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수원화성 답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8) : 행궁 및 을묘원행(II)

Que sais 2020. 11. 1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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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을묘원행>

화성행궁이 완성되기 전부터 정조헌융원에 참배하기 위해 수원을 여러 차례 들렀으며 행궁이 완성된 후에는 이곳에 머물면서 친히 활을 쏘거나 노인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러한 행사 중에 여러 가지 깊은 뜻을 갖고 벌인 행사가 혜빈궁 홍씨의 화갑(華甲)을 맞이한 1795년이다.

온 백성의 이목이 집중되는 회갑 행차는 화성민을 비롯한 조선 백성들을 선무하고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왕권마저 넘보는 구세력인 노론 벽파를 제압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보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을묘원행 재현

작게는 비명에 간 사도세자의 무덤현륭원을 참배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효성의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20년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 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거대한 정치적인 시위라 볼 수 있다.

 

<배다리 건설>

을묘원행은 원행 한 달 전인 1795210일 화성부에서 무과 초시를 시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방 향시를 치루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13일부터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24일에 끝났는데 다리를 설치하는 작업만 열흘이 걸렸다.

서울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까지 행차하려면 1,7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한강을 반드시 건너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원래 왕의 행차가 한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관례이지만, 그때마다 수백 척의 민간 배를 징발하는 데서 오는 민폐가 매우 컸다.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주교(舟橋)를 건설했다.

배다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중국 주나라 문왕(文王) 때이므로 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다양한 배다리 건설 내용들이 전해지는데 고려 말엽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성(遼城)을 공격할 때도 부교가 사용됐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전해지는 것은 과거 선조들이 세운 교량가운데 배다리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배다리는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이면서도 다리의 안정성과 미적 감각까지 꾀하였다.

큰 배를 강심(江心)에 배치하고, 이를 축으로 작은 배들을 남북으로 배치함으로써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게 한 것은 오늘날 사장교의 원리와 비슷하다. 특히 동원된 민간 선박에는 못을 박지 않도록 하는 등 세심한 연결 방법을 구사하였다. 또한 바닷물이 드나드는 한강 일대의 지리 조건을 정확하게 습득하고 조수간만에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선창조교 형식으로 해결한 것은 현대인들이 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배다리는 조선왕조에서는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에도 나타난다. 연산군 때배다리 건설코미디나 마찬가지다. 연산군은 사냥을 좋아했는데 주로 다닌 사냥터가 지금의 강남구 양재동 아래 청계산이다.

연산군 6101일의 기록을 보면 영의정 한치형청계산에서 사냥하실 때에는 아직 그곳의 벼농사를 대부분 수확하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사람과 말이 밟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하면서 사냥 중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 여름, 가을, 겨울 사냥 시기가 있으니 지금은 가을 사냥철이다라고 억지를 부렸다.

문제는 연산군의 사냥을 위해 동원되는 사람이 군사 30,000명 포함 50,000이나 되는 대형 인원이므로 이들이 한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배다리를 건설했다.

이때 동원된 배가 무려 800, 왕의 사냥을 위해 엄청난 배가 동원되었는데 문제는 연산군이 수시로 사냥을 다녔으므로 800척의 배는 오로지 왕의 사냥용으로만 건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 111025자를 보면 연산군이 좌의정 박승질로 하여금 사냥을 갔다 오라고 했는데 이때도 사람 50,000명이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박승질이 돌아와 연산군에게 자신이 사냥한 것을 바치니 연산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승이 5만 명을 데려가 고작 꿩 한 마리를 잡았는가?”

 

정조의 을묘원행에 사용된 배다리는 정약용이 주 책임자였다. 정조정약용에게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다리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면서, 1789년 배다리를 건설하고 관리할 관청 주교사(舟橋司)를 설립하였다. 한강의 노량 지역에 설치했는데 당시에는 한강을 열수(洌水) 라 불렀기 때문에, 배다리의 이름을 열수주교(洌水舟橋)라 불렀다.

정약용이 배다리를 건설한 내용은 주교지남(舟橋指南)에 기록되어 있으며 8폭 병풍 중에도 주교도(舟橋圖)라는 이름으로 정조가 배다리를 건너는 행차의 장면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당시 정조을묘원행을 비롯하여 일 년에 거의 한두 번씩 사도세자의 융릉을 참배하였으므로 이때마다 배다리가 건설되었다. 정조가 자신의 이동으로 인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했지만 배다리 건설이 간단한 것이 아니므로 정조에 대한 민원 중 하나가 배다리였음은 물론이다.

