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착착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높힐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에게 절호의 순간이 찾아왔다.
1795년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을 맞는 해이고 화성 신도시 건설이 준공을 앞둔 시점이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1795년에 주갑(周甲),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르면서 국민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경종을 주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혜경궁 홍씨의 환갑연을 열었다. 외부적으로는 진찬례다. 진찬례란 왕실의 어른께 음식을 올린다는 뜻으로 정조가 자신의 어머니의 환갑연을 차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화성에서 진찬례를 할 필요가 있느냐이지만 명분은 충분하다.
사도세자의 주갑이 1795년인데다 무덤이 화성에 있기 때문이다. 국왕인 정조가 사망한 아버지와 생존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화성에서 예를 차린다는데 정조의 계획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신하들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정조는 그의 계획대로 모든 일을 이끌었다.
진찬례를 성공적으로 끝내 백성들로부터 호평을 받는 동시에 그의 반대자들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선 화성 건설을 보고 정조의 철저한 준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정조가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진찬례를 벌렸다는 것이다.
원래 정조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옛 수원읍의 주산인 화산(花山) 아래로 옮겨 현융원(顯隆園)에 조성했다.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그 원침을 영우원이라고 하였으며 묘호를 경모궁이라고 하였다. 원래 영우원은 양주 배봉산 기슭 현재 서울의 답십리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정조 13년(1789) 7월 11일. 박명원이 ‘영우원은 원침의 형국이 좁고 또 불길한 듯하니 다른 곳으로 천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소했다.
정조는 그의 상소를 받자마자 곧바로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여 7월 13일 화산으로 옮길 것을 결정했고 10월 7일에 현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10월 16일 공역을 완성했다. 이후 1794부터 3년여에 걸쳐 신도시를 축성하여 수원읍을 화성으로 명명하고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런 대 역사를 마련할 때 정조는 자주 수원을 방문했는데 이를 위해 왕의 거처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즉 수원에서의 왕의 거처가 바로 행궁이다.
행궁은 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멀리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으로 이궁(離宮) 또는 행재소(行在所)라고도 부른다. 왕은 자기가 다스리는 국가 어느 곳이든 임시거처로 정할 수 있다. 그런데 화성 행궁이 별다른 의의를 지닌 것은 정조가 현융원을 참배하러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해 건설한 것이지만 화성 건설이 지닌 도시의 가치를 논할 때 그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移置)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행궁인 장남헌 27칸을 비롯하여 삼문(三門) 5칸, 좌변익랑(左邊翼廊) 9칸, 우변익랑(右邊翼廊) 6칸, 서변행각(西邊行閣) 5칸, 서상고(棲上庫) 10칸, 중문 5칸, 내아(內衙)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公須) 7칸, 관청 5칸, 창사(倉舍) 60칸, 각처 담장 278칸에 이른다.
계속하여 행궁과 관아 건물은 신축과 증축을 거듭되었고 정조 14년 5월 초에는 득중정(得中亭) 9칸, 대문 1칸, 진남루(鎭南樓) 6칸, 좌익문 3칸, 좌우익랑 6칸, 남익랑 6칸, 북익랑 5칸, 강무당(講武堂) 16칸, 와호헌(臥護軒) 15.5칸, 대문 1칸, 익랑 8칸을 비롯하여 비장청(裨將廳) 15칸, 향청 19칸, 고사(庫舍) 42칸 등 대부분의 대형 건물들이 완성되었다.
『수원신읍영건공해간수성책』에 의하면 수원 신읍치에 건립된 건물은 크게 공해와 객사, 향교 및 군영으로 구분되었다.
먼저 공해에는 장남헌(壯南軒)을 비롯하여 득중정(得中亭)·은약헌(隱若軒)·내아(內衙)·비장청(裨將廳)과 정문인 진남루(鎭南樓) 등이 포함된다. 객사는 원래 그 안에 전패(殿牌)를 봉안하고 한 달에 두 차례씩 왕께 배례하며, 때로는 손님을 모시는 곳으로 수원 신읍치의 객사에는 벽대청과 동서헌(東西軒) 등이 있다.
향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전사청(典祀廳)과 동·서무, 동·서재(東西齋)가 마련되어 있었다. 끝으로 편의상 군영과 기타 건물로 구분된 건물로는 강무당을 비롯하여 군기대청·군향고대청·초관청(哨官廳)과 그밖에 영선·별고·미고·집사청 등의 건물이 들어 있다.
