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공주(8) : 알렉세이 황태자의 등장(I)

Que sais 2020. 11. 19. 11:46

youtu.be/67uari7IdX8

<성당에 안치된 황제의 원혼>

구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태어나자 니콜라이 2에 대한 재평가가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 니콜라이 2세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니콜라이 2를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으로 스페인에 살고 있는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200512월 러시아 검찰에 서한을 보내 니콜라이 2세의 정치적 복권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블라디미로브나대숙청으로 숨진 다른 러시아 정치 희생자들이 사후 사면복권을 받은 것처럼 황제와 그 가족들도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정치적 동기에서 황제와 가족을 살해했음을 입증할 만한 공식 자료가 없다는 이유거부했다.

이에 블라디미로브나법원에 소송을 냈는데 검찰은 당시 법정에서 황제 가족이 정치적 박해상태에 있지 않았고 그의 죽음은 의도적 살해를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의 판결도 검찰의 주장과 같았다. 니콜라이 2세 가족정치적 압제의 희생자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설명으로 소송을 기각했고 결국 대법원으로부터도 같은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의 판결 요지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정치적 억압의 희생자들이 아니며 그들의 권리도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황제와 그의 가족의 처형은 사전에 계획되었으며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결코 공식적으로 어떤 형()을 받지 않았기 때문복권대상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정치적 복권은 불발탄으로 끝났지만 그들의 유해는 그들의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베드로바울 성당에 안장되어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했다.

러시아황실 암살사건이 발생한 지 80이 되던 1998717 보리스 옐친 대통령로마노프 황실 친척 후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암살된 황제를 비롯해 황실 일가들의 유골들은 성당에 안장되었다. 정치적인 혼란 속에 암매장된 황실 일가족을 찾아 다시 안장해 주는 것은 소련은 무너졌지만 볼세비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산당 러시아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고 역사적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라고 발표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족의 장례식

그러나 이날 장례를 겸한 안장식에는 제정러시아 당시 러시아 국교로 황실과 밀착관계를 유지했던 러시아정교회(Russia Orthodox Church) 수장들은 발견된 유골들의 진위 여부에 의심이 많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러시아 정교회황제와 그의 가족을 순교자로 추앙하고 있다.

망국의 군주라는 점에 있어서 니콜라이2대한제국고종, 순종비교되기도 한다.

학자들은 니콜라이 2가 당시 열강의 군주 중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군주였다고 설명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공사였던 베베르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여하튼 아관파천고종을 받아주었고 의화단 운동대한제국에 출병을 권유하는 등 정치적 도움은 물론 총과 같은 물자적 지원도 해주었다.

이는 니콜라이 2가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짐은 우리가 조선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니콜라이 2프로이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에게 한 말이다.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

놀라운 것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민영환(閔泳煥)참석했다고 알려진다. 민영환고종황제가 만수무강을 빈다는 말을 전하자 니콜라이2는 만수가 몇 살이냐고 묻고 고종의 만수무강을 빈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두 황제는 불우한 시운에 휘말려 6개월 차이를 두고 유명을 달리했다.

 

<알렉세이 황태자 살해되지 않았다>

1988아스트라칸(Astrakhan) 주의 이크리아노이(Ikryanoye) 마을에서 지리교사인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사망하기 직전자신의 비밀 즉 자신이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라고 털어놓았다.

그가 알렉세이라는 주장은 간단했다. 자신은 1918년 처형 현장에서 죽지 않고 부상당했는데 그들을 처형한 병사 중에 한 명인 스트레코닌이 그를 극적으로 구출했다는 것이다. 특히 필라토프가 자신의 신원을 밝혔을 당시는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발견된 황제 일가의 유골을 검사한 결과 황태자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이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8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사이의 14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적갈색 머리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고 한다.