 

한강 배다리 재현

221, 혜경궁의 회갑연과 노인을 위한 양로연의 예행연습이 있었고 25일에는 왕이 궁을 떠나는 행차 연습이 실시되었으며 궁궐의 후원에서 혜경궁이 가마를 타고 먼 길을 가는 예행연습도 거행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정조는 드디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원행 행차 길에 올랐다. 정조는 이 행차에 대비 정순왕후와 왕비 효의왕후는 서울에 남겨 놓고 혜경궁과 혜경궁의 두 딸청연군주, 청선군주와 동행했다. 이는 을묘년 원행에 왕실 가족 가운데 사도세자의 직계 혈연만이 참여했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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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한국에서 정조의 을묘원행을 복원하여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으로 정조는 을묘원행을 시작될 때부터 원행이 끝난 후 이에 대한 기록의 편찬까지 일일이 챙겼다.

이 책에는 첫 원행 논의가 나온 1793119일부터 원행의 준비와 연습을 거쳐 1795324일까지 진행된 관계 문서의 정리와 의궤의 편찬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책자는 금속활자로 간행되어 약 200권 정도가 인쇄되었으므로 책자의 원본은 많이 남아있다.

책은 전체 본편 6권에 부편 4권으로 되어 있고 본편 머리권에는 행사 날짜와 주관한 관리의 이름, 그리고 55매에 걸친 그림이 실려 있다.

을묘년 행사는 크게 나누어 봉수당에서 거행된 회갑을 맞는 혜경궁 홍씨를 위한 진찬의와 낙남헌에서 벌어진 양노연회, 득증정에서의 활쏘기, 신풍루에서 벌어진 쌀을 나누어주는 의식을 들 수 있다.

이 행사는 당대에 큰 화제꺼리였는데 이날 행차에 참여했던 18세기 문인 이의평화성일기혜빈궁 홍씨와 왕이 정좌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외삼문 신풍루 알패 모이니 차례로 들어갈새, 삼문 안에 둘러섰더니 주상전하 겨오사자비로 걸어오셨다. 여러 기생이 누른 사 관대에 환관을 쓰고 각각 의장을 들고 또 한 쌍은 찬의 알자로 앞에서 추창하여 인도하는데 구뵈뵈 절하여 오르시게 했다. 부복하여 지영후에 뒤로 따라 차례로 내삼문안 보계다리로 올라 추창하여 들어가니 사면이 꽃밭이다. 좌를 정하여 부복궤자한 후 눈을 들어보니 장락당 앞 뜰에 보계판을 한 길 남짓이 무으고 그 위에 차일을 치고 사면으로 설포장을 둘렀는데 방문을 열어 검은 발을 드리웠으니 자궁이 전좌하시고 마루에 성상이 전좌하여 겨오시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낙남헌에서의 양로연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교하시기를 양로연을 명일 낙남헌에서 하게 되니 온 백성에 쌀을 나누어 주는 사미 행사하는 것은 신풍루에서 하며 굶는 백성에게 사미하는 것도 신풍루에서 한다.’

 

이날 양로연에는 70세와 61세 된 노인들이 참석했다. 당시 행사를 그린 그림에는 건물 안 중앙에 왕의 옥좌가 있고 그 좌우로 각 두 줄로 5인씩 사람들이 앉아있으며 가운데에 두 사람이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건물 밖 기단 위에도 사람들이 서 있는데 중앙부에 두 줄로 11명이 서 있고 양 끝에 우산이나 다른 기구를 둔 사람 셋이 각각 서 있다. 기단 아래 마당에 5명씩 7줄을 이루면서 사람들이 앉아있고 그 좌우로 각 3열로 군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다. 제일 뒷 쪽에도 큰 북을 앞에 놓고 53명의 사람이 서 있다.

을묘원행으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정조는 제일 크게 경계했다. 특히 신하들이 행차를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물품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고 여러 차례 전교(傳敎)를 내렸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먼 지방의 진기한 음식을 구해 바치지 말고 음식도 사치하고 화려하게 차리지 말 것

2) ()에 개인적으로 물품을 진상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3) 기생과 정재(呈才)를 각 도에서 뽑아 올리지 말고, 궁중에서 일하는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에서 선발할 것

4) 왕에게 올리는 진찬(進饌)10여 그릇을 넘지 않도록 할 것

5) 연회 음악은 간편하게 하고 악기도 서울과 화성에 있는 것을 사용할 것

6) 철이 가까우므로 회갑 잔치와 장병들을 위해 10마리 이상의 소를 잡지 말고 진연(進宴)쇠고기를 쓰지 말 것

7) 수행원들이 하인들을 함부로 데리고 다니지 말 것

 

만약 이 법도를 어기는 자가 발견되면 처벌한다는 조항까지 덧붙였다.