당시 군영 건물은 장용영이 성립된 초기였던 만큼, 정조 17년 신읍치에 장용외영이 설치되고, 정조 19년과 정조 22년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그 건물도 늘어난 지휘자와 병력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들을 건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외관인 수원부사 즉 유수가 집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왕의 원행시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화성행궁 이외에도 서울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路呈)에도 왕의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果川路)에 과천행궁·사근참행궁이 건립되었고 정조 18년 시흥로(始興路)가 새로 개통됨에 따라 시흥행궁 114칸과 안양행궁, 안산행궁 등을 건립하여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시흥·안양·안산·사근참 등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다.
『화성성역의궤』에 묘사된 전체 그림에 의하면 행궁은 뒤로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지가 있고 앞은 수원시가지가 열리는 곳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측 윗편에서 개천물이 앞쪽으로 흘러내려 전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형국으로 묘사되어 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정면 중앙에 약간 안으로 들어가서 정문인 진남루를 개명한 신풍루가 있고 신풍루의 정서(正西)방향에 좌익문, 그 뒤로 중양문이 있으며 정서방향에 정당인 봉수당이 있다. 따라서 신풍루에서 좌익문ㆍ중양문ㆍ봉수당은 행궁의 하나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나머지 건물들이 이 축의 좌우에 약간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수원행궁의 주요 건물은 다음과 같다.
봉수당
행궁의 정당으로 동향하고 있으며, 정조 13년 가을에 신읍치의 관아로 건립되어 정조 18에서 20년 북각도 외 48칸을 증수하여 전체 규모 112칸이다. 처음에는 정조의 어필로 장남헌이라 하였으나, 정조 19년인 1795년 윤 2월 정조의 현륭원 원행 때 진찬례를 이곳에서 베풀고 새로 봉수당이라 편액하였다. 진찬례란 왕실의 어른께 음식을 올린다는 뜻인데 이곳에서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뜻한다. 왕의 원행이 없는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집무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정당의 규모는 7량 21칸, 사방으로 행각과 여러 출입문이 나 있다. 정면에는 3문 형식의 중양문, 좌익문이 남쪽에는 경선문, 북쪽에는 어천문과 유억문, 건장문, 서쪽에 중영문을 세웠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행궁을 구성하는 중요 건물들에 대한 건설경위와 용도, 규모를 적은 기사가 상세히 적혀있어 각 건물의 창건 경위를 잘 알 수 있다. 봉수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상13년 기유 가을에 수원부 치소를 팔달산 아래에 옮겨 짓고 그 관아를 그대로 행궁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당(正堂)에 어서(御書)로 편액하시기를 장남헌 또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부사(府使)가 자리하게 했다. (중략) 을묘년 진찬 시에 또 봉수당(奉壽堂)이라 편액하도록 명하였다.’
이 글을 보면 화성행궁이 수원부의 치소를 그대로 행궁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① 좌익문
좌익문(左翊門)은 내삼문(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년 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된다.
② 중양문
중양문(中陽門)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을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좌익문과 함께 정조 14년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으며 좌우로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에서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앙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다.
③ 장락당과 봉수당
화성행궁 내에 있는 왕의 침전이다. 봉수당 남쪽 가까이에 봉수당과 지붕이 이어진 건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위치하며 정조의 어필 편액이 걸려 있다. 정조 18년인 1794년에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정당 7량 13칸과 남각도 외 12칸 등 모두 25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그 중 온돌이 8칸, 동서남 3면으로 모두 퇴칸이 있고, 서쪽은 분합문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장락당은 봉수당과 함께 행궁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으로 동서로 다복, 장복의 두 개 작은 문이 있고 앞마당 동쪽에 동룡관이 있으며 그 아래층의 3칸 판문은 지락문이라 하였다. 이들 건물의 용도에 대해서 『화성성역의궤』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다.’
봉수당은 행궁에서의 행사를 거행하는 정당이며 장락당은 왕의 침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자궁은 왕의 어머니를 뜻한다. 장락당 건물은 그 구조가 특이하다.
