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밝힌 최후의 날〉
황태자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는데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군대에 가지 않은 이유로 혈액에 질병이 있기 때문이라고 신체검사에 적혀 있었다. 더욱이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혈우병의 징후를 갖고 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49세인 1953년에 큰아들인 올레그 바실리에비치 필라토프를 낳았는데 그는 혈우병의 징조가 있는 블론드 머리를 갖고 있다. 또한 한 명의 딸도 같은 징후를 보였다.
혈우병 때문에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알렉세이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정말로 알렉세이라고 하면 혈우병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84살까지 산 셈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단 한 번도 병원에 간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건강했다. 이에 대한 반론은 간단하게 확인되었다. 조사원들은 혈우병 센터에서 혈우병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와 마찬가지로 장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하튼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알렉세이 황태자라면 아나스타샤 공주의 가짜 사건에서도 가장 큰 의문점으로 지적된 것이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였다. 처형의 날 알렉세이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모든 내용이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앤더슨 부인과는 달리 명쾌하게 자신이 살아난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가족에게 직접 말한 것을 토대로 조사원들이 작성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3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알렉세이를 비롯한 11명이 모여있었는데 그들을 처형하려고 모인 장병은 모두 12명이었다. 좁은 방에서 처형 책임자인 유로프스키의 명령에 따라 장병들은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했다. 이 설명은 에루마고프의 3명만이 처형장에 들어왔다는 것과 다소 다르나 에루마고프도 자신들이 먼저 황제일가를 처형하고 추후에 장병들이 확인 사살하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정황설명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필라토프는 처음부터 12명이 학살 장소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학살의 장소가 너무나 좁았기 때문이다. 좁은 방에서 모든 총이 동시에 불을 품었기 때문에 곧바로 연기가 방에 꽉 찼다.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물론 장병들은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몇 명이 구토까지 하자 장병들은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는데 시간이 없었는지 다시 들어오더니 희생자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트럭에 희생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형장에서 트럭까지 희생자들을 옮기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의 시간이었는데 그 동안 유로프스키는 현장을 비웠다. 유로프스키가 다시 현장에 돌아와서 처형에 동원된 장병들 중 몇몇이 희생자들의 보석을 훔쳐서 도망간 것을 알았다. 유로프스키는 곧바로 도망간 장병들을 찾아 약탈된 물건들을 내놓으라고 욱박지르는 동안 12명의 처형자 중에 한 명인 스트레코틴은 알렉세이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는 희생자들을 매장 장소까지 옮길 트럭이었다. 트럭은 50마력도 되지 않는 1.5톤의 피아트였는데 과적에다 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을 달렸는지 엔진이 과열되어 중도에서 정지했다. 자동차에 큰 문제점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로프스키는 트럭의 짐을 줄이기 위해 희생자 중 일부의 시신을 내려놓고 예상된 매장 장소로 떠났다. 그들이 희생자를 내려놓은 곳은 기차길 옆의 다리였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이 때 트럭에서 내려진 희생자 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얼마 후 정신을 차렸으며 캄캄한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부상당한 몸으로 철길을 따라 인근의 샤타쉬 역으로 걸어갔다. 반면에 유로프스키는 희생자들을 매장하고 되돌아오면서 자신들이 내려놓은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인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 때 황제일가를 처형할 때 참여한 스트레코닌도 독자적으로 알렉세이를 찾아 인근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는 알렉세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샤타쉬 역에 있는 알렉세이를 발견하고 그를 140마일이나 떨어진 사드린스크 역으로 옮겼다. 스트레코닌은 알렉세이를 크세노폰 필라토프에게 인계했다. 크세노폰 필라토프는 마침 아들이 인플렌자로 사망했기 때문에 알렉세이가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행세를 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살려 준 스트레코닌을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유로프스키는 간발의 차이로 스트레코닌이 알렉세이를 사드린스크로 옮겼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반대 방향만 수색했다. 시체를 찾지 못했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수색자들은 두 구의 시체가 사라졌지만 인근에 있는 농부가 시체를 발견하고 정교회의 풍습에 따라 그들을 매장해주기 위해 옮겼다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정교회에서는 사망자를 발견하면 그들을 매장해주는 것이 의무라고 가르켰다. 그러므로 유로프스키는 니콜라이 2세의 가족 모두를 자신이 직접 매장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일부 학자들은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1988년에 사망했는데 몇 년 만 더 살았다면 황태자 알렉세이에 대한 진상은 완전히 규명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소련이 곧바로 붕괴하였으므로 그가 살아있었다면 자유롭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아나스타샤로 주장한 앤더슨 부인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DNA 분석에 있어서도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자식들이 로마노프 왕조의 가족들과 근친일 수 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은 그의 말 전체가 거짓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만으로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알렉세이라고 확정지어 말 할 수는 없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그가 사망한 후 러시아 과학자들의 연구 즉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발견된 유체 중에서 알렉세이 황태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이야기가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의문점을 남겨주었다.