정조가 화성에 머무는 동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만을 열었다면 아마도 그는 조선 여러 왕들 중에서 정조(正祖)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사실 회갑 잔치는 화성에서 치른 여섯 가지 행사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화성과 그 인근 주민의 선비와 무사, 노인, 결손 가정,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행사가 더 많았다.

당초에 행차 비용으로 10만 냥을 배당했지만 포곡(逋穀), 모미(耗米), 이자 등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국가의 공식적인 경비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았다. 당초의 예산 10만 냥 중에서도 2만 냥은 정리곡(整理穀)이라는 기금을 만들어 농민들의 농사 자금으로 대여하고 1만 냥은 제주도 빈민을 위해 사용했으며, 1만 냥은 화성의 둔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한마디로 행차 비용의 40%나 공익을 위해서 사용했다.

을묘년의 원행은 여덟 폭의 그림으로도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이 병풍 그림이 능행도(陵行圖) 이다.

그런데 이 그림 중에는 어가가 지나는 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행렬을 구경하는 모습도 있다. 사람들이 뒷짐을 지고 서서 구경하거나 연로 주변에 앉아서 행렬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 행상과 장난치는 아이들의 모습 등 자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화성 능행도

능행도를 통해 당시 왕의 행차가 백성들을 통제하고 접근을 막는 닫혀 진 행사가 아니라 백성들에게는 하나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등 왕이 백성들에게 친근하기 다가설 수 있는 열린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 때 만들어진 화성행궁은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고종 5(1868) 313일에 왕은 건릉과 현융원 및 화영전치제(致祭)하기 위해 화성행궁에 묵었다고 적었다. 또한 고종때까지도 화성행궁의 건물을 보수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처럼 왕들이 머물던 화성행궁이지만 구한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사라지는 비운을 맛본다. 행궁자리에 1910년 전에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자혜의원이 들어서서 일제강점기도립병원이 되고 일제의 경찰서가 나머지 건물을 밀어버렸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행궁의 옛 건물들은 상당수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이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에서 보인다. 행궁의 정문이었던 신풍루와 그 좌측 행랑, 신풍루 뒤로 태극 문양이 그려진 삼문(三門)이 보인다.

화성행궁의 건물들은 현재 모두 사라졌지만 행궁 서북 모퉁이에 있던 낙람헌과 노래당(老來堂)은 철거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낙남헌의 원래 건물 이름은 득중정이었는데 뒤에 행궁을 만들면서 아예 옛 건물인 득중정을 뒤편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다시 지은 것이다. 한때 낙람헌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1979에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어 오늘에 전한다.

한편 1989화성행궁 복원추진회가 구성되었고 19967화성 행궁 복원이 시작되어 19983일차 복원 준공식을 가진 후 계속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

행궁 내특별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의 모형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조실록38(1762) 5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自內嚴囚)라는 말만 나온다.

 

뒤주

안에다 가둔다는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함규진의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기도 한다. 특히 윤 오월이라 뒤주 안은 찌는 듯했고 세자는 목이 메도록 구해 줄 것을 간절히 애원하였으나 영조물 한 모금, 밥 한 숟갈 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사도세자에게 몰래 물과 죽을 줘서, 사도세자는 사흘이 지나도록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사실을 안 영조는 뒤주의 빛이 통하는 틀을 모두 막고 뒤주의 좌우로 풀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도록 하였다고 한다. 결국 8일이 지난 후에, 사도세자는 아사했다고 전하지만 의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9일을 버틸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홍씨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일 가능성도 높다는 견해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복원된 수원화성의 화성행궁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뒤주 체험이 있을 정도로 뒤주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아직 뒤주 속에서 9일 동안 체험 실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고문헌 :

정조의 꿈과 화성, 유봉학, 한국사시민강좌 제23, 1998

화성, 유봉학, 한국사시민강좌 제23, 1998

兩京 구상 통한 개혁으로 왕권 강화 노렸다, 배우성, 월간중앙역사스페셜 20047

정조 정권의 화성 건설을 통해 본 '천도'효과, 박현모, 월간중앙, 20047

정조의 개혁과 좌절, 경향신문, 2004.11.10.

세계 문화유산의 수수께끼, 과학동아, 2007.10.16.

사도세자, 김범, 네이버캐스트, 2013.01.07.

.수원화성행궁, 나무위키.

http://olibia.tistory.com/144

http://cafe.daum.net/yugsamaeul

http://blog.naver.com/wnrtks0.do?Redirect=Log&logNo=100013234781

유물로 읽는 우리역사, 이덕일 외, 세종서적, 1999

수원화성, 김동욱, 돌베개, 2002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시공사, 최준식 외, 2004

뜻밖의 한국사, 김경훈, 오늘의책,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