장락당은 봉수당 건물의 벽 일부와 붙어 있어서 장락당에서 곧바로 봉수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 때문에 두 건물의 지붕이 한쪽 모서리에서 맞붙어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런 건물 구조는 매우 드문데 이는 이 집의 용도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원래 행궁에는 봉수당의 전신인 장남헌만 있었고 화성 축성이 시작되기 전 헌륭원 전배 때 정조가 머물던 곳이다. 그런데 을묘년 원행에 대비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 장락당을 새로 건설한 것이다.
봉수당은 이름 그대로 왕이 어머니에게 수복을 기원하며 잔을 올리는 잔치를 하던 곳으로 혜경궁은 거처인 장락당에서 봉수당으로 이동해 정조의 잔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정조는 혜경궁이 건물을 이동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두 건물을 서로 통하게 만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세심한 배려가 조선시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집 모양을 화성행궁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④ 경룡관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했던 행궁의 부속 건물로 정조 18년인 1794년에 건립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 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경룡관으로 인해 혜경궁은 봉수당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장락당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5량 4.5칸의 건물이며 경룡관의 편액은 전 판서 조종현이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았고 4면에 난간을 둘렀으며 아래 3판문은 지락문이라 한다.
⑤ 복내당
행궁의 내당인 복내당은 5량 18칸의 규모이며,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 창건하였는데, 북쪽 온돌방 4.5칸은 정조 18년인 1794년에 중건하고 정조의 친필로 편액하였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⑥ 유여택
정조 13년 봄 복내당 동행각 밖에 지었는데, 처음에는 은약헌이라 하였다. 5량 8칸의 건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정조 20년 여름에 공신루 1칸을 비롯하여 각도 외 50칸을 증축, 옛 건물인 부사문 20칸을 포함하여 전체 78칸을 갖추었으며 유여택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이 건물은 평상시 수원부사가 침소인 내아로 사용했다. 정조가 1800년에 승하한 이후 순조 1년인 1801년 화령전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정조의 어진이 이곳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⑦ 낙남헌
봉수당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로, 처음에 정조 14년인 1790년 임금이 직접 활을 쏜 이후 득중정이라 편액한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정조 18년 가을에 득중정은 노래당 서쪽으로 옮겼고, 그 옛터를 넓게 닦아서 그 자리에 낙남헌을 지었다.
정조 18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행사용 건물이며 전체 규모가 49칸에 달하는 대형 건물로 현재까지 원형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기단의 축조 방식은 네모난 틀을 짜고 틀 안은 벽돌로 채웠다. 또 계단의 측면돌 즉 우석(隅石, 소맷돌)에 일반 건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구름 문양은 궁궐이나 왕실 사당 등 특별한 곳에서만 채택했다.
을묘원행으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낙남헌에서 화성의 장수자들을 불러모아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때 참석한 70세 이상과 61세 노인에게 각각 비단 1필씩을 내렸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낙남헌에서 치른 행사 장면을 그린 「낙남헌양로연도」와 「방방도」가 실려 있는데 「낙남헌양로연도」에는 낙남헌 앞 마당에 노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방방도」에는 과거 합격자인 듯한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앉아 있다.
⑧ 노래당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휴계용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 팔작지붕집으로 5량 7칸이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⑨ 득중정
득중정은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초기부터 있던 건물로 정조가 화성에 내려왔을 때 활쏘기를 하던 곳으로 정조 18년 가을 노래당 뒤쪽으로 옮겼다. 정조 14년에 이곳에서 활을 쏘아 4발을 모두 적중시켜 득중정이라는 편액이 붙여졌다고 한다.
⑩ 화령전
화령전은 낙남헌을 지나면 나오는 목조건물군으로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세운 봉안각이다. 화령전은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재실인 풍화당,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비상시 어진을 옮겨놓는 이안청,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령전은 1800년대에 세운 건물이 온전히 남아있는 곳으로 왕릉과 함께 수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제사시설이다. 화령전 정전인 운한각 내부에는 군복을 입고 있는 정조의 어진이 있다.
정조가 1800년 6월 28일에 승하하자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다.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인 1801년 4월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으로 운한은 왕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 불려졌다는 시경의 시구에서 따왔다.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현재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어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이안청ㆍ복도각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⑪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1790)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 불렀는데 정조 18년, 남북 군영을 좌우로 설치하고 행각 또한 양익으로 나누어 지으면서 편액도 신풍이라 바꾸었다.
'신풍'이란 이름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풍 땅은 새로운, 또 다른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원행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였다. 가운데 문은 어도(御道)로, 왕만 지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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