니콜라이 2는 딸만 내리 넷을 낳은 뒤에야 비로소 황위계승자가 될 아들이 태어나 아들을 '햇님'이라고 칭할 정도로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문제는 알렉세이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알렉세이 황태자의 혈우병유럽 왕가에 내려오는 유전병에 걸렸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19세기 유럽 왕실혈우병 환자가 유독 많았다.

유전병의 시원(始源)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여왕에겐 딸이 다섯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이 혈우병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보인자(保因者)였다. 이 딸과 손녀들이 독일 및 러시아 왕실과 혼사를 맺게 되면서 혈우병은 여러 유럽 왕가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니콜라스 2결혼독일의 알렉산드라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가 되며 알렉산드라 황후의 작은오빠, 알렉세이 황태자작은 외삼촌프리드리히혈우병을 앓다가 죽었다. 알렉세이혈우병에 걸린 것도 이와 같은 연유이다.

혈우병이 남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그 유전인자가 () 염색체X염색체에 실려 다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2346개의 염색체가 있는데 그 중 44권은 쌍을 이룬다. 똑같은 내용의 백과사전이 두 권씩, 모두 22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 염색체만은 남녀가 달라 여성에겐 X라는 똑같은 내용의 백과사전 두 권이 한 쌍(XX)을 이루지만, 남성의 성 염색체는 X라는 사전Y라는 사전으로(XY) 구성돼있다.

단순한 예로 한쪽 사전의 내용이 잘못돼도 짝을 이루는 다른 쪽 사전의 내용만 올바르면 유전병이 생기지 않는다. 소위 예비군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 염색체가 'XY’로 구성된 남자의 경우 XY 중 어느 한쪽에 오류가 생기면 그 오류를 보정(補正)해줄 여분의 염색체가 없다. 혈우병이나 대머리, 색맹은 그래서 남자에게만 나타난다.

학자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수명이 긴 것도 여자에게 유리한 성 염색체의 유전자 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더구나 여성 호르몬에스트로겐콜레스테롤을 없애 심장병 등을 막아준다. 반면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은 싸움이나 전쟁 같은 공격적 행동을 유발해 수명을 단축시키기 일수라고 말한다.

알려지기는 알렉세이가 동화속의 왕자님처럼 미소년이었지만 혈우병 때문에 안색이 늘 창백했으며 잔병치레가 잦았다고 한다. 감기에 걸려 코를 세게 풀면 코 안의 점막이 헐어서 바로 피가 나왔기 때문에 황실에서 촉각을 곤두세웠고 알렉세이 자신도 오래 살 수 없단 걸 알고 누나인 올가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는데 그가 어려서 쓴 일기를 보면 친구들과 직접 같이 놀지는 못하고 친구들이 노는 것을 지켜봤다고 적었다. 그러나 누나들과는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아나스타샤 공주와 친하여 아파서 힘들어하는 알렉세이와 자주 놀아 주어 웃게 만들었으며, 늘 다정히 돌봐줬다고 한다.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

몸이 편치 않았음에도 군대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이 지병을 앓기 때문인지 타인의 아픔에 민감했다고 전한다. 알렉세이 일생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당대의 저명 흑마술사로 유명한 라스푸틴('끄새' 세계의 악당 라스푸틴)과의 관계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외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당시 흑마술사로 유명한 라스푸틴을 초청했는데 신기하게도 라스푸틴알렉세이를 위해 기도해 주면 알렉세이가 차도를 보이는 등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막 상용화된 아스피린사용했다고도 한다.

물론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알렉세이와 차이나는 점이 있다.

우선 알렉세이1904년에 태어났는데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공식적으로 19071222 크세노폰 아파나시에비치 필라토프와 엘레나 파브로브나 필라토바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는 공식적으로 알렉세이보다 3살이 어리다. 세례를 받았던 교회에 출생기록이 남아 있었으므로, 나이가 거짓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크세노폰 아파나시에비치 필라토프는 구두제화공이었는데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알렉세이라면 그는 크세노폰 아파나시에비치 필라토프와 단 몇 년 밖에 함께 살지 않은 것이 된다. 바실리 필라토프1921년에 사망했고 더구나 엘레나1917년에 사망했다.