그런데 2007년에 마리아 공주와 함께 진짜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굴되었으므로 필라토프가 적어도 알렉세이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세상을 혼동으로 몰아간 니콜라이2세 가족 처형에 관한 시나리오는 처형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알렉세이와 마리야의 시신을 묻은 후 남은 시신들을 따로 매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처형된 9명이 함께 매장된 곳이 공개되었고 이어서 두 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견되어 필라트프가 알렉세이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졌지만 바실리 필라토프가 죽기 전 왜 자신을 황태자라고 주장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한 것처럼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필라트프만은 아니다. 유독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만 등장한 것은 당대에 두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앤더슨이 아나스타샤라고 철저하게 위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아나스타샤와 용모가 유사한 것은 물론 아나스타샤가 실종중이라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알렉세이의 경우도 실종한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참칭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돈과 명예를 거짓말로 얻으려는 사기꾼의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라토프는 엄밀한 의미에서 앤더슨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우선 DNA분석을 고려하면 그가 니콜라이 2세 황가와 연계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신이 그런 내용을 알고 진짜 알렉세이라고 발설했다면 여러 면에서 앤더슨보다 더 큰 파급을 초래했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나서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아나스타샤까지 설명하면서 자기가 알렉세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현재 설명되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필라토프가 적어도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후손이거나 혹은 니콜라이 2세의 혼외자식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황제의 혼외 자식이라 일반 귀족으로 숨겨져 로마노프 왕조 숙청 때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필라토프 본인도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의 사촌 또는 이복동생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련 치하에서 자신의 친척들인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이 숙청당하는 것을 보고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임종 직전에야 그걸 공개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렉세이 본인이었다고 죽기 전에 실토했다는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알렉세이의 시신이 발견되어 적어도 필라토프가 알렉세이는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설명에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도 있다. 필라토프의 나이가 워낙 많아 즉 기억에 혼선이 생겨 자신이 알렉세이 본인이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영국은행에 엄청난 황제의 자금이 예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회계부장과 경제부장을 역임한 윌리암 클라크는 영국의 한 은행 자료실에서 러시아 황제의 마지막 계좌 입출금 명세서를 발견했다. 잔액은 거의 10억 마르크였다. 그러나 그 계좌는 폐쇄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프란지스카 스한스코프스카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돈의 노예가 되도록 만든 러시아의 해외 유출 자금은 전무했다. 클라크는 은행에 예치되었던 돈은 니콜라이 2세가 아버지인 알렉산더 3세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니콜라이 2세는 애국자였고 개인재산을 외국에 예치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철도를 위해 파리와 런던 그리고 뉴욕에서 차관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황제는 자신의 돈을 1900년 4월 다시 러시아로 반입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황제는 그의 부유한 친척들 돈을 경제적으로 피폐한 러시아재정을 일으키는 데 사용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참고문헌 :
「황제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루돌프 첼민스키,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년 11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DNA검사에 대한 논란」, 배우철, 동아사이언스, 2004.4.23.
「X염색체」, 한삼희, 조선일보 만물상, 2005.3.19.
「안나 앤더슨은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 아니다(1)」, 김형근, 사이언스타임스, 2007.7.1
「안나 앤더슨은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 아니다(3)」, 김형근, 사이언스타임스, 2007.7.9.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나무위키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나무위키
『세계 상식백과』, 리더스다이제스트, 1983
『상식밖의 세계사』, 안효상, 새길, 1994
『풀리지 않는 세계사 미스터리 1』, 만용기, 하늘출판사, 1995
『세계의 불가사의 21가지』, 이종호, 새로운사람들, 1997
『어, 그래?』, 이규조, 일빛, 1998
『이규태 코너』, 이규태, 월간조선, 2001
『황제의 유산』,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북스포리, 2004
『뒤바뀐 세계사의 진실』, 키류 미사오, 베텔스만, 2004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뜨인돌, 2004
『과학으로 여는 세기의 불가사의』, 이종호, 문화유람, 2008
『영화 속의 바이오테크놀로지』, 박태현, 생각의 나무, 2009
『왕실 미스터리 세계사』, 피터 하우겐, 다실초당, 2011
'세계를 속인 거짓말 > 아나스타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나스타샤 공주(8) : 알렉세이 황태자의 등장(I) (0) | 2020.11.19 |
---|---|
아나스타샤 공주(7) (0) | 2020.11.19 |
아나스타샤 공주(6) (0) | 2020.11.19 |
아나스타샤 공주(5) (0) | 2020.11.19 |
아나스타샤 공주(4) (0) | 2020.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