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에서 발견된 러시아황제 가족>
1978년 8월 겔리 랴보프는 연속극 촬영을 위해 스베르들로프스크(에카테린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이 살해된 현장인 이파티에프 궁전을 방문했다.
랴보프는 텔레비전 대본과 소설로 러시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가 중에 한 명이다. 붉은 군대를 소재로 그의 텔레비전 연속극이 인기를 얻어 소련 전국에 걸쳐 유명해졌으며 내무부장관 니콜라이 슈첼로코프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가 니콜라이 2세의 살해 현장을 찾은 것은 공산당이 집권하고는 있지만 어떤 명분으로든 러시아의 황제 가족을 참혹하게 살해했다는 것이 러시아 국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도 니콜라이 2세의 유골이라도 찾아서 적절한 곳에 묻어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고 그 일을 유명 작가인 랴보프가 담당해주기를 원했다.
랴보프는 스베르들로프스크의 지질학자인 알렉산더 아브도닌을 만나서 이 문제를 상의했다. 아브도닌이 이파티에프 학살사건에 대한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단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하게도 랴보프는 소련의 유명 인사이므로 레닌도서관과 10월혁명기록보관소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처음에 유로프스키가 시체들을 예카테린부르크 외곽에 있는 광산의 수갱(竪坑)에 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곧 소문으로 퍼져나가자 그는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그곳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중심부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진 습지의 진흙길 밑에 옮겨서 묻었다.
유로프스키는 시체의 얼굴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시체의 얼굴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으깨라고 명령했다. 그런 뒤 유로프스키는 시체를 분해하기 위해 황산을 부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구덩이를 메운 다음, 인근 철로에서 가져온 무거운 나무침목으로 그 위를 덮었다. 시체들이 묻힌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체에 황산을 부었다는 등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여하튼 라보프는 성페테스부르크에서 알렉산더 블레비치 유로프스키 제독을 만났다. 그는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처형했던 야코프 유로프스키의 아들이었다.
놀랍게도 알렉산더 유로프스키는 아버지가 저지른 살인에 관한 서류의 복사본을 집에 소장하고 있었다. 유로프스키의 보고서는 앞에 설명된 처형 후 광산에 묻었다는 전설과는 달리 황제 가족을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예카린부르크에서 북서쪽으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코프트야키, 철로와 거리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제츠크 공장 쪽으로 대략 210미터 떨어진 장소에 그들은 매장되었다.’
아브도닌과 랴보프는 유로프스키의 자료를 근거로 1979년 5월 30일 밤 발굴에 들어갔다. 이것이 세계를 놀라게 하는 니콜라이 2세의 무덤에 관련된 전말이다.
그들은 검은 점토로 된 진흙투성이의 구멍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기름이 고여 있었고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멍의 바닥은 강한 산성토양으로 무덤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유로프스키의 부하들이 시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죽은 사람의 얼굴에 염산을 뿌렸다는 정황과도 일치했다.
그들이 직접 군용 삽으로 땅을 파자 3구의 해골이 나타났다. 랴보프는 곧바로 두 개의 해골을 모스크바로 운반했고 나머지 한 개의 해골은 오브도닌이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러나 당시는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였으므로 섯불리 발굴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당시에 그들의 행동은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해골을 나무 상자에 넣어서 다시 땅에 묻어 두었고 소련의 체제가 바뀔 때까지 비밀을 유지하기로 했다.
10년이 지나 구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정부가 들어서자 그들은 1991년 러시아 당국에 보고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장소에 대해 본격적인 발굴을 촉구했다.
구소련에서 러시아로 바뀐 상황에서 공산주의 정부와는 달리 제정러시아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러시아 정부는 곧바로 그들이 발견한 지역의 발굴을 승낙했다.
러시아의 이와노프 박사와 해외의 전문가들도 참석한 가운데 1991년 여름, 깊이 1미터 정도의 얕은 땅에 매장되어 있던 유골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손상이 심한 데다 소문처럼 의복은 전혀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폭력이 자행된 흔적이 있었고 총과 총검에 의한 것으로 판단되는 두개골도 있었다. 이것은 학살 당시에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사건과 원칙적으로 잘 일치했다.
