별로 손해가 없고 새 고을에는 부락을 이루고 도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기와입니다. 만약 1만 냥록 팎의 돈을 시험 삼아 본 고을에 내주어 기와를 굽게 하여, 사려는 사람들에게 팔되 절대 이익은 취하지 말고 본전만을 받는다면, 기와집을 어자 시험 세울 수 있고 나라 돈험 축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도백과 본 고을에서 조치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마련하는 데는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을의 근방에다가 한 달에 시장을 여섯 번 세우고 한 푼이라도 절대 세를 거두지 말고 단지 서로 장사하는 것만을 허락한다면, 사방의 장사치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모여들어서 전주(全州)나 안성(安城) 못지 않은 큰 시장이 형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은 저절로 살림에 재미를 붙일 것이고, 비록 다른 고을의 백성들이라도 필시 모아들이기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제 발로 찾아올 것입니다. 만약 고을의 모양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듯 합니다.” 

 

여기서 채제공은 상가를 조성하여 서울의 부호를 옮겨오게 할 것, 수원부에서 기와를 구워 기와집을 짓게 할 것, 수원부 주변에 매달 6개의 5일장을 개설하되 세금을 받지 말 것 등을 건의하는 등 수원을 특별 대우하도록 건의했다.

그런데 채제공의 제안에 대해 일부 대신들은 수원에 시전을 새롭게 설치하는 것은 서울 상인들과 대립할 염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이에 수원부사 조심태가 구체적인 수원의 진흥책을 제시했다.

그는 수원에 전국의 부호를 모아 시전을 설치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므로 차라리 수원 지역 사람들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아는 자를 택해서 읍에 살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60,000냥 정도를 중앙 정부에서 부자들에게 빌려주고 매년 이자를 쳐서 3년 기한으로 본전을 거둬들이면 백성이 모이며 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의 제안은 대신들의 전폭적인 짖을 받아 곧 65,000냥이 조달되었고 수원 상업 발전의 토대를 이루기 시작했다. 현재로 치면 상인들에게 금융 특혜가 부여되었고 정부의 계획은 적중했다고 김동욱 교수는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