여하튼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18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21년부터 1930년까지 구두제화공으로 있다가 1934년에 우랄에 있는 노동자 교육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에는 중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시험에 통과하여 중학교 교사로 재출발한다. 1938년에는 고등학교 지리 교사 자격을 획득하여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53년에는 수학 선생쿠즈미니슈나 크리멘코바와 결혼했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죽으면서 유언한 이야기는 곧바로 퍼져나가 그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가 진행되자마자 조사원들은 곧바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4명의 아이들이 로마노프 황제 가족들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유사성에 놀란 과학자 안드레이 바렌티노비치 코바리오프레오니도비치 포포프는 독일의 뒤셀도르프에 있는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대학의 법의학 본테 교수에게 이들 가족과 로마노프 가족 사이의 연관성을 의뢰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자식들로마노프 황제 가족과는 14군데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해부학적으로 보아 목뼈를 비롯한 등뼈의 골격이 유사하며 DNA 분석에서도 혈족임이 틀림없다.’

 

DNA 분석에서도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자식들이 로마노프 황제의 가족들과 닮았다고는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필라토프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조사원들은 보다 정확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조사를 계속했다.

 

알렉세이와 필라토프

증거는 계속 축적되었다. 1939년부터 1985년까지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필적과 1916년부터 1918년까지의 황태자 알렉세이의 필적을 비교한 결과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필적감정사가 확인했다. 과학적으로 년령에 따라 얼굴의 형태가 변하는 것을 추적하는 비교 분석에 있어서도 알렉세이와 필라토프가 동일인이라는 결론이었다.

생전에 그의 개인적인 행적도 다소 달랐다.

그는 매우 가정적이었으며 구두 제화공의 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학, 미술,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저녁마다 그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책을 큰 소리로 읽었고 악기를 직접 다뤘다.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아코디온을 다룰 줄 알았고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쇼펭 등 고전 음악을 잘 쳤다. 더구나 러시아의 민속 음악은 물론 발라드와 오페라 아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았고 특히 러시아의 군대 역사전쟁사에 대해 아이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다. 또한 그는 매년 새해를 맞이하여 항상 집안의 축제로 만들었다. 가족들은 모두 장난감이나 장식품들을 만들어 집안의 천장까지 닿는 나무를 장식했고 새해가 될 때 선물을 교환했다. 특히 큰아이들은 보다 작은아이들을 보살피도록 항상 주의를 주었다.

그런 행동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최상류사회에서 교육받은 사람의 전형이었다.

로마노프 가족을 잘 알고 있는 죠지 사벨스키 신부는 가족을 서로 보살피는 것은 황제 가족의 전통이라고 말했다. 그의 가정교사인 질리아르니콜라이 2가 어린 공주들과 황태자가 있는데서 큰소리로 글을 읽었으며 어린아이들을 자상하게 보살폈다고 말했다.

제정시대의 지방장관이었던 바실리 판크라토프니콜라이 2러시아의 역사를 자주 이야기해 주었다고 했다. 황제의 역사 지식은 틀린 곳이 많았으나 전쟁사는 매우 잘 숙지하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의 아들오레그 필라토프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시기가 서로 다른 전쟁사를 우리들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었다. 아버지는 매우 열정을 갖고 부대의 혼란이나 특정 전투의 주력부대의 배치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이 그 전투에 참가한 사람처럼 세세한 면까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가 수많은 국가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6개 이상의 언어를 숙지하고 있었고 푸쉬킨, 체홉, 괴테는 물론 많은 작가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바실리 크세노폰토비치 필라토프10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3살부터 제화공으로 22살까지 일했는데 그 모든 것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구두제화공의 아들이 어려서 접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구두제화공의 경력으로 수많은 악기를 다루고 여러 가지 언어를 할 수 있으며 시를 외울 수는 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