발굴된 유체는 당초 발표된 11구가 아니라 모두 9구였고, 각각 완전한 골격의 15~50%가 남아 있었다. 이들이 니콜라이 황제 일가의 유체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증거물 7번’은 총검으로 찔린 자국이 있는데 아래턱에 금과 백금으로 도금한 이빨로 보아 황후 알렉산드리아로 추정되었다. ‘증거물 4번’은 엉덩이뼈가 오랫동안 승마로 인해 형태가 변했고 젖혀진 턱과 풍치가 있는 것을 보면 니콜라이 2세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일가 중 2명의 유체가 부족했다. 이것은 알렉세이와 공주 중에 한 사람이 따로 처형됐다는 설이나 두 사람이 혁명을 피해 도망갔다는 설과 일치하는 셈이었다.
이들 검사는 러시아의 법의학자인 세르게이 아브라모프가 담당했다. 해골들은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잔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어떤 희생자는 눈알에 총알이 관통한 것도 있고 개머리판으로 으깨어진 턱도 있었다.
황후 알렉산드리아의 두골은 곧바로 확인되었다. 총검에 의해 난자되었지만 아래턱에 금과 백금으로 도금한 이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엉덩이가 오랫동안 승마로 인해 형태가 변했고 젖혀진 턱과 풍치가 있는 두골은 니콜라스 2세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들 유골만으로 러시아 황제 일가족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유명한 유전자 감정법이 등장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시료가 완전해야 하는데, 74년이나 지난 유골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DNA 시료를 얻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PCR(중합효소 연쇄 반응: Polymer chain reaction) 기법을 사용하여 얻어진 DNA를 분석한 결과 여성이 5구, 남성이 4구였다. 정황상 니콜라이 황제의 일가와 시종의 유체로 간주되었지만, 이들 유골이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유전자와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물적 증거가 있어야 했다.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DNA의 해석이 사용되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질에 다수 존재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모계의 생식 세포를 통해서만 유전된다. 핵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DNA를 갖고 있으므로 그 DNA 배열을 통해 모계를 조사할 수 있다. 더구나 핵 DNA에 비해 미토콘드리아 DNA는 세포 안에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낡은 표본에서도 보존 상태가 좋은 경우가 많다. 4천 년이나 지난 이집트 미라의 DNA 해석이 가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사팀은 황후라고 생각되는 유체에서 발굴된 미토콘드리아 DNA를 황후 외가 근친자의 DNA와 비교했다. 모계를 조사하기 위해 현 영국 여왕의 남편인 에든버러 공 필립 전하와 비교한 결과 여자 유골 네 개가 같은 배열을 갖고 있었다. 발견된 유체가 니콜라이 2세의 가족이라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
니콜라이 2세로 생각되는 유체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배열은 황제 외가의 조모 가계에 속하는 현존 인물 셰레메체프 백작 부인과 스코틀랜드의 파이프 공의 것과 비교했다. 여기서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유체에는 두 종류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인물이 두 종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가지는 ‘헤테로플라스미드(heteroplasmid)'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유례가 없는 유전적 이형(異形)이다. 학자들은 98.5% 니콜라이 2세의 유체로 결론을 내리면서도 이 유체가 니콜라이 2세의 것이라고는 확정하지 못했다.
1994년에 연구팀은 보다 신뢰성이 높은 시료로서 1899년에 사망한 니콜라이 2세의 동생 게오르기 로마노프 대공의 유골을 발굴하여 DNA를 비교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게오르기 로마노프 대공의 미토콘드리아 DNA에서도 헤테로플라스미드가 발견되어 이 유체가 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것이라고 판정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사실상 니콜라이 2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것은 엉뚱한 사건에 연루되었던 손수건이다.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시절이었던 1891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경비를 맡았던 츠다 3세 순사가 황태자에게 칼부림한 사건이 있었다. 츠다 3세가 황태자에게 달려들어 칼로 찌르는 바람에 황태자가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츠다 3세를 처형하겠다고 한 다음 극비로 살려 주었는데, 이때 니콜라이 2세를 찔렀던 칼을 닦은 손수건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구팀이 손수건에 남아 있던 니콜라이 2세의 혈액과 유골에서 채취한 DNA를 비교한 결과 두 시료의 결과가 일치했다. 물론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황족들 등 친척들도 남아 있었지만, 이 셔츠에서 나온 니콜라이 본인의 유전자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 결과 9구의 유골 중에서 5구의 유골이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이라고 연구진들은 결론을 내렸다.
여하튼 9구의 유골은 황제 부부, 세명의 공주와 시종들의 유골로 판명되었고 알렉세이 황태자와 또 한 명의 공주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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